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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십삼릉8

무자비(無字碑): 무측천 이외의 황제들도 있었다. 글: 마랄역사강당(麻辣歷史講堂) 무측천의 무자비는 유명하다. 기실 무측천의 비문은 처음부너 무자비는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이 무자비의 면에는 많은 방격자(方格子)가 있는데, 이들 글자가 없는 빈 격자는 분명히 거기에 글자를 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 2019. 1. 19.
명왕조 4대총비 (3) 정귀비(鄭貴妃): 글: 접련화(蝶戀花) 정귀비는 만귀비와 마찬가지로 총애를 믿고 발호한 총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력제는 9살때 등극했고, 나이어린 만력제를 잘 기르기 위하여 생모인 이태후(李太后)는 건청궁(乾淸宮)으로 거처를 옮겨 아들 만력제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 2018. 10. 1.
명십삼릉의 정릉(定陵): 가장 참혹한 고고학적 비극 글: 이상국(理想國) 지나간 세월에서 고고학은 일찌기 영웅의 사업이었다. 그리고 일찌기 적막한 사업이었다.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휘황한 인생경력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이런 감정은 많은 기적을 만.. 2018. 9. 27.
명십삼릉중 왜 12개는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졌을까? 작자: veryhope 명십삼릉에는 괴이한 현상이 있다. 이는 사릉(思陵)을 제외하고 명십삼릉의 나머지 12개릉은 비록 모두 명나라때 건조되었지만, 모든 릉에는 당시에 문자를 새기지 않은 석비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이를 "무자비"라고 부른다. 이들 석비는 왜 당시에 문자를 새기지 않았을.. 2013. 4. 13.
청동릉(淸東陵)과 청서릉(淸西陵) 글: 왕위(王偉) 명나라때는 명십삼릉을 만들었다. 십여명의 명나라황제의 무덤은 모두 이 곳에 모여있어, 후세인들이 찾아가기가 용이하다. 청나라 입관후 첫번째 황제인 순치제는 하북성 준화에 청동릉을 만든다. 그런데, 순치제의 손자인 옹정제는 다시 하북 역현에 청서릉을 만든다. 조손 두 사람.. 2010. 3. 20.
정릉(定陵): 차마 돌아볼 수 없는 고고발굴의 비애 글: 악남(岳南) 정릉(定陵)의 발굴은 1956년부터 시작한다. 북경시부시장 오함(吳晗)은 주은래 총리에 보고를 해서, 명십삼릉을 발굴하겠다고 하였다. 오함은 유명한 명나라역사학자이다. 문혁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 인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쓴 <<해서파관(海瑞罷.. 2009.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