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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는 누가 만들었는가?

by 중은우시 2022. 12. 28.

글: 옥미수(玉米穗)

 

1945년 중공7대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하나의 조치는 당장(黨章)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유소기(劉少奇)가 새로운 당장에 대한 보고를 하는데, 당장의 조문에 "모택동사상(毛澤東思想)"을 중국공산당의 사상적 기초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의 통일된 사상인 모택동사상을 우리 당의 모든 공작의 지침으로 삼는다."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를 누가 가장 먼저 만들었을까? 왕가상(王稼祥)이다. 왕가상은 1943년 7월초 <해방일보>에 <중국공산당과 중국민족해방의 도로>라는 글을 싣는다. 이 글에서 먼저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전에 중국공산당에서는 각양각색의 유사한 용어를 사용해 왔었다. 예를 들어, "모택동동지의 이론" "모택동동지의 사상" "모택동동지의 이론과 전략" "모택동동지의 관점" "모택동동지의 견해" "모택동동지의 정책" "모택동동지의 노선" "모택동동지의 도로" "모택동의 풍격" 심지어 "모택동주의"라는 말까지 있었다. 다만, 최종적으로 정식 채택되어 고정적으로 사용된 것은 왕가상이 만들어낸 이 용어 "모택동사상"이다. 비록 적지 않은 아부꾼들이 "모택동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모택동 본인은 7대가 개최된 수년후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를 채택한 과정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한 바 있다. 1949년 3월 13일 중공 7기 2중전회에서 그는 왜 "중국공산당원의 사상"을 "주의"라고 부르면 안되는지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스탈린의 사상을 학설이라고 하고, 주의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스탈린의 겸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겸손으로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소련에는 이미 레닌주의가 있고, 스탈린의 사상은 이 주의에 부합하고, 그것을 실제정책으로 관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레닌주의가 있는데, 다시 스탈린주의가 있게 되는 것이니 2개의 주의가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의 사상, 노선, 정책등을 만일 하나의 주의로 한다면 세계에 여러 개의 주의가 있게 되고, 그것은 혁명에 불리하다. 우리는 역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분점(分店)이 되는 것이 좋다. 

 

그외에 "모택동주의"라고 칭하지 않은 것에는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일찌기, 중공당내에는 "모택동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일찌기 1927년 8월 내지 9월 추수기의(秋收起義) 기간동안, 중앙위원회에서 '모택동주의'는 군사상의 '기회주의'와 동의어로 한때 유행한 바 있었다. 그외에 서로 다른 정견을 가진 공산주의자인 섭청(葉靑, 본명 任卓宜)은 40년대에 중공을 비판하는 글을 쓸 때, "모택동주의"라는 말로 모택동을 비평 풍자한 바 있다. 그는 <항전과 문화>라는 글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모택동에게는 조그만치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하나의 주의만 있는데 그것은 모택동주의이다. 이는 일종의 "농민, 쁘띠부르조아계급을 대표하는" 주의이다. 섭청의 저작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널리 알려져 있었고, 모택동은 그런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