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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같은 정치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다.

by 중은우시 2013. 4. 27.

글: 정만군(程萬軍) 

 

송교인암살100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글들이 그를 칭송하고 있다. 또 한번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누구든 좋게 보면 무한히 끌어올리고, '호인'의 과실과 반성은 거의 없다.

 

의문의 여지없이, 신해혁명후 중국제1정당의 실제창시자로서, 송교인은 대단한 인물이다. 잠깐동안에 머물렀던 중국헌정과 의회제에 그는 큰 공헌을 세웠다. 다만 송교인의 공헌이 아무리 크더라도, 주로 승리후의 건설상에 있다. 중국의 운명을 바꾸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 '지필정치가'의 공헌은 혁명을 위하여 생사를 넘나들었던 손중산과 황흥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송교인이 대만국민당사에서 오늘날 대륙학계처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원인이다. 그와 손중산이 의견일치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정치사상과 수단은 모두 "헌정성공후"에 건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공전의 사정은 누가 하는가. 모두가 손중산은 '대포(大砲, 허풍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중산이 없었다면, 청왕조가 무너졌겠는가? 송교인, 장태염 백명이 있고, 글을 만 편을 쓰더라도 만청을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대륙의 기념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송교인같은 정치가는 다시 없을 것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토양문제이지, 재능문제가 아니다. 헌정의 토양이 있다면 송교인과 같은 '문인정치가'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날 것이다. 중국이 언제 '순수문인'이 부족한 적이 있었던가. 희귀한 것은 손중산, 황흥과 같은 '동구우동수(動口又動手)'의 투필종융(投筆從戎)하는 사람이다.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중국의 왕조교체, 전제종식의 유일하고 효과적인 수단은 폭력펵명이었다.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백성들이 온화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고, 중국통치자들은 한번도 양심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계속하여 군대를 통하여 통치를 유지보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폭제폭의 능력이 없이 수재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삼백년이 흘러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로하고 재난이 많은 중화대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칼과 총을 들고 피를 뒤집어쓰며 분전하는 손중산과 황흥같은 사람이었다.

 

만청통치를 뒤집는 피의 길에서, 손중산과 황흥이 피를 뒤집어쓰며 분전할 때, 송교인은 무엇을 하였던가. 주로 후방에서 장태염과 같이, 손중산이 보내온 경비로 신문을 만들었다. 그 어떤 의거도 그가 일으키지 않았다. 심지어 무창의거시 그를 불러 대국을 주재하고자 했디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구관료 여원홍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신해혁명승리후, 그는 손중산보다 한걸음 먼저 나서서, 손중산을 모셔와서 주재하도록 맡기는데 반대했다. 그는 "나는 병력이 있다"고 했다. '과실을 따는 것'으로 인하여 하마터면 혁명진영에 내분이 일어날 뻔했다. 실의했을 때는 퇴락하고, 득의했을 때는 창광했다. 사람들이 송교인을 "영이불웅(英而不雄)"이라고 하는데, 답안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맹회와 국민당가운에 송교인의 지위는 왜 손중산, 황흥의 뒤였을까? 동지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창의거와 손중산은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연가운데 필연이 있다. 손중산이 십여년을 하루같이 무장의거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무창이 스스로 그 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손중산이 세대의 위인이 된 것은 그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완고한 통치자를 대응해야할지 알았기 때문이다. 언어로 새기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새기는 것이 낫다.

 

송교인은 그저 일이 성공한 후의 일만 생각했다. 일을 성공시키는데 아무런 중요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혁명이 일단락된 후, 송교인의 마음은 모조리 '조각'에 가 있었다. 꽃병총리가 되지 않는데 가 있었다. 이 이상은 좋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세력국면에서는 공중누각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송교인에게 "의회미(議會迷)"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신해혁명의 최대승리자는 북양군벌이다. 그들은 정권을 손아귀에 꽉 틀어쥐었다. 많은 사람들은 손중산이 나중에 군대에 의지하여 반원을 추진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북벌군이 없었다면, 중국은 영원히 군정에서 헌정으로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송교인의 비극은 종이에 불과한 승리를 진정한 승리로 여긴 것이다. 입과 혀만으로 군정부의 손에서 정권을 빼앗아 온다고 생각하는 것에 손중산, 황흥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관료, 군벌 원세개가 동의할 것인가. 그래서 죽는 것이 필연이었다.

 

송교인의 부지(不智)는 토비굴 속에 군자게임법칙을 건립할 수 있다고 보았던데 있다. 문제는 군자게임법칙을 세워야 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 어떤 수단으로 진정 이 토비굴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에 있다. 군자가 장악하고 토비가 장악하지 않도록 하는데,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전제자의 양심이 발현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문인들은 근대중국에 무수히 많이 나타났다. 무궁한 환상은 항상 통치자들의 총탄을 머리에 맞고 끝나곤 했다. 자주가 없는 혁명에 진정한 해방이 있을 것인가. 민주역량없이 정권을 탈취하면 진정한 헌정이 올 것인가. 종이와 붓으로 호랑이에게서 가죽을 가져오려면 결국 호랑이의 입에 물려죽는 수밖에 없다.

 

송교인의 암살이 '백년의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 '인조 수수께끼'이다. 송교인을 죽인 동기는 '권력'이라는 두 글자로 충분히 개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원세개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한다. 혁명진영 내부인이 송교인을 암살했다고 하고, 심지어 손중산을 겨냥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소인의 마음이다. 손중산은 원세개와도 다투지 않았는데, 송교인과 다투겠는가? "의회미'가 일인천하에 뜻을 둔 '권력야수'를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 흉수의 기이한 사망, 원세개 내각총관 조병균의 돌연사, 설마 원세개가 송교인을 죽일 동기가 그래도 부족한가. 사람들은 원세개가 송교인을 '조카로 대우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역대중국왕조의 '권력야수'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하여라면 '조카'도 신경쓰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신의 황위를 위협하면 친골육이라 하더라도 손속에 절대 봐주는 것이 없다.

 

송교인이 암살로 사망하기 전에, 유서를 남겨서 원세개에게 "포공도(布公道), 보민권(保民權)"을 당부한다. 이것은 서생이 마지막 순간까지 가진 환상이다. 혹은 집미불오(執迷不悟)이다. 이년후 원세개는 '중화제국황관'을 쓰지 않았던가. 그렇게 다시 한번 황천하의 도원어부에 역습을 가하지 않았던가.

 

객관적으로 말해서, 송교인은 경험도 없고 실력도 없는 아마추어 정치가이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통치자의 양심이 발현되어 주도적으로 정권을 백성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의 유일한 수단은 타협과 선거로 단기간내에 정권을 취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생형정치가의 환상이다. 진정한 정권혁명이 완성되기 전에,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각국정치의 변화를 보면, 먼저 정권의 싸움이다. 중국의 무술변법과 신해혁명은 왜 모두 용두사미가 되었는가? 일본의 명치유신은 한꺼번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원인은 바로 전자는 진정한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했고, 후자는 먼저 무장혁명으로 보수관료정부를 무너뜨리고, 다시 유신역량이 정권을 잡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정치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송교인암살후 손중산이 "이차혁명"을 얘기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유지인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계속 노력해달라"는 요체가 바로 거기에 있다. 송교인은 생전에 손중산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기치를 높이 든 황포학생군, 중화대지의 '후황하강지사'들은 그의 하늘에 있는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