송교인같은 정치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다. 글: 정만군(程萬軍) 송교인암살100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글들이 그를 칭송하고 있다. 또 한번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누구든 좋게 보면 무한히 끌어올리고, '호인'의 과실과 반성은 거의 없다. 의문의 여지없이, 신해혁명후 중국제1정당의 실제창시자로서, 송교인은 대단한 인..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2013.04.27
정정영(程正瀛): 무창의거 수의제일창(首義第一槍)에서 반도로... 글: 유계흥(劉繼興) 무창의거가 발발하기 전날, 의거소식이 누설되었다. 여러 혁명지사들이 연이어 피해를 입었다. 위난의 시기에 정정영은 앞장서 들고 일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청나라조정의 충실한 조아(爪牙)이자 공정영 2배 배장(排長)인 도계승(陶啓勝)을 총을 들어 쏘았고, 중국국..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2013.03.31
반란에는 돈이 얼마나 드는가? 글: 장명(張鳴) 일을 해내려면 돈이 든다. 이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토비가 되어 약탈을 하는 것은 원금이 필요없는 장사라고. 그저 리스크가 클 뿐이어서, 일단 잘못되면 목숨이 날아간다. 다시 더 이전으로 가보면, 반란에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같다. 그..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2010.12.01
무창의거(武昌起義)의 전과정 글: 김만루(金滿樓) 1911년 9월 14일, 무창의 초망루(楚望樓) 10호에는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무한의 두 혁명단체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당시 사천보로운동(四川保路運動)이 이미 일어나서, 혁명세력이 전국을 석권하고 있는 상화이어서, 이 양파의 사람들은 ..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200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