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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왕조 4대총비 (3) 정귀비(鄭貴妃):

by 중은우시 2018. 10. 1.

글: 접련화(蝶戀花)


정귀비는 만귀비와 마찬가지로 총애를 믿고 발호한 총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력제는 9살때 등극했고, 나이어린 만력제를 잘 기르기 위하여 생모인 이태후(李太后)는 건청궁(乾淸宮)으로 거처를 옮겨 아들 만력제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만력제는 조회에 나가거나 공부하는 외의 나머지 시간은 모두 이태후의 엄격한 감독하에서 생활하고 공부했다. 만력제의 결혼이후 비로소 이태후는 자신의 자녕궁(慈寧宮)으로 옮겨갔다. 이로써 만력제에 대한 밤낮없는 감시는 끝이 난다. 그리고 이태후는 만력제가 결혼하기 전에 30살이하의 궁녀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13살의 왕희저(王喜姐)는 만력제의 결발처자(結髮妻子)일 뿐아니라, 만력제가 접촉한 첫번째 젊은 여자였다. 1후2비(一后二妃)중의 양의비(楊宜妃)와 유소비(劉昭妃)는 왕희저와 비교했을 때 전혀 뛰어난 점이 없었다. 용모도 뛰어나지 않을 뿐아니라, 나이도 왕희저보다 많았다. 특히 유소비는 8살이나 더 많았다. 이태후가 고심하여 만들어놓은 환경하에서 왕희저는 아무런 방해없이 만력제의 첫사랑이 된다.


만력제는 한 마음으로 어린 황후 왕희저를 총애한다. 그러나, 3,4년이 지나서 양의비가 병사했고, 유소비는 전혀 총애를 받지 못하고, 총애를 독점한 왕희저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태후는 자신이 고른 황후 왕희저를 아주 아꼈다. 그러나 그녀는 명효종의 역사가 아들에게 재연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왕희저가 총애를 독점하는 것은 자손을 번성시키는데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력제를 위하여 더 많은 미녀를 뽑아주기로 결정한다. 이 때, 마침내 왕황후가 회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정내외는 기뻐서 날뛰첬다. 장거정은 황자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까지도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태후는 왕희저의 배를 믿지 않았고, 이때 장거정에게 만력제를 위하여 후궁을 뽑으라고 요구한다.


장거정도 기실 왕희저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왕희저는 명효종의 장황후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계속 자신의 가족에게 봉작과 재물을 달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총애를 독점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리하여 장거정은 이태후에게 가정제가 구빈(九嬪)을 뽑은 선례를 따라 입궁한 여자를 모두 정식 빈으로 책봉하자고 건의한다. 이렇게 해야 백성들이 기꺼이 딸을 후보자로 내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건의는 이치에 맞았다. 예를 들어 나중에 모빙자귀(母憑子貴, 어미는 아들이 귀해지면 같이 귀해진다)의 왕공비(王恭妃)는 원래 육품 관리집안의 딸이었다. 1후2비에 들어가지 못해서 궁중의 하천한 궁녀가 되고, 만력제로부터 평생 멸시당한다. 이렇게 된다면 아무도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뽑힌 후비의 수준도 높을 리가 없다. 이태후는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장거정은 더더욱 왕희저의 미움을 산다.


만력10년 삼월, 새로 뽑힌 9명의 미녀가 구빈으로 봉해진다: 각각 주단빈(周端嬪), 정숙빈(鄭淑嬪), 왕안빈(王安嬪), 소경빈(邵敬嬪), 이덕빈(李德嬪), 양화빈(梁和嬪), 이영빈(李榮嬪), 장순빈(張順嬪), 위신빈(魏愼嬪). 그중 서열 2위의 숙빈이 바로 나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정귀비이다. 정귀비가 입궁할 때 17살이다. 13살에 입궁한 왕희저 및 왕공비와 기실 같은 나이이다. 1년반이후, 만력11년 팔월, 정숙빈은 회임을 한 후 덕비(德妃)에 봉해진다. 만력14년 삼월, 황삼자(皇三子) 주상순(朱常洵)을 낳고 2달만에정덕비는 황귀비(皇貴妃)에 봉해진다. 이것은 황귀비라는 칭호가 명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사례이다.


정귀비가 총애를 받기는 했으나, 그녀가 받은 총애의 정도는 국본지쟁(國本之爭)의 필요에 따라 동림당에 의하여 과장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사람들은 정귀비가 만력제의 총애를 독점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기실 그녀는 만력제의 마음 속에서 차지한 위치가 황후 왕희저에 훨씬 못미쳤다. 그리고, 만력제가 총애한 비는 정귀비 한 명만이 아니었다. 그외에 황귀비 이씨도 있다. 즉, 이경빈이다. 그녀는 남명왕조 영력제의 조모이다. 이경비는 입궁이 늦었고, 만력22년 십일월 무인일에 경비(敬妃)로 책봉되었으며, 총애를 많이 받았다. 만력25년 삼월 십일 황칠자(皇七子)를 낳은 후, 같은 해 이십일일 정귀비 수하의 태감 장명(張明)이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사망한다. <작중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비 이씨는 나중에 황귀비에 봉해진다. 황육자 즉 혜왕을 낳았고, 황칠자 즉 계왕을 낳았다... 이귀비는 병이 있었는데, 정귀비 수하인 태감 장명이 치료를 잘하지 못하여 사망한다. 명신종은 극히 비통해 하며 장례를 후하게 치뤄주었다.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은 왕황후에게 보내어졌고, 왕황후가 양모가 되어 함복궁에서 자란다. 그 당시에 순우연의 일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때부터 정귀비는 총애를 다툴 사람이 없어진다." 순우연(淳于衍)은 서한(西漢)시기의 여의(女醫)이다. 권신 곽광의 처로부터 사주를 받고 한선제의 황후 허광평이 자식을 낳다가 병이 든 것을 기화로 약에 손을 써서 허황후를 해쳐서 죽인다. 궁안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정귀비는 총애를 다투기 위하여 음모를 꾸며서 수하 태감 장명으로 하여금 허약한 이경비를 죽게 만들었다고. 나중에 주황후가 약으로 전수영(田秀英) 모자를 죽인 것도 아마도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경비는 공순영장단청황귀비로 추봉되고, 그녀가 낳은 황육자 주상윤(朱常潤)과 황칠자 주상영(朱常瀛)은 모두 왕황후의 보살핌으로 순조롭게 자라서 성인이 된다.


만력제는 이경비의 죽음을 극히 애통해 했다. 그래서 법도를 어겨가며 이경비를 자신의 정릉지궁의 우혈(右穴)에 매장하여 자신과 합장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황후만이 누릴 수 있는 대우이다. 이를 보면 만력제가 이경비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명헌종과 만귀비와 마찬가지로, 이 합장하라는 명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법도에 어긋난다는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현되지 못하게 된다.


정귀비는 놀라운 미모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왕황후보다 어리지도 않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녀가 만력제이 총애를 얻게 되었을까? 만력18년 정월 갑신 삭 입춘때 만력제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짐이 호색하고 귀비 정씨만 총애한다고 하는데, 짐은 그저 정씨가 부지런하기 때문에 짐이 궁을 갈 때마다 그녀를 반드시 따라오게 하고, 아침 저녁으로 모시게 하는 것이다." 만력제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는 정귀비만을 총애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정귀비를 곁에 두는 것은 정귀비가 자신을 잘 모시기 때문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정귀비가 그를 잘 모신다는 이 이유는 정말일까? 이미 죽은 장거정을 철저히 청산한 후, 만력제는 2년간 정무를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만력14년이후, 겨우 23살의 젊은 만력제는 조회에 나오지 않기 시작한다. 만력16년이후, 상조(常朝)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만력17년이후 원단(元旦)에도 일식을 이유로 원단조하를 받지 ㅇ낳고, 그후 매년 원단에도 신하들을 만나지 않는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설마 국본지쟁으로 만력제가 조정에 흥미를 일어서 정무를 태만히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조회에 나가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력제의 수보 신시행(申時行)의 조대록(詔對錄)>에는 만력제가 자주 그들에게 자신이 조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적었다: "요통때문에 서있기가 힘들다; 발바닥의 통증이 심해서 걷는 것이 어렵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서 모친 이태후에게 문안을 올릴 때도 무릎걸음으로 나갔다. 만력제의 유조에서도 이렇게 적었다: "여러 해동안 병을 앓아서 종묘제사도 직접 나가지 못하고, 조회에도 직접 나가서 말하지 못했다." 정릉의 발굴에서도 이 점은 확인되었다. 그의 유골은 등이 약간 굽어 있고,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확실히 왼쪽다리보다 짧았다. 이는 만력제 생전에 심각한 족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만력제는 여러 치과질병도 있었고, 하악골의 발육이 불량했다. 얼굴에 함몰된 부분이 좌우양쪽이 대칭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걷는 것이 힘들었을 뿐아니라, 병으로 인한 통증도 심했었다.


이런 것을을 알고 나면, 우리는 만력제가 왜 정귀비가 자신을 아침저녁으로 잘 보살펴준다고 강조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결발처자인 황후 왕희저이다. 그러나 왕희저는 성격이 불같았다. 그녀가 냉궁에 쳐넣은 환관만 백명이 넘는다는 기록만 보아도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히 인내심을 가지고 만력제라는 병자를 돌봐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귀비는 환자를 잘 보살펴주었다. 통증에 시달리는 만력제를 편안하게 모신 것이다. 그래서 만력제는 정귀비를 곁에 두기를 좋아한다. 결국 정귀비는 만력제의 마음 속에 소첩 겸 간호사일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귀비를 싫어하던 왕희저도 정귀비를 못살게 굴지 않았다. "정귀비가 총애를 받았지만, 황후는 이를 따지지 않았다." 매일 만력제를 돌보는 정귀비는 그저 일잘하는 간호사일 뿐이다.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뿐아니라, 자신이 병자를 돌보는 힘든 일을 면하게 해준다. 총명한 왕희저가 왜 그녀를 못살게 굴겠는가.


만력제의 황후 왕희저는 만력년간에 성공을 거둔 황종희(黃宗羲)의 집안과 연원이 있다. 황종희가 쓴 <남뢰문정>에는 이런 말이 있다: "왕희저는 그와 같은 집안이다. 조상은 원래 절강의 여요(餘姚) 황씨(黃氏)이다. 명나라초기에 군대에 들어가지 않기 위하여 성을 왕씨로 바꾼다." 조정신하들이 올리고, 만력제 본인도 인정한 왕희저의 시문(諡文)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황후 왕희저는 황제에 대한 영향이 아주 컸다. 여러번 만력제에게 직언하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권했고, 만력제가 대신들의 말을 듣도록 마음을 고쳐먹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들 직언하는 신하에 장거정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소위 '충직'한 신하들에 대하여 왕황후는 잘 보살펴 주었고, 이런 '충직'한 신하들도 왕황후를 극력 보호해준다.


어려서부터 모친 이태후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은 만력제는 강상윤기(綱常倫紀)와 명성, 이미지를 중시했던 사람이다. 명나라후기에는 만력제부터 황제들이 모두 그러했다. 조강지처인 황후에 대하여도 지극히 예를 다했다. 황후 왕희저는 성격이 불같아서 만력제가 그녀를 더 이상 총애하지 않았고, 여러번 참기 힘든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가끔 '간례(簡禮)', 즉 황후에 대하여 예를 다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왕덕완(王德完)등 동림당의 신하들이 황제가 첩을 총애하여 처를 멀리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곤 했다. 그리하여 만력제가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었다. 그후로 황후와 싸우지 않게 된다. 왕희저에 대하여 더욱 참고 예를 다한다.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살펴보기로 하자. 동림당이 만력제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황후 왕희저와 만력제의 총애를 독점하였다고 주장하는 정귀비가 실제 받은 대우를 보면, 왕희저와 만력제는 "아침, 저녁으로 같은 궁에서 있으면서, 사랑이 아주 깊었다." "왕희저가 놀러가거나 연회를 베풀면 만력제가 반드시 따라갔다." 두 사람은 같이 먹고 같이 잤으며 떨ㄹ어지지 않았다. 만력제는 더더구나 여러번 왕희저를 위하여 파격적으로 그녀의 가족에게 백작의 작위를 두 번이나 세습하게 해준다. 왕희저의 부친이 25경의 묘지를 청했을 때, 만력제는 60경을 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에게는 1만5천냥의 돈을 하사한다. 그러나 총애를 받았다는 정귀비의 가족이 받은 대우는 총애를 받지 못한 주단비보다도 못했다. 정귀비의 부친이 만력제에게 5천냥의 휼전은을 청했을 때, 만력제는 겨우 5백냥만 내린다. 정귀비의 아들 복왕은 만력제의 4명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만력제가 번으로 보내어 모자가 떨어져 살게 된 경우이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만력제가 왕희저에게 정무에 참여하게 한 정도가 놀랍다는 점이다. 부유린(傅維鱗)이 <명서.궁위기>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만력제는 황후로 하여금 상소문서를 보존관리하게 했고, 왕희저는 상소문의 내용을 아주 잘 알아서, 만력제가 필요하면 바로 골라서 황제에게 올리는데 전혀 틀리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희저가 여러번 만력제에게 직언하는 신하를 용서하고 충신을 상주라고 하였으며, 만력제가 생각을 바꾸게 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청치에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정치를 같이 논의한 정도이다. 그러나 정귀비는 조정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그녀가 태감을 달라고 하거나, 만력제가 좋아하는 태감을 칭찬한 것만으로도 만력제의 진노를 샀다. 그리고, 한번은 정귀비의 아랫사람이 그가 여러해전에 하사한 옥완(玉碗)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정귀비를 책망하고, 정귀비는 놀라서 봉두난발에 맨발로 대전앞에 엎드려 명을 기다린다. 이렇게 오랫동안 엎드려 있은 후에 비로소 용서받는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정귀비를 모욕주는데, 만력제에게 무슨 정귀비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황후 왕희저는 계속하여 시종을 학대하고, 궁녀,환관중 때려죽인 자들이 백명을 넘겼지만, 만력제는 못본 척한다. 그저 그녀가 '약간 폭력적이고 자비롭지는 못하다'는 정도로 말하면서 극력 변호해 주었다. 이런 점을 보면, 만력제는 정귀비에게 가혹했고, 정귀비는 만력제를 두려워했다. 평상시에 만력제가 정귀비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알 수 있다. 희노가 무상한 환자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특히 환자에게 생사여탈권이 있다면.


만력제가 정귀비만 총애하지 않았고, 그저 정귀비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을 뿐이므로, 동림당은 이처럼 대담하게 정귀비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손귀비와 만귀비는 얼마나 총애를 받았던가, 황제는 그녀들을 위하여 여러번 파격적인 일을 저질렀지만, 어느 대신이 감히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었던가. 만력의 황후 왕희저는 잔인하고 포악했다. 그래도 대신들은 감히 상소를 올려서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왕희저가 정무에 참여하다고 하여, 대신들 중에서 비난하는 말이 흘러나왔는가? 그러나 정귀비는 어떠했는가? 그녀는 계속하여 우릎꿇고 울면서 만력제에게 하루빨리 주상락(朱常洛)을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청했지만, 동림당은 그녀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운다. 동림당 문명의 <선발지시>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매년 정월보름이 되면, 정귀비는 태자 주상락의 모친 왕공비에게 예를 행했다고. 이 예는 꼬박 십년간 행해진다. 그녀가 감히 어기지 못했다. 만력22년 삼월 정귀비는 하남의 굶주린 백성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자신이 십이년동안 모았던 돈 오천냥 전부를 이재민을 구제하는데 내놓는다. 그러나 이 일을 관리들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나중에 나중에 만력제가 명을 내려 황후가 비빈들을 이끌고 돈을 기부한 것에 대하여는 왕희저를 찬양하는 글을 올린다. 조정신하들은 모두 약아빠진 인간 들이다. 그들은 모두 약한 곳을 공격하지, 절대로 황제의 역린은 건드리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정귀비는 비록 만력제의 비빈들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그녀가 환자를 잘 보살폈기 때문이고, 만력제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총애한 것은 시종일관 그의 첫사랑인 황후 왕희저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동람당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었다. 심지어 잔혹하고 발호한 황후 왕희저를 아주 가련한 인물로 그리기까지 했다.


오늘날 정귀비묘라고 알려진 분묘는 기실 이귀비묘이다. 만력제가 만력25년에 총애하는 비 이경비를 위하여 세운 것이다. 그녀의 분묘규격은 만귀비의 묘와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만귀비의 묘보다 외라성을 한 겹 더 쌓았다. 명십삼릉의 7개 비자묘(妃子墓)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이를 보면 만력제가 이경비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숭정제는 정귀비를 위하여 따로 돈을 써서 분묘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그녀를 이귀비의 묘에 매장한다. 정귀비는 사후에 자신의 묘조차도 없게 된다. 이경비에게 배장된 것이다. 일대의 '총비'가 살아서는 고생만 하고, 죽어서도 처량했다. 현실은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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