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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무자비(無字碑): 무측천 이외의 황제들도 있었다.

by 중은우시 2019. 1. 19.

글: 마랄역사강당(麻辣歷史講堂)





무측천의 무자비는 유명하다. 기실 무측천의 비문은 처음부너 무자비는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이 무자비의 면에는 많은 방격자(方格子)가 있는데, 이들 글자가 없는 빈 격자는 분명히 거기에 글자를 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텅빈 무자비만 남겨놓게 되었다. 이 무자비에는 개략 3,300여개의 격자가 있다. 이를 보면 비문까지 이미 준비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측천의 비문에 글자가 없는 것은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바로 이현이 즉위한 후 그녀를 어떻게 호칭해야할 지를 몰랐다. 선황(先皇) 아니면 태후(太后), 그리고 당시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었다. 이런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비워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자비는 무측천의 것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당중종 이현(李顯)의 정릉(定陵)에도 무자비가 있다. 무측천이 더 유명하기 때문에, 무측천의 무자비가 더 유명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이현의 무자비는 1960년대에 파괴된다. 정릉의 이 무자비는 지금 그저 돌덩어리만 남아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제릉에서도 무자비는 발견된다. 모든 명나라제왕의 능묘에는 무자비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명인종 주고치부터 명희종 주유교까지의 능묘앞에는 모두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비어 있다. 실제로 능묘를 만들 때는 이렇지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가정제가 세운 것이다.


가정제는 자신의 능묘를 만들 때, 자신의 석비를 세우고자 했다. 목적은 바로 자신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을 쓰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의 조상, 몇대 황제들은 모두 석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가 혼자서 이렇게 석비를 세우게 되면, 그것은 조상에 대한 불경이 될 터였다. 왜냐하면 후대의 능침은 자신의 조상보다 잘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석비를 세우기 위하여, 가정제는 앞의 몇몇 황제릉에도 모두 비정(碑亭)을 세우고, 그 안에 석비를 놓았다. 그러나 선황에게 비문을 쓰는 것은 잘못하면 구족을 멸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로서는 단지 가정제 한 사람만이 쓸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가정제는 아주 바빴다. 매일 도를 수련하느라 바빴다. 장생불사를 추구하기 위하여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는데, 비문을 쓸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황제가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감히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가정제가 죽을 때까지, 그는 쓸 시간을 내지 못했고, 여기에 있는 8개의 석비에는 모두 비문이 없게 되었다. 이전의 황제들도 쓰지 않았으니, 가정제 자신의 석비에도 당연히 비문이 없다.


그래서 명나라 13명의 황제 중에서 11명의 황제릉 앞에는 모두 무자비가 하나씩 서 있다. 그래서 무자비는 무측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