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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십삼릉중 왜 12개는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졌을까?

by 중은우시 2013. 4. 13.

작자: veryhope 

 

명십삼릉에는 괴이한 현상이 있다. 이는 사릉(思陵)을 제외하고 명십삼릉의 나머지 12개릉은 비록 모두 명나라때 건조되었지만, 모든 릉에는 당시에 문자를 새기지 않은 석비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이를 "무자비"라고 부른다.

 

이들 석비는 왜 당시에 문자를 새기지 않았을까? 역사문헌에는 그 원인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청나라때 건륭제는 이 일이 이상하다고 여긴다. 그가 직접 쓴 <애명릉십삼운>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 여러 릉중 장릉(長陵)에 성덕신공비문(聖德神功碑文)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에 문자가 없다. 여러 글을 살펴보니 오로지 서건학의 <독례통고>에 당나라 건릉에 큰 비가 있는데 글자가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명나라의 여러 릉도 이를 본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기실, 건륭제는 주의하지 못했다. 13릉중 헌, 경, 유, 무, 태, 강, 영, 소, 정, 경, 덕의 11릉에 글자가 없는 신공성덕비가 있고, 장릉의 원내의 한 성적비에도 글자가 없다. 그리고, 각릉의 무자비의 형성원인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각 릉의 무자비가 형성된 것은 원인이 서로 다르다.

 

헌, 경, 유, 무, 태, 강의 육릉의 능앞에는 원래 신공성덕비와 비정(碑亭)이 없었다. 장릉의 제일진원내에도 성적비와 비정이 없었다. 가정16년(1537년) 칠월, 명세종은 대학사 하언(夏言)에게 말한다: "전에 능원공사에 관하여 경에게 말한 바 있는데, 오로지 장릉에 공덕비가 있을 뿐, 다른 육릉에는 없다. 그래서 성덕을 드러낼 수가 없다. 이제 추가로 세우는 것이 적절하니 이를 집행하라." 다만, 육릉에 신공성덕비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명세종이 완전히 그와 같이 흥왕의 세자이고 방계출신인 제왕의 조상에 대한 존경과 효성을 드러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다시 명을 내려 장릉의 능궁내에도 명성조를 위하여 성적비정과 석비를 세우게 했다. 비를 세우는 목적은 자연히 공덕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공덕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히 공덕의 진술문자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가정21년(1542년) 오월, 육릉비정과 장릉의 비정이 막 완성되자, 예부상서 엄숭이 상소를 올려 말한다: "성조문황제 성덕신공비문 및 인종 소황제의 어찬을 살펴보니, 오늘 잘을등 능의 비문은 엎드려 청하건데 황상이 친히 글을 쓰셔서, 돌에 새겨 열성의 공덕을 기술해서 만대에 전해지게 해야 합니다." 엄숭의 요청은 명나라 제왕릉비문작성원칙에 맞는다. 왜냐하면 일찌기 주원장이 황릉비비문을 쓸 대,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황릉의 비의 글은 모두 유신들이 분식한 글이다. 이것은 후세자손들에게 경계로 삼게하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홍무2년(1369년) 한림학사 위소(危素)가 쓴 황릉비문을 버리고, 홍우11년(1378년) 사월 "친히 글을 써서, 강음후 오량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여 이를 새기게 했다." 그후 여러 황제들은 이를 제도로 삼아서, 명성조 주체가 효릉의 신공성덕비문을 작성했고, 명인종 주고치가 장릉 신공성덕비문을 썼다. 제릉의 공덕비는 후계황제의 붓으로 쓰는 것이 명나라 후세 황제가 준수할 법칙이다. 이 원인에 기하여, 명세종은 흥헌왕묘를 현릉(顯陵)으로 승격시키고, 현릉의 능앞에 예공성덕비정을 건조한다. 그 예공성덕비의 비문은 바로 명세종이 친히 쓴 것이다. 명세종은 부친의 능에 예공성덕비문을 썼다. 그러나 새로 지은 장, 헌, 경, 유, 무, 태, 강의 칠릉비문은 자연히 명세종이 써야 했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비문에 대하여 그후에는 말이 없다고 한다. 각 비는 모두 "무자비"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추측했다. 명세종이 비석에 글자가 없는 것은 조상의 공덕이 무량하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명세종은 도교를 미신하고, 노장지학의 "무위이치(無爲而治)"는 명세종이 무자비가 유자비와 비교하여 등급이 한단계 더 높고 더 위대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런 추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세종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현릉의 앞에는 무자비를 세우지 않았을까? 그리고 하필 고생을 해서 비문을 적었을까, 그렇게 하여 부친의 능의 석비를 오히려 한등급 낮게 하였을까?

 

그렇다면, 명세종은 원래 칠릉에 각각 무자릉, 무자비를 수립하려 한 것일까? 그저 "공덕을 드러내려는" 상징적인 의미일가? 기실, 이런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랬다면 엄숭은 명세종에게 칠릉의 비문을 써달라고 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덕을 드러내는" 방식은 만일 장릉 이외의 다른 육릉에게는 겨우 들어맞을 수 있다. 그러나, 장릉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장릉은 일찌감치 신공성덕비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에는 글자도 있다. 확실히 칠릉비가 문자가 없는 결과는 명세종이 비석을 세운 원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해석은 바로 명세종이 비를 세운 본뜻은 글자를 새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비문을 쓰는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부득이 붓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명세종에 있어서 칠응의 열성비문을 쓰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첫째, 명인종이 쓴 장릉의 신공성덕비문은 일찌감치 장릉신도의 신공성덕비에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글은 3000여자에 이른다. 명성조 일생의 '공덕"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숭상했다. 명세종이 글을 쓰는 수준에서 인종의 비문을 넘어서기는 실제로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새로 비를 세우는 것은 문자, 뜻에서 모두 새로운 창의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인들이 그 비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명세종이 칠릉비문을 쓰면서 또 다른 난제를 만난다. 바로 명세종이 헌, 경, 유, 무등 릉의 묘주인의 상황에 대하여 생동적이고 느낌이 있는 자료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비록 궁중에 여러 황제의 <실록>이 있지만, 그리고 상소올린 자료가 있지만, 산처럼 쌓여있는 자료를 살펴보려면 일국지존인 황제로서 어찌 그런 시간을 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실록>은 유신이 편찬한다. 어제비문이 유신이 쓴 글을 근거로 한다면 이는 "후세자손에게 경계가 되는데 부족하다"는 주원장의 뜻에 어긋난다. 하물며 여러 황제는 정치적 업적이 서로 다르다. 인종, 선종은 정치적 업적이 분명하다. 그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영종은 먼저 환관을 총애하고 토목보의 변을 불러왔으며 와랄부에 포로로 잡혀 체면을 모조리 잃었다. 나중에는 형제반목으로 원수지간이 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런 황제를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은 진정한 '공덕'을 드러내기 어려울 뿐아니라, 문자에서 약간 솜씨를 발휘해야 한다. '윗사람을 위하여 감출 것은 피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명세종이 비문을 쓰는데 또 하나의 난제였다.

 

그래서 칠릉의 비문을 명세종은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다. 확실히 그는 부득이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칠릉의 석비에 모두 글자가 없으므로, 나중의 영, 소, 정, 경, 덕의 오릉도 모두 그대로 따랐다. 모두 능앞에 글자가 없는 성덕비와 비정을 세웠다. 그리하여 명십삼릉중 십이릉에 모두 '무자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