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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명십삼릉의 정릉(定陵): 가장 참혹한 고고학적 비극

by 중은우시 2018. 9. 27.

글: 이상국(理想國)


지나간 세월에서 고고학은 일찌기 영웅의 사업이었다. 그리고 일찌기 적막한 사업이었다.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휘황한 인생경력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이런 감정은 많은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특별히 유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황릉의 발굴이다.


중국은 유구한 대통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역대이래로 후장의 전통이 있다. 지하에 매장된 재물은 모두 전설의 좋은 재료가 되었다. 이 역사가 유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굴도 역시 계속 흥성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조직적인 국가행위였다. 혹은 군벌의 집단행위였다. 진시황릉이 건립되고 몇년이 지나지 않아, 항우는 삼십만대군을 보내어 묘를 팠다. 물건을 한달동안 옮기고 마지막에는 불질러 버린다. 그리하여 지면건축물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나중에 양치기가 부주의하여 양이 도굴동으로 들어간다. 그가 양을 찾으러 들어갔을 때는 바닥까지도 모조리 불에 탔다. 한나라의 황릉은 동한말기에 기본적으로 모두 도굴되었다. 조조는 일찌기 도굴을 해서 군자금을 마련하도록 명한 바 있다. 오대에는 전쟁이 계속되어 아침저녁이 달랐다. 군벌이 난립하고, 많은 고묘들이 도굴을 당한다. 당말에도 황릉은 모조리 겁난을 당한다. 매번 난세를 맞으면, 전왕조의 죽은 사람은 자신의 시신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원나라이후, 난세의 시간간격이 그다지 길지 않게 된다. 그러나 황릉의 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원나라때는 몽골, 색목인을 고급민족으로 삼았고, 티벳불교의 지위도 높았다. 그래서 한 라마가 강남지구의 종교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질렀는데, 송나라 황릉을 노린다. 몽골인은 강남에서 여러번 좌절을 겪었고, 그래서 이 라마의 행동을 본체만체 했다. 그가 송나라황릉을 모조리 파헤치도록 놔둔다. 원나라의 황제는 총명했다. 사후에 아예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 비밀리에 모처에 묻힌다. 그 후에 기병을 동원해서 땅을 평탄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군대를 동원해서 이를 아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아무도 황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주원장은 평민출신이고, 성격이 포악했다. 그러나 순박한 농민의 기질도 남아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묘는 파지 않았다. 명나라는 전왕조의 고묘를 비교적 잘 보존해 주었다. 단지 만력제가 이상했다. 자신은 삼십년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국가를 위태롭게 만든다. 누르하치가 계속 변경을 침범하는데도 그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는 것을 보고, 분명히 금나라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여, 금나라때의 황제릉이 원래 방산(房山)에 있었고, 보존이 잘 되어 왔는데, 그는 조상묘를 파헤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용맥을 잘라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나라군대를 파견하여 묘를 파헤치고 불을 질러서 며칠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용맥이 끊어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나중에 청군이 들어온 후에 보복을 한다. 그리하여 십삼릉을 불태운다. 어쨌든 청왕조황제는 인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명나라황제릉을 ㅗ굴하지 않는다. 강희, 건륭은 그럴 듯하게 명황제릉을 보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운명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서태후는 시신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손전영이 그녀의 묘를 파헤친다. 서태후의 묘를 파헤치는 김에 건륭제의 묘도 파낸다.


결론적으로, 해방이후, 완벽하게 보존된 황릉은 얼마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하나의 문제였다.


<풍설정릉>이라는 책에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십삼릉중 규모가 두번째로 큰 정릉발굴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희극이 아니라, 가슴아픈 비극이다.


정릉의 발굴은 1956년부터 시작한다.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던 오함(吳唅)은 주은래 총리에게 서신을 서서 명릉을 발굴할 것을 요구한다. 오함은 유명한 명나라역사학자이다. 문혁을 겪은 사람이라면 모두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가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은 최종적으로 문혁의 도화선이 된다. 그 자신은 문혁의 깃발아래 희생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해방이전에, 그는 그의 스승인 호적(胡適)이 대만으로 가지 말고 대륙에 남도록 만류하다가 서로 기분이 상해서 헤어졌다고 한다. 호적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아쉽다. 길을 잘못 들었다. 이 말의 뒤에 숨은 뜻은 바로 오함이 원래 일류학자가 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정치에 발을 담그면서 남의 총부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함은 학자의 열정이 있었다. 그는 청화대학에서 청년시대를 보내며서 명릉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모든 고고학자의 꿈이다. 그러나 당시의 고고학계의 태두인 하내(夏鼐)는 이때 명릉을 발굴하는 것을 극력 반대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당시의 기술수준과 정치풍향으로 보아서 대형 명황릉을 발굴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발굴은 쉬우나, 보호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신중국은 각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고고학도 그 중의 하나였다.


정릉발굴작업이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2년동안, 많은 고고학자들은 자신의 총명과 재지를 발휘하고 분투정신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지궁수도(地宮隧道)를 발견한다. 그리고 금강장(金剛墻)을 열었고, 현궁대문(玄宮大門)을 들어선다. 그리고 만력제의 관과 무수한 진보를 보게 된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이들 희세진보(稀世珍寶), 예를 들어 유일무이한 명나라황가의 직금(織錦)은 탈수보존할 조건이 되지 못했다. 목용(木俑)은 초저온 냉동실에 넣어둘 조건이 되지 못했다. 더욱 큰 상처는 반우파운동이 시작되며 이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하방(下放)당한다. 이미 열어버린 황릉은 그렇게 반년간 방치된다. 대댜수의 포료(布料)와 목료(木料)는 지궁에서 수백년간 항온항습조건이 유지되어 아름다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자연조건하에 내버려지다보니, 신속히 마르고 부패하여 망쳐진다. 정릉박물관은 심지어 비전문가가 권력을 잡고, 만력황제의 금사남목(金絲楠木) 관재(棺材)조차도 야외에 버려둔다. 결국 농민이 잘라서 가구로 만들었다(그래도 땔감으로 쓴 것보다는 낫다)


그후에 문혁이 일어난다. 혁명소장은 정릉을 소탕한다. 만력과 그의 두 황후의 유골을 꺼집어내어 깨끗이 불태워버린다.


이는 세계고고사상 일어난 적이 없는 괴이한 일이다. 정릉고고는 지궁을 여는 날부터, 삽십년이 지나도록 발굴보고서 한장이 나오지 않았다. 한 홍콩의 학자는 이렇게 재촉하며 물었다: "이 불초자손들아, 오천년 찬란한 중화문명과 조상이 남긴 기업이 너희의 손에 망가졌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이들 고고학자를 탓할 것은 아니다. 그들의 비참한 경력은 세계역사상 어느 국가의 고고학자들도 겪지 않았던 일이다.


그저 권력자들을 탓해야 한다. 그들은 모종의 허영과 업적때문에, 고고학의 규율과 현실조건을 무시하고,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황릉을 발굴했다. 그리하여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끼쳤다. 그들은 역사의 치욕이다.


예를 들어 오함. 원래 그는 중국지식인의 동량으로 여겨졌었다. 많은 책을 읽어본 후에, 비로소 호적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확실히 길을 잘못 들었다. 그의 학자로서의 열정과 정치인으로서의 열정이 합쳐지자, 이상은 변색된다. 비록 그 자신도 최후에 희생자가 되었지만, 확실히 정릉고고에 있어서, 그는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부정확한 시간에 그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만일 그가 정치풍운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고 한다면, 정릉에 대하여 그는 그저 과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65년, 그가 이미 정릉의 겁난을 친히 목격하고도 여전히 주은래 총리에게 다른 명릉을 발굴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고의범이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운이 좋았던 것이라면, 주은래가 이렇게 그에게 회답한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에게 흥미가 없다." 주은래 총리의 안목이 그보다 훨씬 나았다. 이 말의 속에서 나는 견책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정릉고고이후, 각지에서 속속 현지의 능묘를 발굴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모조리 하내와 주은래 총리에 의하여 거부된다. 이것은 고고학의 큰 행운이다.


그러나, 과거 수십년동안, 많은 불행이 더 있었다. 중대한 고고학적 성과의 배후에는 모두 후인들이 이를 갈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주(隨州)의 증후을묘(曾侯乙墓)에서 출토된 편종과 청동기구는 모두 국보이다. 다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당시 수묘에서 출토된 것은 청동기구이외에 무수한 굵은 전국시대의 목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노천에 방치되어 썩어버린다. 무엇이 고고학인가? 고고는 도굴이 아니다. 그저 금은옥기서화만 가져가고, 그 안의 묘장구조나 기타 돈되지 않는 물건들은 신경쓰지 않는단 말인가. 왕왕 이들 보잘 것없는 것들이 더욱 중요한 연구가치를 지닐 때가 있다. 그리고 마왕퇴 한묘를 만일 30년이후에 발굴했더라면, 아마도 우리가 얻은 수확은 30년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여추우(余秋雨)는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는다. 그러나 그의 한 마디는 찬동한다. 이 한 마디 말로 여추우는 문단에서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황의 장경동은 스타인이 수단을 써서 다 긁어갔다.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나쁜 일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는 현재 대영박물관에의 항온창고 속에서 그 진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가져가지 않은 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사회주의릐 풀(草)을 원하지, 자본주의의 싹(苗)을 원하지 않는담고 한다. 그 결과는 배를 쫄쫄 골아서 등에 붙는 것일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본주의가 똥오줌을 무슨 보물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송경령이 정릉을 참관했을 때, 박물관의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것은 중국인민의 유산이라고. 송경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중국인민의 문화유산만이 아니라, 전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괜히 일을 벌여서 후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는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