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중경담판(重慶談判)": 제2의 '홍문연(鴻門宴)', 장개석은 왜 모택동을 풀어주었을까?

중은우시 2024. 5. 7. 10:35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초한상(楚漢相爭)에서 항우(項羽)는 원래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유방(劉邦)을 죽여버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문제를 두고 항우는 무척 망설인다. 초나라 귀족출신인 그는 내심으로 이 건달을 멸시하고 있었다. 그는 유방이 지금 거둔 성취는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홍문연에서 항우는 유방을 풀어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천하를 잃고, 패왕별희(覇王別姬)하고, 오강에서 자결하게 된다. 항우의 실수로 대한(大漢)강산은 4백년간 지속되고, 세계최대의 민족인 한민족(漢民族)을 형성하게 된다. 홍문연때, 항우는 꿈에도 이런 점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2천년이 지난 후, 대일항전이 끝나고, 국공(國共)간에는 '홍문연'과 유사한 중경담판이 벌어진다. 장개석은 원래 모택동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바꾸게 된다. 역사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 결과 장개석은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망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직까지 대륙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있다.

2007년, 미국의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는 "장개석일기(蔣介石日記)" 친필본을 공개한다. 장개석일기의 내용을 보면, 우리는 중경담판을 전후한 장개석의 심리변화과정을 알아볼 수 있다.

1945년 8월 10일, 장개석은 미국으로부터 일본천황이 항복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는다. 즉시 3통의 전보를 보내 모택동에게 중경으로 와서 협상하자고 요청한다. 전보의 내용을 보면 성의있게 국공합작을 하자는 뜻이 드러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이건 바로 홍문연이라는 것을.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올지말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만일 자기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아마도 그는 여론을 자기 편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아주 성의를 가지고 요청한 것이다. 여기에 숨은 의미는 만일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쪽이 성의가 없는 것이니, 그후에 발생하는 일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개석은 모두 3통의 전보를 보냈다.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고 첫번째 보낸 전보의 내용만 살펴보자.

만급(萬級), 연안(延安)

왜구가 투항하여 세계가 영구적인 평화를 얻는 국면이 곧 실혈될 것입니다. 여러 국제 국내적인 각종 중요한 문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이에 선생이 배도(陪都, 당시 중경이 배도였음)로 와서 함께 국가의 대사를 상의합시다. 와주시면 행운이겠습니다. 하루빨리 만날 수 있기를 절박하게 기대합니다.

장중정미한(蔣中正未寒)

1945년 8월 14일

이에 대하여 여안에서는 여러번 회의를 개최한다. 장개석의 의도는 모두 알고 있었다. 네가 온다면 내가 너를 붙잡아 놓을 것이고,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대외적으로 너는 평화에 뜻이 없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당시 중경으로 가서 담판에 참가할지에 대하여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장개석의 두번째 전보에 회신하면서, 이미 주은래로 하여금 대신 가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회신에서 모택동이 직접 오도록 요청한다.

세번째 전보에서 장개석은 자신이 이미 비행기까지 준비했다고 말한다. "미령호(美齡號,미령은 장개석부인 송미령의 이름이고, 송미령이 나서서 자금을 모아 구매한 비행기임)"를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모두 나서서 모택동에게 보증했고, 그의 안전을 절대로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미국대사는 비행기에 누군가 장난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비행기를 타고 맞이하러 가기로 한다. 그제서야 모택동은 결심을 내린다. 직접 중경으로 가서 장개석과 만나겠다고 한다.

1945년 8월 28일 오후 3시 36분, 3시간의 비행을 거쳐, '미령호'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한다. 비행기에서 처음 나온 사람은 바로 모택동이었고, 그의 뒤에 미국주중대사 패트릭 헐리와 국민당대표 장치중(張治中)이 나왔다.

기실 모택동이 중경에 있을 때, 장개석은 모택동을 구금하거나 심지어 살해할 기회도 있었고, 동기도 있었다.

1945년 9월 29일의 일기에서 장개석은 모택동의 11개 죄상을 나열한다. 그리고 그를 붙잡아 재판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장개석은 죽일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다만 미국과 소련이 이전에 한 담보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미국대사는 원래 귀국해야하고, 그래서 별다른 영향은 없다. 미국이 중시하는 것은 그의 실력이다. 그의 장개석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소련에 대하여, 장개석은 이렇게 판단한다. '러시아의 실력은 이미 고갈되었다. 겉으로 강해보이지만 속은 약하다." 10월 5일의 일기에서 장개석은 만일 구금하여 모택동을 재판해서 처리했다면, 소련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신강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며, 동북에서 철군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신강은 조금 늦게 수복해도 되고, 동북도 잠시 놔둘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중원핵심지구는 반드시 통일해야 했고, 이는 항전초기 장개석이 "외적을 상대하려면 먼저 내부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결국 장개석은 모택동을 붙잡아둘 생각을 포기한다. 원인은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외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그의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 자는 대사를 이룰 가능성이 전혀 없고, 나의 통일사업을 방해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를 놔두더라도, 절대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아귀안에 들어와 있다고 여긴 것같다. 이는 항우의 경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내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까짓 모택동이 어찌 대사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을 위하여 굳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국 앞에서 나의 신용과 명예를 잃을 수는 없다.

1945년 10월 11일, 모택동은 비행기를 타고 연안으로 돌아간다.

장개석과 비교하면, 모택동은 훨씬 더 과감했다. 1949년 4월, 모택동은 <칠률(七律).인민해방군점령남경(人民解放軍占領南京)>에 이런 구절을 남긴다: "의장잉용추궁구(宜將剩勇追窮寇), 불가고명학패왕(不可沽名學覇王)"(남은 힘을 다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적을 끝까지 쫓아야 한다. 명성을 얻기 위해 항우처럼 해서는 안된다.)

역시 항우를 언급했다. 이게 설마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