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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무창의거(武昌起義)의 전과정

by 중은우시 2008. 11. 14.

글: 김만루(金滿樓)

 

1911년 9월 14일, 무창의 초망루(楚望樓) 10호에는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무한의 두 혁명단체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당시 사천보로운동(四川保路運動)이 이미 일어나서, 혁명세력이 전국을 석권하고 있는 상화이어서, 이 양파의 사람들은 여러번 접촉한 후에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하고자 하였다.

 

공진회는 당시 동맹회(同盟會)에서 분화되어 나온 외곽조직이다. 당시 동맹회의 동경본부는 단합되지 않았다. 손중산(孫中山), 황흥(黃興)등은 남양을 기반으로 서남에서 의거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계속 실패했다. 이에 대하여, 장강 중류의 여러 성에서 온 동맹회 회원인 호북의 유공(劉公), 호남의 초달봉(焦達峰), 강서의 등문휘(鄧文)등은 동맹회가 장강유역의 의거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별도로 혁명단체를 하나 조직했다. 이것이 바로 1907년 8월에 일본동경에서 설립된 공진회이다. 공진회는 붉은색의 바탕에 18개의 별을 그린 깃발을 만들고, 스스로 동맹회의 "행동대"로 자처했으며, 장강 중류지역에서 의거를 일으키려고 준비했다.

 

1908년 겨울, 공진회의 회원인 손무(孫武)와 초달봉은 중국으로 차례차례 귀국한다. 그리고 다음해 무한(武漢)과 장사(長沙)에 각각 공진회 호북분회와 호남분회를 만든다. 그들으 적극적으로 무리를 모으고, 혁명역량을 결집했다. 이와 동시에, 강서 공진회도 원래의 반청목적의 작은 단체인 이지사(易知社)를 기초로 등문휘의 주재하여 비밀리에 발전한다.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손무 등은 모임의 기율이 흩어져서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들에 의지해서는 거사를 성공하기 힘들다고 보고, 연락의 중점은 신군(新軍)쪽으로 돌렸다.

 

사실상 당시의 신군중에는 이미 유사한 혁명단체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문학사이다. 문학사는 기실은 문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동맹회가 신군의 사병들 사이에서 발전시킨 하나의 혁명조직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군치학사(群治學社)인데, 나중에 진무학사(振武學社)로 바꾸고, 활동이 발견되어서, 나중에 문학사로 개명하여 다른 사람의 눈을 가렸다. 문학사는 장익무(蔣翊武), 유복기(劉復基)등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호북신군에서 3000여명으로 늘어났고, 공진회보다 배는 더 컸다. 이 두개의 조직은 호북신군의 전체인원중 이미 1/3정도를 거의 점하고 있었다. 혁명의 조건이 아주 유리하게 조성되었다.

 

사천의 국면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청나자조정은 단방(端方)으로 하여금 악군(鄂軍, 호북의 군대)을 이끌고 사천으로 신속히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일부 호북신군은 한양(漢陽), 한구(漢口)와 시외의 다른 현으로 배치하려고 준비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1911년 9월 24일, 공진회와 문학사는 무창의 연지항에서 다시한번 연석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장익무를 군사총지휘관으로 추대하고, 손무를 군무부장으로 삼는다. 10월 6일(음력 추석)에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회의가 끝난 후, "팔월십오일살달자(八月十五日殺子. 8월 15일에 만주족오랑캐를 죽인다)"는 소문이 현지에서 퍼져나갔다. 현지의 어느 지하신문은 심지어 혁명당이 추석에 의거를 일으킨다고 보도하기까지 하였다. 소식이 퍼져나간 후, 호광총독 서징(瑞)은 아주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는 혁명당세력이 이미 신군에 깊이 침투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대이동이라는 명의로 그가 생각하기에 신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을 각지로 나누어 보내어, 혁명당이 군대내에서 연락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특히 추석 며칠 전에, 서징은 더욱 긴장하고 불안해 했다. 그는 특별히 추석 며칠 전에, 지현이상의 문관과 대장이상의 무관을 불러서, 방무회의를 개최했고, 군대는 사전에 추석을 쇠고, 명절에는 계엄상태를 유지하며, 사병은 외출을 금하고, 총탄은 모조리 창고에 넣어두도록 조치했다.

 

음력 8월 대보름 추석날에 계화꽃이 날리고, 밝은 달은 하늘에 걸렸다. 무창성내는 상상한 것처럼 시끄럽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안정되었다. 원래, 호남혁명당의 초달봉이 9월 28일에 전보를 보내어 준비가 부족하므로 의거를 10일 늦추자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여기저기 이동시켜서, 의거군의 지휘계통도 다시 임시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손무등은 의거일을 10월 16일로 늦추었던 것이다.

 

극도로 긴장된 추석명절을 보낸 후, 호광총독 서징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미칠 후 한구의 조계지역에서 폭파사건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즉시 파란이 인다. 원래 10월 9일 오후, 손무등은 조계의 보선리에 폭탄을 설치하는데, 준비작업중에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담뱃불을 떨어뜨려 폭파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안에 불꽃이 일고, 연기가 자욱해졌다. 손무는 그 자리에서 얼굴에 중상을 입어, 바로 병원에 보내진다. 이 와중에 러시아 조계경찰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유동(劉同)등은 체포된다. 그리고 실내에 있던 의거준비를 위한 깃발, 문서와 혁명당인들의 명부등의 중요한 문건이 압수된다. 이후, 러시아조계경찰은 유동과 몰수물품을 청나라측에 넘겨준다.

 

이것은 큰 사건이었다. 서징은 바로 명을 내려, 무한의 전도시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경이 사방으로 배치되며, 명부에 있는 혁명당인을 수색체포한다. 이 위급한 시기에, 악주에 배치되어갔던 장익무는 무창으로 급히 돌아온다. 그리고 유복기, 팽초번(彭楚藩)등을 무창 소조가 85호에 불러 긴급회의를 개최한다. 회의에서 모두 즉시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날 오후, 장익무는 의거명령을 내리고, 그날 밤 12시에 남포포대의 포성을 신호로 성내외에서 동시에 의거를 일으키기로 한다.

 

다만 불행스러웠던 것은, 성내의 계엄이 삼엄하여, 명령은 저기에 남호포대에 전달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밤 12시가 되었고,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는 포성은 울리지 않았다. 모두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군경은 이미 소조가 85호까지 수색하러 왔다. 장익무는 다행이 도망쳤지만, 유복기, 팽초번, 양굉승등 10여명은 붙잡힌다. 이들 혁명당을 붙잡은 후, 서징은 밤새워 심문하였고, 유복기, 팽포번, 양굉승의 세 사람은 새벽에 독서 동원문에서 죽임을 당한다.

 

10월 10일 오전, 군경은 여전히 크고 작은 거리를 사방으로 수색했다. 혁명당인들의 거점은 연이어 발갇되었고, 다시 삼십여명의 혁명당인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이때의 호광총독 서징은 대사건을 해결했고, 국면이 진정되었다고 보아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조정에 공로를 세웠다고 보고했다. "혁명당인들이 독서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서징은 이에 끄덕도 하지 않고, 진중하게 처리했다. 장표, 철충등의 각 관리들도 모두 충성스럽게 일을 했으며, 난을 초기에 제압할 수 있었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서징이 좋아하기는 너무 일렀다. 바로 그날 밤, 성내에 돌연 총소리가 들린다. 원래 고요했던 저녁은 이로써 깨진다. 총소리는 성안의 자양교 남쪽의 공정 제8영에서 났다. 유복기등 지도자들이 피살되었고, 혁명당인들이 연이어 체포된다는 말을 듣고, 제8영의 의거소집인인 웅병곤(熊秉坤)은 마음이 급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더 이상 남호의 포성을 기다리지 않고, 같은 영의 혁명사병을 끌어모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그날 밤에 의거를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혁명당의 지도자들이 없고 지휘계통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하에서, 혁명사병들이 적극적으로 일어섰고, 의거발동의 책임을 부담했다. 그날 저녁 7시쯤 공정영의 배장(排長)인 도계승(陶啓勝)은 군영을 조사하다가 사병 김조룡(金兆龍)이 팔에 백색띠를 두르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발동명령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도배장은 뭔가 나쁜 짓을 꾸민다고 생각하고, 김조룡의 총을 빼앗았다. 김조룡은 그와 싸우면서 "동지들이여! 시작하자" 그리하여 같은 군영의 사병인 정정국(程定國)이 와서 도와준다. 그리하여 총으로 도배장의 허리에 상처를 입힌다.

 

이것이 무창의거의 첫번째 총소리였다. 그리고 신해혁명의 첫번째 총소리이기도 하다. 이 총소리는 대청왕조의 몰락을 선언한 것이었다. 우연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각도에서 본다면, 도배장은 아마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 260여년이나 된 청왕조가 이 자잘한 배장의 우연한 행동으로 인하여 숨을 거두게 될 줄은.

 

도배장이 부장을 입은 후 상처를 끌어안고 도망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총소리가 한번 울리자, 웅병곤등이 바로 달려왔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고, 의거를 선언한다. 그의 소집하에, 혁명사병은 신속히 행동에 들어간다. 독대관 완영발, 우대관 황곤영과 배장 장문란등은 형세가 좋지 않다고 보고, 황망히 나와서 막으려고 했다. 사병들이 소리쳤다: "여러 장교분들, 우리와 함께 혁명합시다. 같이 갑시다. 같이갑시다." 완, 황등은 형세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큰 소리로 소리쳤다. 아쉽게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탄은 이미 그들의 가슴에 박혔다. 그리하여 사병은 군영을 빠져나왔고, 막는 자들은 모두 총을 맞았다.

 

초망대 군계소(軍械所, 무기보관소)에 도착하자, 수십명의 기병(旗兵, 만주팔기병)이 저지했다. 그러나 군계소 내에도 혁명사병이 있었다. 그들은 동정을 듣고, 안에서 호응했다. 총소리가 울리면서 기병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리하여 사병들은 군계소를 열고, 신속히 무기와 탄약을 분배했다. 당시 초망대로 간 혁명사병은 약 400여명이었다. 웅병군은 계급이 너무 낮아서(부반장이었다), 무리를 지휘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그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사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관(연대장에 상당)인 오조린(吳兆麟)을 모셔 임시총지휘관을 맡게 했다. 오조린은 원래 일지회(日知會)의 회원이었다. 일지회가 무너진 후에는 어떤 혁명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는 혁명가였다. 그리고 오조린은 일을 잘 처리했고, 지휘능력이 있었다. 그는 명을 받은 후 한편으로 초망대 일대의 경계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성내외에 보내어 다른 혁명군대와 연락해서 행동을 통일하도록 했다.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형세는 혁명당쪽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도배장이 총을 맞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무창성 바깥의 당각(塘角)에서 돌연 큰 불이 붙었다. 원래, 웅병곤등과 함께, 성밖의 당각을 지키던 혼성협치중영의 사병들도 그날 밤에 의거를 일으키기로 했었던 것이다. 저녁 7시이후, 혁명사병인 이붕승(李鵬升)등이 마초무더기에 불을 붙이고 의거를 선언했다.

 

활활타는 큰 불, 맑은 총소리, 무창을 지키던 신군의 병사들이 즉시 일어섰다. 혁명사병들은 속속 자기의 병영을 뛰어나와 본능적으로 군계소, 포대, 고지로 향했다. 당시 19표(標, 團에 해당), 30표는 가장 먼저 난이 일어난 공정영에서 가장 가까웠다. 혁명사병은 각각 채제민, 팽기린이 이끌고, 직접 초망대로 갔다. 부근의 측회학당의 학생들도 총소리를 듣고 신속히 부대를 정비하여 초망대로 달려갔다. 여기에 좌기영에 주둔하고 있던 제31표와 제41표의 일부 사병도 더해졌다. 초망대는 이미 당시 혁명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성밖의 당각부근에는 큰 불이 일어난 후, 치중영, 공정대와 포대11영의 병사들이 속속 가담했다. 그들은 신속히 봉황산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 사병들이 초망대로 호응을 온다. 동시에 성남쪽의 남포포대의 제8표도 의거를 선언한다. 그들은 공정영의 호응하에 순조롭게 성으로 진입한다. 이어서 초망대오 사산등의 고지에 대포를 배치한다. 남호포대가 의거에 가담한 이후 부근의 제32표와 마대 제8표도 혁명에 가담한다. 그들이 속속 행동에 나서서 초망대, 사산, 봉황산등지에 집결했고,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신군사병의 의거는 손중산과 황흥과 같은 사람들이 조직하여 일으킨 의거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모두 군사전문가들이다. 일단 일어나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당시 계속 의거에 참가한 혁명군은 이미 4천명에 달하였다. 청나라군대의 병력은 5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혁명군은 모두 병력을 집중해 있었고, 혁명군과 대항할 수 있는 부대는 겨우 수위독서 및 그 부근의 제8진사령부의 약 2천의 청나라병사였다. 그리하여, 수에 있어서나 사기에 있어서 혁명군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그날 밤 11시이후, 혁명군은 사산포병의 지원하에 총독관아로 3차에 걸친 맹렬한 포격을 퍼붓는다. 마침내 새벽 2시 제8진사령부를 점거한다. 서징은 형세가 좋지 않다고 보고, 황망히 위대를 이끌고 강 위의 초예(楚豫)함으로 피신했다. 악국제독 겸 제8진통제인 장표도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보고, 할 수 없이 잔여병력을 이끌고 한구의 유가묘로 후퇴했다.

 

새벽 첫 햇살이 옛날에 위무당당하던 총독서의 원문을 비출 때 여기는 이미 혁명사병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스스로 '끄덕없었다'고 말했던 총독대인과 '충성스럽다'고 말했던 통제대인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남은 포정사, 제법사, 무창지부등의 크고 작은 관리들은 모두 아무런 표정없이 그들이 지키던 관청을 떠났다. 아무도 반항이나 순절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청왕조에 있어서는 비애라 아니할 수 없다.

 

그날 오전 11시, 무창성의 사산 꼭대기에는, 붉은 바탕에 18개의 별이 달린 깃발이 내걸리고, 구관청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동시에 신정권의 수립을 선언했다.

 

다만, 당시 의거에 참가한 지도자들은 대부분 피살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고, 혁명에 참가했던 사병들은 명성있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나서서 정부를 조직할 것인가가 가장 긴박한 문제였다. 그들이 먼저 찾은 것은 호북자의국의 의원들이었다. 그리고 의장인 탕화룡(湯化龍)을 군정부도독으로 삼고자 하였다. 탕화룡은 비록 혁명에 찬성하였지만, 스스로 군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용병을 모른다"고 하는 핑계로 맡지 않았다. 모두 생각한 끝에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그 사람은 바로 호북신군에서 통제(사단장)인 장표의 협통(여단장)인 여원홍(黎元洪)이었다. 말하자면 재미있는 일이다. 여원홍은 원래 해군출신이다. 그는 1883년 천진의 북양수사학당을 졸업하고, 1894년 "광갑"호를 타고 청일전쟁에 참전했었다. 배가 부서진 후 여원홍은 겨우 목숨을 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북양해군의 장교는 모조리 쫓겨났다. 여원홍은 그리하여 장지동(張之洞)에게 의탁했고, 포대의 건립과 신군의 훈련에 참가했다. 그리고 3차에 걸쳐 일본에 군사시찰을 갔다. 나중에 육군제21혼성협통령을 맡았다. 여원홍은 원래 구파장교이고, 신군을 편성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여러번 혁명활동을 진압했다. 그리고 일찌기 의거사병을 친히 죽이기도 하였다. 무창의거때, 그는 스스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나중에 막우 유문길의 집에 숨어 있었다.

 

여원홍이 아직 정신도 차리기 전에, 문앞이 돌연 소란스러웠다. 혁명사병들이 몰려온 것이다. 상황이 급하자, 여원홍은 침대밑으로 숨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끌려나왔다. 오조린등이 추대하여, 여원홍은 어쩔 수 없이 자의국으로 간다. 다만 그는 혁명사병이 그에게 군정부도독을 맡으라고 하자, 그는 놀라서 연신 소리쳤다: "나를 해하려고 하지 말라. 나를 해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서 백성들에 대한 공고문에 죽어라 서명을 하지 않으려 했다. 혁명사병 하나가 화가나서, 자기가 붓을 빼앗아 여원홍을 대신하여 그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하여 "여도독"의 이름은 무창성에 퍼지게 된다.

 

12일, 한구와 한양이 광복되고, 무한삼진이 모조리 혁명군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혁명형세가 좋은 상황이 되자 여원홍의 태도는 돌연 180도 바뀐다. 그는 "이제부터 나는 군정부의 한 사람이고, 여러분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의국의 탕화룡등도 유례없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들은 여원홍과 자주 상의하며, 군정부의 조직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17일, "제천대전"에서 선포된 군정부명단에서, 손무가 군무부장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6부는 모두 여원홍의 부하와 탕화룡의 측근들이 맡게 된다. 이들은 혁명사병들의 의거성과를 손쉽게 약탈해가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