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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를 살해한 원흉은 누구일까

by 중은우시 2008. 11. 4.

글: 수은하(水銀河)

 

며칠만 더 지나면 광서제 서거 100주년이 된다. 이번 백주년 기일을 맞이하여, 사학계에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광서제 사인의 수수께끼가 중국원자력과학연구원, 북경시공안국법의검사감정센터 전문가들로 구성된 '청나라 광서사인' 전문연구과제조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다만, 사인이 불명확할 때는 사인이 수수께끼였지만, 사인이 분명해진 후에는 살해의 흉수가 누구인지가 또 다시 새로운 수수께끼로 나타났다. 역사는 겹겹이 쌓인 수수께끼의 덩어리인 것같다. 광서제도 마찬가지이다. 젊어서 인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연금황제에 대하여 동기가 있고, 손쓸 기회가 있던 사람이 한 명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의심하는 대상도 자연히 한 명만이 아니다. 사인의 수수께끼가 풀린 그날부터 이 새로운 수수께끼는 다시 오랜 기간을 걸쳐야 해결될 것이다.

 

사실 사인이 풀리기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흉수에 대하여 단언하거나 추측해왔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의심받는 사람은 세 사람이다: 서태후, 이연영(李蓮英), 원세개(袁世凱).

 

세 사람중에서 서태후의 혐의가 가장 크다. 이미 고인이 된 서예가 계공(啓功)의 증조부는 당시 예부상서를 지냈는데, 일찌기 광서제의 병이 위중할 때 한 어린 태감이 광서제에게 한 사발의 요쿠르트를 바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호기심에 어린 태감에게 물어보았더니, 서태후가 광서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안에서 광서제가 붕어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사실이라면, 서태후는 바로 모살의 원흉임에 틀림없다. 사실 서태후는 백일유신에서 6군자를 살해하고, 광서제를 연금했다. 사실상 이미 이 외조카(광서)와 철저하게 결렬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오후,서태후도 중남해 의란전에서 사망했다. 죽기 전에, 스스로 이미 더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된 서태후는 나중에 광서제가 조정을 장악하면, 자기의 정책과 심복들에 대하여 반격을 해올 것이 두려웠다. 그녀가 사람을 시켜 광서제를 죽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청패류초>>라는 책에서는 이미 명확히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부의의 회고록인 <<나의 전반생>>에서도 궁안에 이런 얘기가 많이 떠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광서를 죽여버리려는 기도를 드러낸 바가 있고, 일련의 사실상의 행동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먼저 광서제의 병이 위중하다고 재삼 선언하고, 전국의 명의를 불러 진단하게 하였다. 또한 그녀는 부준을 대아거로 삼아거 광서제가 붕어하거나 퇴위하면 즉시 뒤를 잇게 하였다. 아쉽게도 당시 서양인들이 그녀의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고, 프랑스는 특히 의사까지 파견하여 광서제를 진맥했다. 나중에 나온 결론은 광서제는 멀쩡하다는 것이었고, 서태후가 퍼트린 광서제의 병이 위중하다는 거짓말을 부정했다. 바로 이러했으므로, 서태후는 서양인들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토벌하던 의화단을 지지해서, 공공연히 팔국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증거는 바로 당시 외무부시랑으로 있던 오정방(伍廷芳)의 말이다. 일찌기 1904년, 오정방은 일본공사인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와 얘기를 했는데, 우치다가 그 내용을 기록하여 일본정부에 보내어 기록보관소에 넣었다. 몇년전, 어떤 역사학자가 이 자료를 발견했는데, 우치다 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오정방에게 만일 서태후가 먼저 죽었으면, 광서제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정방은 그런 일은 아주 골치아프고, 광서제가 아마도 먼저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북경의 궁중에는 그런 말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정부가 병사를 보내어 광서제를 구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당시 일본은 북경에 주둔군이 있었고, 각국 공사관부근에도 주둔군이 있었다. 당연히 일본정부는 이런 일에 관여하고자 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당시 오정방이 이미 이런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서가 죽기 4년전에, 그는 일본정부에 광서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나중에 시독학사, 기거주관인 혼육정도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혼육정은 광서제와 함께 글을 읽었고, 광서제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면 모두 기록했다. 그의 <<숭릉전언록>>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시 한번은 서태후가 병이 들었다. 태감들은 말했다: "노불야(老佛爺, 서태후를 가리킴)께서 병이 드시면, 황제가 기뻐하겠습니다." 서태후는 말했다: 나는 절대 그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 당시 태감들도 그들간의 관계를 이간질했다. 서태후를 모시고 궁중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덕령(德齡)도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만, 여러해 후, 부의의 회고록인 <<나의 전반생>>에서, 이 마지막 황제는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원세개가 광서를 살해한 주범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세개는 광서의 백일유신을 파괴시켰고, 광서제가 조정을 장악하면 자신에게 죽음을 내릴 것을 겁냈다는 것이다. <<나의 전반생>>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광서황제는 죽기 전날까지도 괜찮았다. 그저 약을 한번 먹고는 나빠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약은 원세개가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었다. 관례에 따라, 황제의 병은 매일 태의가 내린 약방은 모두 내무부대신들에게 1부씩 베껴서 준다. 만일 중병이면 다시 매 군기대신에게 1부씩 준다. 내무부의 모대신의 후손에 따르면, 광서황제가 죽기 전에 얻은 것은 단지 감기였고, 그는 약방문을 보았고, 맥안도 아주 보통이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은 하루 전날 멀쩡한 사람과 같이 방안에 서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서제가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눌랐다. 더욱 기괴한 것은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나온지 2시진도 지나지 않아서, 이리 '붕어'하였다는 말이 들린 것이다." 부의는 2살때부터 고궁에서 자랐는데, 그 동안 원세개에게 핍박을 받았고, 1912년 정식으로 퇴위를 선포하여, 청나라의 통치가 끝이 난다.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세번째 혐의를 받는 사람은 서태후의 총신인 대태감 이연영이다. 이 주장은 영국인인 John Bland의 <<자희외전(慈禧外傳)>>과 덕령의 <<영대읍혈기(瀛臺泣血記)>>이다. 후자는 그녀의 책에서, "이연영은 서태후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의 뒤를 봐주는 사람에 바로 문제가 발생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속으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광서제가 정권을 장악하면 자기를 손볼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자신이 먼저 손을 쓰기로 하였다. 여러번 생각한 끝에, 그의 독계는 결정된다. '최근들어 노비(이연영)가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만세야(광서)의 몸이 아주 좋지 않다고 한다' '노비(이연영)는 가서 보고 오겠다. 그의 몸이 좀 좋아졌는지'...바로 이연영이 이 말을 한 다음 날, 광서제는 아무 이유없이 엄중한 병을 얻게 된다...광서제는 스스로 알았을 것이다. 그는 이연영이 음식에 독을 넣었고, 일부러 그를 모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의문점이 아주 많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이연영과 광서의 관계는 실제로 괜찮았다고 한다. 하나의 예를 들면,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기간동안, 서태후는 황급히 광서를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쳐 섬서까지 간다. 그동안 그들 일행은 보정에 머문 적이 있는데, 보정직예관리들은 서태후에 대하여 아주 잘 접대하고 어레인지했다. 일용음식과 이불등 모든 면에서 아주 잘 공급되었고, 없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저녁에 이연영이 서태후를 모시고 난 다음에, 서태후가 잠이 든 것을 보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자기의 방에도 잘 어레인지 되어 있었다. 그는 광서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찾아가 보았다. 광서의 방에 가보니 그저 등 하나, 침상하나가 있고, 광서제는 거기에 앉아서 등을 켜놓고 있었다. 이연영은 한번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총명한 사람이다. 광서의 침상에는 이불과 요도 없었던 것이다. 곁에는 태감도 없었다. 날씨는 아주 추운데, 광서제는 어떻게 잠을 잘 것인가? 이때, 이연영은 바로 꿇어앉았다. 그리고 죽을 죄를 졌다고 말하면서, 태감들이 제대로 황상을 모시지 못하였으니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말을 마친 후 자기의 방으로 되돌아와서 자기의 요와 이불을 광서제의 방으로 가지고 가서, 광서제의 침상에 펼쳐주었다. 광서제가 잠이 든 후에 그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이 일은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광서제가 북경으로 돌아온 후, '이안다(李達, 이연영을 가리킴)'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바로 광서제가 이연영에 대하여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볼 때, 광서제가 다시 조정을 장악하더라도, 이연영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광서사인의 수수께끼가 기나긴 풀이의 과정과 같다면, 이 수수께끼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답안이 어떤 것이건 간에, 서태후는 광서제의 일생동안의 비극을 만든 원흉이다. 그녀는 어찌 되었건간에 이 일에서 책임을 벗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