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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요야성(姚冶誠): 장개석(蔣介石)의 두번째 부인

by 중은우시 2024. 10. 23.

: 노황설사(老黃說史)

장개석이 전후로 4명의 부인을 취했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두번째 부인 요야성(姚冶誠)의 평생행적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소주(蘇州) 부근에 야장경(冶長涇)이라는 하천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장경 부근은 미녀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일찌기 이런 말이 유행했다: "고소(姑蘇, 소주를 가리킴)에 미녀가 많다는 것은 허명이다. 진정한 미녀는 야장경에서 나온다."

당시 권세있는 고관들은 앞다투어 야장경 일대의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장개석의 두번째 부인 요야성, 두월생(杜月笙)의 첩 장아매(張阿妹), 왕정위의 3방면군사령관 공국량(龔國良)의 처 왕매매(王妹妹)등이 모두 야장경사람이다.

요야성의 원래 이름은 요이금(姚怡琴)이고, 아명은 아교(阿巧)이다. 1911년 요이금이 장개석을 만난 후, 장개석이 그녀의 이름을 "야성"으로 개명시켰다.

아교는 야장경 북부의 오래된 남교소진(南橋小鎭)에서 태어난다. 나중에 야장경 남쪽의 좌빈랑(左濱郞)으로 이사한다. 아교는 독생녀이고 어려서부터 부친과 모친의 사랑을 받았다. 불행히도 부모가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숙부 요소보(姚小寶)의 손에 자란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아교는 절색가인의 용모를 가진다. 맑은 눈과 흰 이빨, 새하얀 피부, 그리고 몸매는 풍성했다. 숙부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아교가 급계(及筓, 비녀를 꽂을 나이 즉, 만15살을 가리킴)의 나이가 되자, 숙부는 그녀를 딸로 삼아, 데릴사위를 들인다.

인근 마을의 심천상(沈天祥) 일가는 농사를 지었고, 생활은 빠듯했다. 요소보는 사람을 보내 심천상의 차남 심천생(沈天生)를 아교와 결혼시켜 요씨집안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성을 바꾸어 요천생이 된다.

결혼후 부부 서로 보살피고 서로 아꼈다. 두 사람은 상해로 가서, 요천생은 서장로(西藏路) 일대에서 양거(洋車)를 끌고, 교자(轎子)를 들고, 빈장(殯葬)등 힘을 쓰는 노동을 하고, 아교는 당자(堂子, 목욕탕을 가리)에서 방용(幇傭) 즉 현지사람들이 낭이(娘姨)라고 부르는 일을 한다.

요천생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생활도 점점 부유해진다. 돈이 생기자 그는 자주 아편을 피우게 되고, 아편때문에 부부가 번 돈을 모두 날리게 된다. 요천생은 자주 처를 욕하고, 아교는 자주 눈물을 흘렸고, 당초 상해로 오지 말아야했다고 후회했다.

아교는 소개를 받아 "군옥방(群玉芳)"이라는 당자에서 낭이를 했다. "대소저(大小姐)"라고도 부른다. 당자의 고급기녀는 "선생"이라고 불렸는데, 이런 기녀들은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으며, 시와 사로 지었다. 그리고 2명의 낭이가 모셨다.

아교는 바로 그중의 한 낭이였다. 그녀는 '선생'의 세수와 화장을 도우고, 의복과 악세사리를 정리했다. 이 일을 얻은 후, 그녀는 자주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가정의 온난은 아교의 생활에서 사라지게 된다.

장개석이 일본유학하는 동안, 여러번 가족을 만나러 귀국했다. 1911년 10월 30일, 장개석, 장군(張群)등이 무창의거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귀국하여 상해로 간다.

상해로 돌아온 후, 장개석과 고내빈(顧乃斌)등은 병사를 모아 "선봉감사단(先鋒敢死團)"을 조직한다. 장개석은 단장이 되어 상해와 항주를 오가면서 신해혁명에 참가한다.

그동안 장개석은 진기미(陳其美)를 따라 북리(北里)로 갔다가 프랑스조계에서 낭이 요아교를 만나게 된다. 여러번 만나다보니 감정이 깊어지고 결국 결혼하게 된다.

요아교의 숙부 요소보는 봉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요아교와 장개석의 결합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요아교는 숙부의 간섭을 피해서 상해로 숨어서, 프랑스조계 포석로 신민리 13호에 거주한다.

요아교 숙부의 당형인 요운현(姚雲顯)이 이때 상해에서 재봉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큰딸 요월영(姚月英)도 당자에서 낭이로 있었다. 얼굴이 예쁘고, 피부가 고우면서 키가 커서, 아름다운 용모로 인하여 부동산사업을 하는 부유한 상인 은능장(殷能章)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다.

한번은 요월영이 희원(戱院)의 앞에서 요아교를 만난다. 그후 요소보는 질녀 요아교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숙부는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이 혼사를 묵인하게 된다.

요아교가 장개석과 결혼한 후, 숙부는 더욱 적막해진다. 나중에 자주 당질녀 요월영의 집에서 지내고, 생활비는 요아교가 부담했다. 요천생은 요아교가 장개석에게 시집갔다는 것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장개석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소리친다.

장개석은 나중에 골치아파질 것을 우려하여, 요천생에게 돈을 준다. 요천생은 다시 심천생의 원래 이름을 회복한 후, 다시 결혼하여, 처와 함께 항주로 가서 지내게 된다.

신해혁명후, 장개석은 반원호법투쟁에 참가한다. 거처가 일정치 않았고, 상해, 항주, 산동, 광동, 복건과 일본등지를 오갔다. 요씨는 봉화 장개석의 고향집 계구(溪口)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녀는 비록 미천한 출신이고, 학식은 없었지만, 말은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 때로는 말을 내뱉고 뒷감당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장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에게는 공손했고, 장개석의 원부인 모복매(毛福梅)에 대해서도 경중(敬重)했다. 특히 장경국을 아주 아꼈고, 장경국도 요씨를 존중했으며, 요씨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이 시기에 요씨는 봉화현 준식여학교를 졸업한 진지견(陳志堅)을 스승으로 삼아 문화지식을 배우고,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는다. 그녀는 원래 총명하여 학습진도가 아주 빨랐고, 스승의 칭찬을 받았다.

1916년 10월 6일, 장위국이 태어난다. 장위국의 생부생모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장개석과 일본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다만, 장개석의 주방장 장소품(蔣小品)에 따르면, 장위국은 대계도(戴季陶)의 사생아라고 한다. 그래서 장위국의 신세내력은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장개석의 장위국에 대한 친밀도를 보면 친아들같기도 하다.

장위국은 천진하고 귀엽게 생겨서 장개석이 아주 좋아했다. 요씨도 장위국을 극히 사랑했다. 장위국과 의모 요씨와의 모자정은 어렸을 때부터 길러진 것이다.

장위국이 4살도 되지 않았을 때 요씨는 그를 데리고 봉화 계구의 고향집으로 가서, 풍호방(豊鎬房)에서 산다. 그에 대한 보살핌은 세밀했다. 매일 먹고 잘 때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맛있는 것은 모두 그에게 먹였고, 사계절의 의복도 모두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

장위국이 봉화유치원에 들어간 후, 요씨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구의 장개석고향집에서 봉화 서문가 주씨집으로 옮겨서 거주하면서, 매일 그녀가 직접 등하원시켰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1921년 5월, 손중산이 비상대총통에 오른다. 10월 광주에서 비상국회를 개최하고, 북벌출군과 통일중국의안이 통과된다. 이때의 장개석은 손중산을 도와 북벌을 진행한다. 군무로 바빠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없었다. 요씨는 자주 장위국을 데리고 광주로 가서 잠시 머물곤 했다.

장개석은 장위국을 아주 좋아했다. 매번 모자가 오면 아주 기뻐했다. 그는 회의를 할 때건 사무를 볼 때건 장위국을 안고 있곤 했다. 입으로는 아주 친근하게 "닙닙(囡囡)"이라고 불렀다. 장개석과 요씨는 천리 멀리 떨어져 있었고,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닙닙'이라는 감정의 유대를 통해 부부의 감정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후 장개석은 강소와 절강을 돌아다니면서 거처가 일정치 않았다. 시골에 칩거하고 있던 요씨는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되고, 감정은 점점 소원해진다.

1921년, 장개석의 모친 왕부인이 사망한다. 장개석이 상해에서 돌아왔고, 급히 장례를 치르고 다시 멀리 떠난다. 요씨는 그저 남편의 그녀에 대한 태도가 냉담하다는 것만 알았지, 그녀가 매일 그리워하는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 장개석은 아봉(阿鳳)이라는 상해아가씨를 열렬히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진결여(陳潔如)로 개명시킨다.

1922년, 7살의 장위국이 형 장경국과 함께 영파소학에 들어간다. 요씨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다시 봉화에서 영파 강북안 화장농의 전(錢)씨집으로 이사간다. 다음 해, 그들 형제둘은 상해 만죽소학으로 전학한다. 그녀는 즉시 상해의 매부 은씨집에 거주한다.

옛말에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다. 아들에게 좋은 학습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고, 더욱 잘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요씨는 아들의 학습을 위하여 이미 여러번 이사다녔다. 이를 보면 모친으로서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요씨의 처지는 기구했고,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장위국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사랑했고, 그녀는 거의 하루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위국을 그녀는 목숨줄로 보았다.

1923년 장개석은 소련으로 고찰학습을 떠나고 반년후에 귀국한다. 그때부터 육군군관학교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1924년 장개석은 손중산에 의해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된다.

남편이 성공하자 처도 득을 보게 된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상해에서 광주로 데려와 군관학교에 거처하게하며, 혼자서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장개석의 아들을 돌보고 있던 요씨는 일찌감치 장개석이 잊고 있었다.

요씨는 그 일을 알고 매우 화를 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정식으로 맞아들일 정실부인 모씨조차도 남편은 마음대로 버리는데, 그녀와 같은 신분으로 어찌 그가 다시 부인을 맞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직 장위국만 자신의 곁에 있다면 그녀는 만족했다.

그러나 왕왕 일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잔혹한 타격이 요씨에게 닥친다. 장개석은 돌연 장위국을 요씨에게서 데려가 진결여로 하여금 기르게 한다. 그리고 진결여를 서모로 삼는다. 황포군관학교의 사람들은 자주 장개석과 진결여 두 사람이 장위국을 데리고 캠퍼스를 산책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요씨는 침중한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병석에 눕는다. 그녀는 시골에 살면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아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3년이 지나,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이 나타난다. 그녀가 밤낮으로 그리워하던 아들 장위국이 돌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원래 장개석이 그렇게 사랑하던 진결여도 모씨, 요씨와 마찬가지로 버려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장개석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재능과 용모를 모두 갖추고 명문가정에서 태어난 송미령을 쫓아다녔다.

1927년 9월, 장개석은 장군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송미령의 모친 예계진(倪桂珍)을 만난다. 그리고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겠다고 약속하고, 정실부인 모복매와 이혼하고, 요씨 및 진결려와 부부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한다.

장개석은 정계에 자리잡기 위하여,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5년간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1927년 12월 1일 송미령과 결혼한다. 이로 인하여, 진결여는 상당한 돈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한다. 요씨와 장위국은 장개석의 가까운 친구 오충신(吳忠信)에게 부탁해서 소주로 이사한다. 생활비는 여전히 장개석이 부담했다.

요씨와 동시에 상해에서 소주로 이사온 사람은 장개석의 여동생 장서련(蔣瑞蓮), 매부 축지산(竺芝珊) 일가, 장개석과 같은 고향사람이면서 스승인 장가서(張家瑞)일가도 있다. 오충신은 소주에 큰 택원(宅院)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는 오래된 나무가 하늘로 솟아 있고, 정대누각이 있어, 환경이 우아하고 멋졌다. 요씨등은 잠시 이곳에 거주하게 된다.

고성 소주의 남부에는 버려진지 오래된 역사명원이 있다. 남원(南園)이다. 장개석은 요씨모자를 위해 저택을 지어주기로 하면서 그곳의 한 골목 "채정방(蔡貞坊)"을 고른다.

이곳은 채소농사를 짓는 곳이고, 소주에서 가장 비싼 토지이다. 무당 토지가격이 100원은양이었다. 요씨가 새로 거주할 집을 짓는 일을 총책임진 사람은 안지경(顔芝卿)이다. 건축공사는 영파의 장인이 책임졌고, 건설비용은 2만원은양이었다.

"채정방"의 이 작은 골목은 입구에 채씨정절방이 세워져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완공된 후의 "장공방(蔣公坊)"은 바로 채정방 7호이다. 면적이 10여무(1무은 200평), 앞뒤로 두 개의 대문이 있었다. 요씨일가는 일반적으로 앞대문으로 드나들었다.

대문은 검은색으로 칠한 나무문이다. 못은 백색동환이고 대문의 곁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소주시경찰국이 두 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경계했다. 앞데문은 목행교를 마주하고 있는데, 다리아래의 물은 깨끗해서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하천의 건너편에는 농가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장공관"의 인원은 많지 않았다. 요씨와 장위국 모자외에 요씨의 조카 요금화(姚金和)가 소주로 와서 장위국과 같이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장위국의 가정교사, 여자일꾼, 남자일꾼, 개인의사, 회계, 집사등 모두 10명이었다.

요씨는 경건한 불교도이다. 그녀는 소개를 받아 영암산사원의 고승 인광대법사를 사부로 모시고, 수행한다. 항상 입으로는 불경을 외웠고, 손에는 염주를 굴렸다. 요씨의 일일 세끼를 먹기 전에 불당으로 가서 염불을 외운 후에 식사를 했다. 그녀의 식사는 아주 간단했다. 매끼 두 가지 채소요리를 먹었다. 고기는 먹지 않았다.

요아성은 쉬고 일하는 것이 규칙적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를 하며 경치를 구경한다. 3끼를 먹기 전에 불당으로 가서 염불을 한다. 식사후에는 잠시 잠을 잔다. 평소에 저녁을 먹은 후 마작을 하거나 마당을 산책했다. 요씨는 치파오를 입기 좋아했다. 머리는 항상 횡애사(橫愛斯)모양으로 빗었다.

장개석은 항상 행적이 일정하지 않아서, 요씨는 자주 장개석과 서신으로 연락했다. 가끔 만나더라도 그저 보기만 할 뿐 동거하지는 않았다. 요씨는 교사의 가르침으로 경문을 읽고 서신을 쓸 수 있었다. 글자는 그다지 잘 쓰지 못했다. 매번 쟁가석에게 보내는 서신은 장위국이나 요금화가 써주었다. 어떤 때는 장개석의 전용열차가 소주를 지나게 되면 요씨는 장위국을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서 장개석과 만나곤 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요씨는 장위국을 데리고 중경으로 간다. 중경시 남온천에 거주한다. 장개석은 차를 몰고 남온천으로 와서 요씨와 만나고, 장위국을 보았다. 개략 1945년, 요씨는 다시 소주 남원으로 돌아와 거주한다. 그녀의 생활을 돌보아준 것은 주로 조카 요각화(姚覺和)였다.

1948년, 대륙이 해방되기 전날, 국민당요원과 가족들은 속속 대만으로 도망쳤다. 요씨는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간 후 도원(桃園) 대진방직창(大秦紡織廠) 부근에 살았다. 거기는 친척 석봉상(石鳳翔)이 이웃에 살았다. 나중에 요씨는 대중(臺中)으로 옮겨서 살게 된다. 나중에 장위국이 장갑병부대사령관이 되었고, 대중은 장갑병사령부주둔지에서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장위국이 그녀를 만나러 가고, 보살펴 주는데 편했기 때문이다.

장위국은 요씨를 아주 존경했다. 요씨가 대만으로 간 후 마음이 소주남원에 살 때만큼 편하지 않아서, 금방 노쇠해지고 1966년 병사하게 된다. 향년81세이다.

당시 대만국민당 육군지참대학 교장으로 있던 장위국은 돌연 의모 요야성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즉시 차를 몰아 대중으로 간다. 도중에 그는 기사에게 차를 돌려 대중으로 가지 말고 타이페이 양명관저로 가도록 해서, 장개석을 만나려 한다.

그는 부친을 설득해서 버려졌던 고과노인의 장례를 융중하게 치러주고 싶었다.

장위국은 부친 장개석의 저택으로 가서 계모 송미령이 옆에 없는 틈을 타서 부친에게 온 뜻을 설명한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 못하게 장개석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장개석은 엄숙하게 장위국에게 말했다: 너는 빨리 돌아가서 의모의 후사를 잘 처리해라. 다만 장씨집안의 명성과 명예를 생각해야 하니, 요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장위국 속마음과 다르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양명관저를 떠난다. 그는 기사에게 급히 가도록 요구했고, 쉐보레승용차는 금방 대중의 '요공관'에 도착한다.

상복을 입고 침중하게 영전으로 걸어가 조문을 한 장위국은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종이돈을 태우면서 통곡한다. 요각화 부부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요야성이라는 장개석의 부인이 병사했다는 소식은 전체 대만의 신문잡지에 한 마디도 실리지 않는다. 10여자의 간략한 소식조차도 올라오지 않는다. 상심되고 화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부친의 권세로 그는 영전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면서 마음 속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요씨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결혼후에도 욕먹고 얻어맞았으며, 나중에 젊은 나이에 버림받는다. 인간의 비애와 고통을 모두 겪었다. 기실 요씨가 장개석과 만난 후 처음에는 아주 사이가 좋았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멀어졌다. 주로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장개석은 요씨가 도박을 좋아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1919년 10월 18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야성은 도박을 멈추지 않아서 너무 싫고, 괴롭다." 그리고 1920년 1월 1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아침 일찍 깨어났는데, 아래층의 전등이 아직 밝았다. 요야성이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이 화가나서 욕을 한 바탕 했다...."

장개석은 요씨가 자상하지 않은 것에 화를 냈다. 그는 1920년 5월 16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최근 야성은 도박을 좋아하고 내가 아픈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말이 괴이하고 행동도 괴이하니 마음 속으로 매우 화가 났다"

장개석은 요씨가 말을 각박하고 날카롭게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1921년 5월 3일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침에 일어났다. 야성은 옛버릇이 다시 나타났다. 혀를 날카롭게 놀려서, 화를 참지 못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혼을 냈지만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당연히 이는 장개석의 일방적인 말이다. 다만 일기를 보면 요야성에게는 확실히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장개석이 스스로 한바탕 욕을 했다. 오랫동안 혼을 냈다.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을 보면 장개석에게도 모진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외에 장개석은 일기에서 자신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넘어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상해아가씨 진아봉에 대한 애정이 날로 커져갔고, 미친 듯이 그녀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이 점이 아마도 요야성과 장개석간의 불화를 불러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장개석은 계속하여 요씨와 헤어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요씨와 갈라지겠다는 결심은 내리지 못한다. 원인은 장개석이 말한 바와 같다: "버리게 되면 첫째는 위국을 부양할 사람이 없어져서 위국이 모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아파할 것이고, 둘째는 우단사련(藕斷絲連), 끊을 수없는 인연을 끝내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장개석의 가까운 친구인 장정강(張靜江), 대계도, 거정(居正)등은 일찌기 장개석과 이 일을 논의한 바 있다. 결국 장개석은 재삼 고려한 후, 친구들의 권고를 들었고, 계속하여 요씨와의 원래관계를 유지했다. 1927년 장개석이 송미령과 결혼하면서, 장개석은 비로소 정식으로 요씨와의 관계를 끊는다고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