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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황제(光緖皇帝)와 메이지천황(明治天皇)

by 중은우시 2009. 12. 18.

글: 왕룡(王龍)

 

중일양국의 근대사상, 광서와 메이지라는 두 역사인물은 하나는 대국의 구오지존인 황제였고, 다른 하나는 협소한 섬나라의 '만계일세'의 천황이었다. 19세기중엽 마찬가지로 서양열강에 의하여 나라의 문을 열도록 핍박받는 위급한 시기에 그들은 변법유신을 실행하여 위기를 만회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최종결과는 메이지천황은 '민족의 아버지'로서의 이미지를 일본에 떨치고 있는데 반하여, 광서황제는 '영대'에 갇혀있는 신분으로 최후의 세월을 비참하게 보낸다. 격동의 역사교차로에서 그들은 마찬가지로 뜻을 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했는데, 운명은 이처럼 달라지게 되었을까? 오늘날 다시 그 시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광서와 메이지 두 사람은 모두 엄격한 궁중교육을 받았다. 모두 학문을 좋아했고, 뜻이 컸다. 광서는 메이지보다 19살이 어렸다. 그러나 광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메이지와 비교하여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았다.

 

메이지천황은 중국붓을 잘 썼다. 중국전통의 회화와 서예에 모두 흥미가 컸고, 심취했다. 그의 거처에는 중국수묵화인 소나무, 대나무, 난초를 그린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가 걸려 있었다. 일본에서, 메이지천황을 옹립한 유신파는 히라다 카네다네(平田鐵胤),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니시무라 시케키(西村茂樹)등 일류학자를 천황의 '시강(侍講)'으로 삼아, 메이지에게 중국고전인 <<대학>>, <<시경>>, <<자치통감>>, <<정관정요>>등을 강의하게 한다. 박대한 중국문화에 대하여 메이지는 큰 관심을 가진다. "메이지(明治)"라는 연호조차도 중국고전인 <<주역>>에 나오는 "성인남면청천하, 향명이치(聖人南面聽天下, 向明而治)"에서 따왔다.

 

그렇지만, 유학의 훈도를 많이 받은 광서에 비하면, 메이지천황은 기껏해야 아직 졸업도 못한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사라는 노인은 광서에게 잔혹했고, 메이지에게는 총애를 베풀었다. 메이지유신이 기세등등한 놀라운 소리를 내면서 일본의 국가변혁에 거대한 성공을 가져다주어, 일약 근대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한 반면, 30년후에 광서가 주도한 무술변법은 순간적으로 피었다 지는 꽃과도 같이 겨우 10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중국이 열강에게 통제되고 뜯어먹히는 심연으로 더욱 빠져들게 한다.

 

"학생"뻘인 메이지가 어떻게 "스승"뻘인 광서를 추월하여, 일본을 중국보다 훨씬 앞으로 나가게 만들었을까?

 

바로 어떤 학자가 얘기한 것처럼 일본인은 "외국에서 온 것을 밥처럼 먹었다" 적극적으로 소화시키고,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외국에서 온 것을 옷처럼 입었다" 비록 추위는 약간 막을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체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하여 일본은 구미를 배우고, 백성을 계몽하는 붐이 일어난다. 문명개화의 시작은 계몽사상의 전파와 사상관념의 변혁이었다. 유신파는 메이지유신을 위하여 국제지식과 당시 선진국인 독일 프랑스문화과목을 개설하고, 독일법학과 프랑스정치규약을 강의한다. 구미시민계급의 통치경험을 소개한다. <<서국입지편>> <<법국정전>>등 계몽사상의 명저들이 천황의 책상위에 항상 놓여있는 교재였다. 사무라이(武士)들이 차고 다니는 쌍도(雙刀)는 신분의 상징이었고, 생활습관이었다. 메이지는 <<단발탈도령(斷髮脫刀令)>>을 내려, 과감하게 일본인들의 눈썹을 깍고 이빨을 색칠하는 천년의 구습관을 버리게 한다. 서방예복을 관리의 정식예복으로 결정하며, 관리들에게 양복을 입도록 장려한다. 메이지가 솔선수범하여, 의식주행부터 시작하여 근대일본의 문명체계를 건립하기 시작한다.

 

사실, 서방의 과학기술과 사상에 대하여, 광서는 인식과 이해가 없었다. 미국인 Headland가 쓴 <<서태후와 광서 - 중국궁정생존유희>>라는 책에는 광서제가 유년기에 서양장난감을 아주 좋아했다. 예를 들어 서양시계, 유성기등을 좋아해서 손에서 놓지를 않았고, 각종 서양장난감이 황궁에 가득했다. 북경동교민항에 있는 덴마크에서 중국으로 온 완구상인은 의외의 성공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장 많이 사가는 사람이 중국황제일 줄이야.

 

광서제는 서양장난감을 좋아하다가 점점 서방의 선박과 대포와 선진문명에도 깊은 흥미를 드러냈다. 그는 자금성내의 하화지의 호반을 따라서 철도를 건설하고, 유럽의 공장으로 하여금 기관차 하나와 두 량의 기차객차를 달고 회전목마를 타는 식으로 놀았다. 세상에 번개같은 속도로 정보를 보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가슴이 뛰었다. 즉시 명을 내려 전보를 수발하는 설비를 설치하게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얼마되지 않아 조정은 전국에 전보를 사용하게 한다.

 

외국사절을 접견할 때, 그는 친히 외국원수가 그에게 수여한 훈장을 달고 나타났다. 그리고 각외국에 주재하는 공사들에게도 외국훈장을 달도록 시켰다. 이를 통해 그 나라를 존중한다는 것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는 비교적 상세한 세계지도를 원했다. 이를 통하여 외부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총리아문을 통하여 일처리가 깔끔한 상해도대 채균으로 하여금 빨리 만들라고 한다. 결국 1600여냥의 돈을 들여서 제작을 완성한다. 그는 양무운동에 대하여 천연적인 지지와 호감을 드러낸다. 심지어 직접 명을 내려서 기독교가 중국내에서 선교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백성들이 기독교도와 화목하게 지내야한다고 요구했다. 1892년 2월 4일, 뉴욕타임즈는 신기한 눈으로 광서제가 영어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황제폐하가 외국어를 배운다는 소식은 사람들에게 의외였다. 그들은 심지어 이것이 진실인지조차 의심한다...그의 정치고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뛰어난 지혜와 담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유사한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강유위가 광서황제에게 올린 <<러시아 피터대제 변정기>> <<일본변정고>>, <<열국변통흥성기>>를 올려서, 러시아, 일본등의 나라가 변법을 통하여 부강하게 된 성공경험을 소개한다. 광서제는 흥분제를 맞은 것과 같았다. 광서제는 서방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배우고 싶었다. 변법의 과정에서 신학식, 신사상을 가진 인재를 중추기구에 들어오게 해서 새정치에 참여시킨다. 그는 거대한 압력을 견디면서, 각성의 총독 순무에게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요청한 후 심사를 거쳐 임용했다. 그중에는 담사동, 유광제, 임욱, 양예가 있는데, 이들을 "군기사경(軍機四卿)"이라고 불렀고, 졸지에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그러나, 서로다른 제도관념과 문화배경은 광서와 메이지의 서로 다른 지식구조와 치국안목을 지니게 만들었다. 봉건문화의 토양위에서 광서는 비록 서방의 과학기술의 겉모습은 배웠지만, 근대문명의 정수는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들고 날아오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광서는 청나라의 역대황제와 마찬가지로, 뼛속까지 숭상한 것은 여전히 유학이었다. 주자의 도리를 무소불능의 '성현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중국과 서양의 학문에 모두 흥미를 나타냈지만, 자금성의 높은 담장은 광서제를 세상과 갈라놓았다. 육경궁의 전통적인 설교는 광서의 두뇌를 굳게 만든다. 덕령(德齡)이 분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광궁안에는 '영원히 총명한 사람은 없다.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들어가서 3,5년만 지나면, 멍청해진다" 그는 피터대제처럼 국외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시야를 넓히고 재주를 갈고닦을 기회가 없었다. 실제생활에서 외국의 장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메이지천황처럼 역사의 짐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제도와 이념의 측면에서 서방문명으로의 개조를 받아들여 자신을 위해 쓰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오랫동안 실제에서 벗어나 있고, 실천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풍운이 급변하고 순식간에 변화하는 시대에 그는 이런 변동의 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초기의 생각에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견해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는 서방학문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표면에 머물렀을 뿐아니라, 복잡하고 첨예한 정치투쟁에서 서태후와의 대결에서 왕왕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근대선진사조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중일양국은 명실상부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벌였다. 1862년, 일본의 유신파인사인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晋作)는 상해에 두달여를 머문다. 그때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그는 크게 감탄한다: "중국인들은 비록 성인의 말을 얘기하지만, 몸은 이미 오랑캐의 노예가 되었다"

 

성격은 운명을 결정한다. 한 사람의 경력은 그 성격을 결정한다. 광서는 17살에 친정을 시작하고, 메이지는 16살에 친정을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소년시절에 등극하여, 학문에 힘쓰고, 원래는 모두 큰 일을 해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양젖을 먹고 자란 광서와 늑대젖을 먹고 자란 메이지는 개인박력에 있어서 천양지차였다. 광서는 서태후의 그늘 아래에서 성장했다. 메이지는 사무라이의 옹립하에 성장했다. 광서는 서태후에 대하여 신처럼 존경하고, 호랑이처럼 두려워했다. 메이지는 무를 숭상하고, 잘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곁에 있는 사무라이인 사부들을 존경했다. 광서제는 오랫동안 서태후의 냉혹한 위세아래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유약하고 동요하고, 괴이하고 자기마음대로 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메이지는 사무라이들의 세심한 보살핌아래 과감하고 무를 숭상하고 강렬한 무사도를 정신을 지닌 천황으로 자란다. 서로 다른 성격은 그들이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는 복선이 된다.

 

친정후의 광서제는 국가의 변화를 보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뭔가를 이뤄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서태후의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고, 날카로운 훈계를 들으면서 일찌감치 지고무상한 황제의 천하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존엄과 군림천하의 패기를 상실한다. 오랫동안 길러진 유약한 성격은 광서제로 하여금 사건에 부닥치면 움츠려들게 만들었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친히 대권을 장악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양계초. <<무술변법기>>) 근본적으로 서태후와 대항할 담력이나 실력이 없었다. 일본의 유명한 유신삼걸중 하나이자, 사무라이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메이지의 스승을 맡은 이후, 궁정은 연무장으로 바뀐다. 그는 군사화된 훈련을 받았고, 검술, 마술, 각투술을 모두 메이지에게 전수한다. "강건기체백, 야만기정신(强健其體魄, 野蠻其精神)"을 추구한다. 몸에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있으면, 살심이 일기 마련이다. 20세가 되었을 때, 메이지는 이미 문약한 서생에서 무공을 숭상하고 호승심이 강한 사무라이로 바뀌어 있었다. 영토를 개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짧은 10년만에,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정부를 공고히 한다. 제국은 이빨을 날카롭게 갈고 있었다.

 

역사는 무정하게 증명한다.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전제는 시대가 먼저 영웅을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쇳덩어리처럼 무거운 구전통은 성격이 유약한 광서제로 하여금 성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서태후가 그보다 먼저 죽었더라면, 광서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용상에 올라, 홀로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망하지 않지 않았을까? 중국은 평탄한 대로를 달려갈 수 있었을까? 나중에 손중산이 청나라의 어지러운 판을 물려받았는데, 결국 중국의 현대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저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계속 노력하라"는 무거운 유언을 남겼을 뿐이다. 이것을 보면 중국의 현대화는 한 사람 혹은 한 세대의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청제국은 일찌감치 구멍난 배이고, 깨진 주전자이다. 안에서 밖까지 모조리 썩었다. 광서제에게 삼두육비가 있더라도 구멍이 숭숭한 의복의 구멍 몇 개를 메울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메이지처럼 새로 기반을 마련하고, 자신의 한 팔로 하늘을 떠받치는 기백과 능력이 없었다면.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