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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19

영대수도(瀛臺囚徒): 개혁황제 광서제의 비극 글: 장효파(張曉波) 1908년, 무신년(戊申年), 청광서34년. 불안했던 청나라 역사에서 1908년은 아주 두드러진 해이다. 8년전에는 전체 화북을 뒤흔들었던 의화단의 난과 8국연합군의 중국침략이 있었고, 3년후에는 천번지복할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반드시 언급해야할 일은 이 해의 11월 13일.. 2014. 11. 20.
광서제의 연금생활은 어떠했는가? 글: 낙방거사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유지를 반포하여, 광서제는 질병으로 조정업무를 처리할 수 없어, 서태후가 다시 "훈정"을 한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이번 "훈정"은 이전의 "수렴청정"과는 달랐다. 직접 황제와 나란히 앉아서 신하들을 마주하고 업무를 듣.. 2013. 6. 10.
광서제: 황제의 무릎 글: 장명(張鳴) 어떤 중국인은 말한다. 사람에게 무릎이 있는 것은 꿇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루쉰(魯迅) 선생이 아주 미워했던 말이다. 일찌기 크게 조롱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에 사람이 세상에 살면 자주 무릎을 땅바닥에 꿇어야 했다. 부모에게 꿇고, 어른에게 꿇고, 스승에게.. 2012. 9. 20.
광서제(光緖帝)의 죽음: 누가 원흉인가? 글: 하약청(何躍靑) 서태후는 영록(榮祿)의 딸 과르자씨(瓜爾佳氏) 유란(幼蘭)을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과 결혼시키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순친왕부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다: 하나는 원세개(袁世凱)이고 다른 하나는 영록(榮祿)이다. 왜냐하면 원세개의 뒷배.. 2012. 9. 19.
광서황제(光緖皇帝)와 메이지천황(明治天皇) 글: 왕룡(王龍) 중일양국의 근대사상, 광서와 메이지라는 두 역사인물은 하나는 대국의 구오지존인 황제였고, 다른 하나는 협소한 섬나라의 '만계일세'의 천황이었다. 19세기중엽 마찬가지로 서양열강에 의하여 나라의 문을 열도록 핍박받는 위급한 시기에 그들은 변법유신을 실행하여 위기를 만회해.. 2009. 12. 18.
광서제를 살해한 원흉은 누구일까 글: 수은하(水銀河) 며칠만 더 지나면 광서제 서거 100주년이 된다. 이번 백주년 기일을 맞이하여, 사학계에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광서제 사인의 수수께끼가 중국원자력과학연구원, 북경시공안국법의검사감정센터 전문가들로 구성된 '청나라 광서사인' 전문연구과제조에 의하여 해결되.. 2008.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