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설신어(史說新語)
민국역사상 번수위운복수위우(飜手爲雲覆水爲雨)했던 정치인물인 장개석은 역대이래로 후인들로부터 욕을 먹는 독재자였다.
그는 국민정부와 국민당을 반세기동안 통치하였으며, 그동안 적지 않은 욕먹을 나쁜 짓들을 했다. 그는 수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욕심을 채웠고, 전체 국민정부를 자신의 독재통치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의 강산은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사람을 기용하는 측면에서 장개석은 하나의 대원칙이 있었다. 즉 임인유친(任人唯親).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기용한다는 것이다. 장개석이 중용한 장령들을 깊이있게 살펴보면 그들은 거의 모두 황포계(黃埔係)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포계 장령들과 비교하면 그의 친족은 더더욱 그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역사자료에서 장개석의 형제자매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일까? 설마 장개석이 외동아들이었단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장개석에게는 다섯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장개석의 부친은 장조총(蔣肇聰)으로 봉화계구(奉化溪口)의 명망있는 집안 후손이다. 그는 사람됨이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 이웃들간의 분쟁을 조정했고, 그리하여 동네와 이웃에서 능력있는 인물이 된다.
장조총은 20살때쯤 부친에게서 염포(鹽埔)사업을 물려받았고, 장사는 아주 잘되어, 집안은 풍족하여 계구의 부호 열명중 한명이 된다.
장조총의 조강지처는 서씨(徐氏)이다. 그녀는 장조총과의 사이에 일남일녀를 낳는데, 각각 장남 장개경(蔣介卿)과 장녀 장서춘(蔣瑞春)이다.
서씨가 병으로 사망한 후, 그는 다시 후처 손씨(孫氏)를 맞이한다. 그러나 2년도 되지 않아 손씨도 병으로 사망한다. 슬프게도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어서 상처한 장조총은 한때 자신이 극처(克妻)의 운명을 지녔는지 의심했을 정도이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인근마을의 과부 왕채옥(王采玉)을 처로 맞이한다.
두 사람은 모두 4명의 자녀를 낳는다. 각각 장조총의 차남 장개석, 차녀 장서련(蔣瑞蓮), 삼남 장서청(蔣瑞靑), 삼녀 장서국(蔣瑞菊)이다.
그중 장서청과 장서국은 요절하여 성년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나머지 3사람을 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큰형 장개경
장개경은 장개석보다 10살이 많다. 성격이 조급하고 포악하며, 도박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자주 다른 사람들과 싸웠다. 그는 말그대로 동네깡패이다.
장개석이 성공한 후, 그는 자신의 형을 이끌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는 집안에서 부모가 이미 전후로 사망하여 장개경이 그들 집안의 최고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장개석의 발탁으로 장개경은 광동 영덕현(英德縣)에서 지사(知事)가 된다. 관직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먹고 사는데는 걱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장개경은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공금으로 도박을 했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그를 해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장개경은 다시 송미령(宋美齡)에게 잘보여서, 다시 절강해관감독(浙江海關監督)과 절강성정부위원(政府委員)이 된다.
강산은 쉽게 바뀌지만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장개경은 거기에서도 여전히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에 빠진다. 그리하여 장개석의 정치앞날에까지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장개경으로 인하여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장개석은 그를 계구의 고향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를 위해 전장(錢莊)을 하나 열어주어,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살도록 안배했다.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을 때, 장개석을 구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개경은 놀라서 중풍으로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가, 3일후에 사망하고 만다.
큰누나 장서춘
장서춘은 장개석과 같은 모친 소생은 아니지만, 그녀는 마음이 선량한 보통여자였다. 그녀는 평상시에 장개석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그리하여 장개석도 그녀를 공경했다.
장서춘은 성년이 된 후, 이웃마을의 농민 주운(周運)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극히 보통의 생활을 지낸다.
매번 그녀가 고향집으로 돌아올 때면 항상 장개석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런 은정을 장개석은 평생 잊지 못했다.
나중에 장개석이 성공한 후에도 장서춘 부부는 바로 그에게 빌붙지 않고, 오히려 더욱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살았으며 한번도 장개석에게 골치거리를 안기지 않았다.
장서춘의 그런 행동은 장씨집안사람들로부터 모두 존경받았고, 그녀 부부의 나이가 많아졌을 때, 장개석은 따로 아들 장경국(蔣經國)으로 하여금 그들을 돌봐주도록 했고, 두 사람이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돌봐주게 된다. 이렇게 그들은 평범한 일생을 마친다.
큰여동생 장서련
장서련은 장개석보다 3살이 어렸다. 장서청과 장서국이 모두 요절하여, 장개석은 이 여동생을 아주 아꼈다.
그녀가 17살이 되었을 때, 장개석의 소개로 장씨집안에서 경영하던 염포의 일꾼인 축지산(竺芝珊)에게 시집간다. 여동생이 시집가는 날, 일본유학중이던 장개석은 특별히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여동생의 혼례를 주재했다.
장개석이 성공한 후, 매부인 축지산을 적극적으로 발탁해주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꿈에도 그리는 좋은 보직들을 많이 안겨준다.
장개석의 그런 조치는 자연히 축지산으로 하여금 여동생을 잘 대해주라는 뜻이었고, 오빠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을 분개하게 만든 것은 축지산이 권세와 지위를 가진 후에 자신의 하반신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여러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장서련은 그런 것을 가지고 오빠에게 원망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구시대의 생각을 가졌고, 남자들은 그런 것이 정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장서련의 아들은 군대에 들어가서 공군이 된다. 그러나 공중전에서 적기에 추락당해 순국하고 만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장서련은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게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그렇게 불가에 귀의하여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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