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위(王偉)
명나라때는 명십삼릉을 만들었다. 십여명의 명나라황제의 무덤은 모두 이 곳에 모여있어, 후세인들이 찾아가기가 용이하다. 청나라 입관후 첫번째 황제인 순치제는 하북성 준화에 청동릉을 만든다. 그런데, 순치제의 손자인 옹정제는 다시 하북 역현에 청서릉을 만든다. 조손 두 사람이 두 곳에 황제능원을 만들어 서로 분정항례(分庭抗禮)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후세의 황제들은 할 수 없이 동쪽에 한 명, 서쪽에 한 명 묻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매장의 순서는 일치하지 않아서 후세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동릉에 안장된 황제는 효릉-순치제, 경릉-강희제, 유릉-건륭제, 정릉-함풍제, 혜릉-동치제. 전체 능원내에 황제릉이 5개, 후릉이 4개, 비원침이 5개, 공주릉이 1개이다 서태후도 이 곳에 묻혀 있다. 모두 15개의 능묘군이 있다.
서릉에 안장된 황제는 태릉-옹정제, 창릉-가경제, 모릉-도광제, 숭릉-광서제. 전체 능원에는 황제릉이 4개, 후릉이 3개, 왕공,공주,비자원릉이 7개, 모두 14개의 능묘군이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청릉은 동릉이 먼저 생겼다. 청나라에서 북경에 들어온 첫번째 황제인 순치제가 안장되어 있다. 옹정제에 이르러 서릉이 만들어진다.
청동릉은 하북의 준화현 경내에 있다. 동릉의 부지는 순치제가 고른 것이다. 서가의 <<청패류사. 방기류>>의 기재에 따르면; "순치제는 자주 준화에 사냥을 나갔다. 나중에 효릉이 된 부지를 보고는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어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곳은 짐의 수궁(壽宮)으로 할만하다' 그리고 스스로 패개(佩玠, 즉 반지)를 땅에 던지며, '개가 떨어진 곳을 혈(穴)로 정하고, 즉시 공사를 시작하라.' 나중에 풍수선생이 와서 보더니 좋은 곳이라며 깜짝 놀랐다."
청나라는 동릉에 모두 217개의 궁전패루(宮殿牌樓)를 건설했고, 크고 작은 15개의 능묘군을 만든다. 모든 능묘는 순치제를 중심으로 배열되었다. 각 능묘는 모두 궁장, 융은문, 배전, 방성명루 및 보정등 건축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방성명루는 각 능묘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안에는 석비가 세워져 있고, 석비에는 만주어, 한어, 몽골어의 3종문자로 묘주인의 시호를 새겼다. 명루의 뒷면은 '보정'이다. '보정'의 아래에는 영구를 놓는 '지궁'이다. 능구역의 가장 남쪽끝에는 석패방이 있고, 정북으로는 효릉의 '보정'을 향한다. 여기에 6킬로미터 길이의 신도가 있다. 그 신도에는 대홍문, 대패루, 석상생, 용봉문, 칠공교, 소패루, 융은문, 융은전, 방성명루등 건축물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다. 서열과 순서가 분명하다.
동릉의 황실능원에 나중의 황실후손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두번째 황실능원이 나타났을까? 옹정은 두번째 능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그의 조부인 순치제, 부친인 강희제를 따라서 동릉에 묻히고자 하지 않았다. 스스로 풍수길지를 선택해서 서릉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에는 동서로 양립되는 국면이 나타난다.
어떤 자료를 보면, 옹정제가 즉위한 후, 능의 부지로 원래 청동릉 구봉조양산의 위로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능의 설계도를 본 후에, '규모는 비록 크지만, 형국이 완전하지 못하다. 혈(穴)의 흙에 진흙이 묻어나오니, 쓸 수가 없다'라고 하며 불만스러워했다. 그리하여 원래 선정했던 부지를 포기하고, 또 다시 '만년길지'를 찾기 시작한다. 능의 부지를 찾던 자가 이렇게 주청했다: 하북의 역현에 있는 영녕사의 아래가 '건곤취수(乾坤聚秀)의 곳이고, 음양회합(陰陽匯合)의 장소입니다. 용혈에 모래흙이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고, 형세와 기운오 모두 길합니다" 그러자 옹정은 아주 만족하며, 이곳은 산맥과 수법이 조리가 분명하니 아주 길한 땅이다라고 하며 이곳에 서릉을 짓기 시작한다.
옹정8년(1730년)부터 청서릉의 태릉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건륭2년에 완공되는데 모두 7년이 걸렸다. 태릉은 서릉에서 규모가 가장 큰 능침이다. 1915년 광서제의 숭릉이 완공되느데 186년동안 황제릉 4곳, 황후릉 3곳, 왕공,공주,비빈원침 7곳이 있다. 옹정, 가경, 도광, 광서의 4명의 황제와 9명의 황후, 56명의 비빈 및 왕공, 공주등 모두 80명이 묻혀 있다. 부의도 죽은 후에 청서릉에 묻혔다.
옹정은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묻힌다는 습속을 어겼다. 이는 스스로를 만족시켰지만, 그의 후계자인 건륭에게는 골치거리를 남겼다. 만일 아들은 아버지를 따른다는 습속대로라면 자신은 청서릉에 묻혀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자신의 부친인 옹정이 법도를 어겼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만일 그가 동릉에 묻힌다면, 그의 자손들은 그를 따라서 계속 동릉에 묻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옹정은 혼자서 서릉에 묻혀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서릉이 너무 외로워져서 황실의 위엄과 조화에도 맞지 않는다. 건륭은 양쪽을 모두 고려하여 스스로 생각하기에 완벽한 결정을 내놓는다. 그는 후손들에게 명을 내린다: 앞으로 길지는 순서에 따라 동서로 나누어 건설한다" 그 자신은 동릉에 묻히지만, 그의 아들은 서릉에 묻히고, 이렇게 대를 이어내려가면서 안장한다. 손자는 다시 동릉에 묻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의 각 황제는 죽은 후에 동릉과 서릉으로 나뉘어 묻혔다.
실제로 건륭이후의 황제들이 능을 선정할 때 모두 이 조훈을 따른 것은 아니다.
청나라의 제8대황제인 동치제 재순은 동치13년 십이월초오일(1875년 1월)에 병사한다. 그의 안장지도 그의 후계자들에게 골치거리가 된다.
1869년에 중국으로 와서 중국에 16년간 머문 미국의 선교사이자 외교관인 Chester Holcombe(何天爵, 1844-1912)은 그가 쓴 <<중국인본색>>이라는 글에서 동치황제가 죽은 후에 안장되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동치제는 1875년 1월에 서거한다. 그러나 다음해 10월이 되어서야 안장된다. 원인은 그의 시신이 좋은 명당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풍제가 동릉에 묻혔으므로, 조훈에 따르면, 동치제는 서릉에 안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풍수대가가 그의 점복에 따르면 그것에 안장했을 때 나라에 불리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곳에 안장해야한다고 하였다. 수개월동안의 조사를 거치고, 신황제의 의견을 들어, 9개월의 노력을 통해, 마침내 서릉에 안장할 수 없다고 결정한다. 다만 예방과 조화를 취하기 위하여 동릉의 지하에 매장한다. 이렇게 하여 젊어서 요절하고, 아무런 업적도 없고, 타락한 생활을 한 사람의 시신을 위하여 엄청난 돈을 들이게 된다."
동치제의 매장에 관해서 이 미국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만일 서태후의 매장과정을 보았다면 더더욱 고개를 흔들면서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그의 장례는 아주 호화로워서 청왕조의 여러 황제의 규격이상이었다. 광서34년(1908년), 서태후의 영구는 북경에서 제사를 마친 후, 동릉에 안장하러 떠난다. 북경에서 동릉으로 가는 전체 과정에서, 10만의 인력이 동원되고, 많은 관리들이 뒤따른다. 영구가 약간의 규모가 있는 부,현에 도착하면, 멈춰서서 법사를 행했다. 이렇게 가면서 서고 다시 가기를 반복하여 100킬로미터의 길이를 1년여동안이나 갔다. 그리하여 다음해 10월 초하루에 영구는 비로소 동릉의 지하궁전으로 들어가서 자리잡는다. 이는 고금에 없는 일일 것이다.
모든 왕조가 흥하는 원인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쇠락하고 망하는 원인은 같다. 한 왕조의 부패와 타락은 많은 곳에서 드러난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풍수명당을 찾았고, 강산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안위하고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청왕조의 말기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만주귀족집단의 부패와 무능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국가가 이미 빈껍데기가 되었고, 사방에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건물은 이미 기울었는데, 기둥 하나로는 버틸 수가 없는 법이다. 뭐 하나라도 청왕조의 마지막 목숨을 짓누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탄식이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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