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반란에는 돈이 얼마나 드는가?

by 중은우시 2010. 12. 1.

 

: 장명(張鳴)

 

일을 해내려면 돈이 든다. 이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토비가 되어 약탈을 하는 것은 원금이 필요없는 장사라고. 그저 리스크가 클 뿐이어서, 일단 잘못되면 목숨이 날아간다. 다시 더 이전으로 가보면, 반란에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같다. 그저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정권을 빼앗으면 그만이다. 빼앗게 되면 일본만리(一本萬利)이고, 빼앗지 못하면 모두 먹을 것도 없고, 그저 흩어지게 된다. 그래서 진승, 오광이 한 일과 같이 반란은 기본적으로 원금이 들지 않는 장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손중산의 혁명당은 홍수전과 같이 먼저 기치를 내걸고, 다시 성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방회(幇會)에서 신군(新軍), 그리고 방영(防營)까지, 심지어 혁명핵심분자의 활동경비도, 교통, 숙박에서 식비에 이르기까지의 돈을 모두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다. 손중산과 같은 혁명당 사람들은 원래 직업혁명가이다. 자신도 모금된 돈을 살았다. 어떤 때는 돈이 많다가 어떤 때는 돈이 부족했다. 반란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경비를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원들중 사업이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은 지키지를 못했다. 예를 들어, 손중산의 형인 손미(孫眉)같은 경우도 동생의 혁명을 도우다가 집안이 파산했다. 또 다른 혁명당의 부호인 장정강(張靜江)은 손중산과 돈을 부치는데 암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ABCDE는 각각 1, 2, 3, 4, 5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중산은 걸핏하면 C E를 요구하여, 그도 대응하기 난감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당의 최대의 자금원은 남양(南洋)이었다. 혁명당인드리 자금을 모으는데는 해외화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화교들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동남아였다. 유럽 및 미국은 두번째였다. 동맹회의 사람들중 해외자원이 가장 많고, 자금모집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역시 손중산이었다. 손중산만이 해외화교들 사이에 인맥이 좋았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당시의 모금은 해외화교들의 혁명적 각성에서 나오기도 하였지만, 많은 모금액은 실제로 화교들의 혁명에 대한 도박적 심리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혁명당인들이 모금활동을 할 때, 왕왕 기부자들에게 혁명성공후의 관직을 약속해주기도 했다. 당연히 이들 관직은 혁명이 성공한 후에 절대다수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돈에 관련된 일이면, 분쟁이 없을 수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는 성격의 장태염은 민보의 경비로 인하여 손중산과 틀어지기 되면서 소동을 벌인다. 그 배후는 실제로 동남아 및 중두 동맹회 구성원들의 손중산에 대한 장기간의 불만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금이 지나치게 손중산의 고향인 광동광서일대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것은 지역적인 편중이었다. 그러나, 자금원을 고려하면, 손중산은 아마도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같다. 어쨌든 남양의 화교는 대부분 광동,광서에서 왔기 때문이다. 만일 광동의 한 지역을 점거한다면, 해외의 원조를 획득하기도 용이했다. 손중산이 보기에, 무한과 같이 사방으로 싸워야 하는 지역은 고려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맹회는장태염사건이후, 실제로 부분적인 분열상태가 된다. 일부 전 광복회 구성원들은 동남지역에서 자신들이 따로 놀게 된다. 중부의 전 화흥회 구성원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한다. 당연히 그들은 손중산의 자금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1911(신해년), 혁명당인들은 두번에 걸쳐서 그들의 역사상 최대규모의 의거를 일으킨다. 한번은 4월의 광주의거이고, 다른 한번은 10월의 무창의거이다. 무창의거는 돈이 들지 않은 혁명이다. 의거전에 현지의 혁명당인들은 돈을 모으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결국 얻어낸 것은 동지 유공이 관직을 산다고 가족들을 속여서 얻어낸 5000원이었다. 이 돈으로 상해에서 권총과 총알을 구매하고, 한구의 조계에 거점을 설립한다. 깃발을 사모으고, 의거를 일으킨 후의 도독인감도 판다. 이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의거가 가까워졌을 때 거점이 폭로되고, 총과 깃발과 인감 및 다 쓰지 못한 돈까지 모조리 청나라군대에 빼앗기고 만다. 유일하게 한 역할이라면, 외부에서 사온 약간의 총알이 있을 뿐이다. 이들 총탄은 거점이 폭로되기 전에, 몰래 군대로 가지고 들어갔다. 신군의 총알은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총알은 나중에 의거시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다만, 의거를 일으킨 사람들이 총독부와 다른 거점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와 탄약은 모두 초망대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것이다. 유공의 5000위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역할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무창의거는 가난한 혁명이었다. 돈이 들지 않은 혁명이었다. 무한을 점령한 후에는 청나라지방정부의 창고에서 4천만원의 돈이 있었다.

 

그러나, 4월의 광주의거는 돈을 아주 많이 썼었다. 필요한 자금은 대부분 동남아에서 왔다. 그중 영국령 동인도(지금의 말레이시아)에서 5만을 모금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도 5만을 모금했다; 섬라(미얀마)와 안남(월남)에서는 각각 3만을 모금했다; 나머지 1만은 미국에서 왔다. 이중 무기를 사는데 6,7만을 쓰고, 나머지는 사람을 모집하고, 군대를 매수하는데 썼다. 여기에 각종 비용까지 합하면 예산을 4만이나 초과했다. 앞뒤로 모두 17여만원을 썼다. 이것은 당시로서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신군의1개군 2개사단의 1개월치 비용에 해당한다. 광주의거는 혁명적 각성이 없는 군대를 끌어들였고, 매수했다. 각지의 혁명각오가 되어 있는 선봉을 동원했으며, 모든 사람의 여행비용, 숙박비용도 모두 처리했다. 모든 사람의 장비도 돈을 써서 마련한 것이다. 많이 동원할수록 돈도 더 많이 든다. 사람수에 따라 비용이 드는 것이다. 나중에 혁명당인들의 장부에서는 1인당 몇 명을 동원했고, 얼마의 비용을 지급했는지를 명확하게 적고 있다.

 

그런데, 무창의거에서는 사병들이 거주한 곳은 군영이고, 먹는 것도 군량이었따.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조정에서 준 것이다. 그저 탄알만 없었던 것이다. 외부에서 이것만 조달하면 되었다. 의거까지도 마지막에는 자발적인 것이었다. 지도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우두머리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렇게 돈을 많이 쓴(거의 혁명당인들이 조달한 자금을 모두 쏟아부은) 광주의거는 결국 일패도지한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72구의 시신을 거두어주었지만, 사실 죽은 혁명열사는 72명만이 아니다. 돈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이를 보면, 반란이 성공하느냐 여부는 핵심이 형세에 있다. 돈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형세가 사람보다 중요하다. 만일 황족내각과 조정이 철로광산을 회수하는 동풍이 불어오지 않았다면, 무창의 혁명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창의거이후, 가난한 혁명모델은 복제되기 시작한다. 각지의 의거는 기본적으로 모두 본전을 들이지 않은 장사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풍성한 성과를 거둔다. 청나라의 신정기간동안 모아두었던 돈은 모조리 혁명당인들이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