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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정강산(井岡山)시기 주모(朱毛) 충돌: 원인은?

by 중은우시 2022. 7. 27.

글: 옥미수(玉米穗)

 

주덕(朱德)이 군대를 이끌고 처음 정강산에 들어왔을 때, 모택동과의 사이이 적제 않은 이견과 충돌이 있었다. 이는 많은 당사자료에 언급되고 쓰여 있다. 다만 기술방법은 비교적 우회적이다. 어떤 경우는 간략히 언급하며 지나가며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중공초기 고위군사장군인 공초(龔楚)가 쓴 <공초회억록(龔楚回憶錄)>에는 주덕과 모택동간의 충돌을 일으킨 구체적인 사건과 원인에 대하여 상세하게 회고하고 기술하였다. 공초는 또한 그 본인이 당시 주덕과 모택동 두 사람의 성격차이 및 능력등 방면에서의 자신의 견해도 써놓았다.

 

공초의 기술에 따르면, 1928년 5월부터 10월까지, 주모간에 몇건의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진다.

 

첫째, 6월하순, 28단, 29단(주덕이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간 부대)은 신로칠계령(新老七溪嶺)에서 전투를 벌여, 국민당군 김한정(金漢鼎)부대를 물리치고, 수백정의 소총과 몇정의 기관총을 노획한다. 당시 두 단은 노획한 무기장비를 모두 자신의 장비로 보충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쓰던 노후된 무기장비를 정강산 후방으로 보내어 31단(모택동의 부하로 원래 정강산에 있었던 사람들)과 지방적위대(地方赤衛隊)이 사용하게 했다. 모택동은 이에 대하여 크게 불만이었다. 주덕에게 노획한 좋은 무기중 일부를 31단에 주도록 요구한다. 주덕은 각 단에서 이미 스스로 총기무기를 사용하고 있으니 더 이상 그들에게 내놓으라고 명령하지 말라고 하면서 모택동의 요구를 거절한다. 모택동은 이로 인하여 주덕을 "본위주의(本位主義)"라고 비판한다.

 

둘째, 7월 침주(郴州)를 공격하는 전투가 벌어진다. 겉으로 보면, 호남성위(湖南省委)가 주장한 것이지만, 기실 주덕이 암중으로 이를 기회삼아 정강산을 떠나 상남(湘南, 호남성남부)로 가서 세력을 키우며, 모택동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이를 저지하나, 주덕은 무시하고 여전히 침주를 공격하는 계획을 실행한다. 당시는 마침 국민당군이 제2차로 정강산에 대한 포위소탕작전을 벌이는 때였다. 비록 정강산이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산아래의 지방은 크게 파괴되고 손실을 입었다. 모택동은 형세가 심각한 것을 보고 당시 직접 31단을 이끌고 정강산을 떠나 주덕을 찾으려고 생각한다. 계동(桂東)에서 침주공격에 실패한 주덕부대와 만난다. 모택동은 주덕을 단순한 군사적 견해만 가진 모험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셋째, 9월 13일, 홍군이 국민당군 유사의(劉士毅)부대를 격패시키고 수천(遂川)을 점령한 후, 모택동은 즉시 승기를 틈타 황요(黃坳)로 진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주덕은 남쪽으로 쳐내려가고자 했다. 두 사람은 여러 날동안 대치했고, 9월하순에 이르러 비로소 황요를 치고 정강산으로 돌아간다. 모택동은 당시 주덕을 근거지를 돌보지 않는 유구(流寇)사상을 가졌다고 욕했다.

 

주덕이 정강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고, 상남으로 가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자 한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그는 모택동의 권력욕이 너무 강해서 독재를 좋아한다고 느꼈다. 모든 일을 그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며, 아주 고집스러우며, 여러 방면에서 주덕을 견제했다. 그리고 주덕에게 모택동을 위해서 정강산을 지키라고 하니, 주덕으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정강산은 양식이 아주 부족했다. 홍군관병은 자주 호박, 고구마와 쌀을 섞은 것을 주식으로 삼았다. 생활이 아주 힘들었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정강산에 남아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는 주덕의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병사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주덕은 외부로 확장하는 것이 시급했다. 모택동의 정강산을 기지와 중심으로 생각하며 천천히 외부로 파도식으로 발전시키는 식의 계획에는 흥미가 없었다.

 

셋째, 모택동은 자주 호남성위와 당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거나 반대했고, 자시가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갔다. 주덕은 모택동이 완전히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사상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상급에 반대한 것이며, 이는 엄중한 항명이라고 여긴 것이다. 주덕은 그리하여 모택동과 거리를 둔다.

 

넷째, 홍군전적위원회(前敵委員會)는 중앙의 지시로 성립된 것이다(상위위원은 모택동, 주덕, 공초였다). 홍군의 모든 행동결정과 지방당공작의 협조건은 마땅히 전적위원회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자신의 독재의 편의를 위하여, 스스로 홍군당과지방당의 연석회의를 조직해서 이로 전적위원회를 대체했다. 그리하여 주덕과 공초를 배제하고, 그들 둘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하여 주덕은 모택동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모택동이 독재한다고 욕한 것이다.

 

이상의 여러가지 점이 주덕이 모택동에 반대한 주요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