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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영대수도(瀛臺囚徒): 개혁황제 광서제의 비극

by 중은우시 2014. 11. 20.

글: 장효파(張曉波)

 

 

 

 

1908년, 무신년(戊申年), 청광서34년. 불안했던 청나라 역사에서 1908년은 아주 두드러진 해이다. 8년전에는 전체 화북을 뒤흔들었던 의화단의 난과 8국연합군의 중국침략이 있었고, 3년후에는 천번지복할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반드시 언급해야할 일은 이 해의 11월 13일과 14일, 제국의 상징적인 주재자 광서제와 실질적인 지배자 서태후가 연이어 사망한 것이다. 시간은 24시간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전에 무술정변으로 광서제는 영대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군주였지만, 실제로는 죄수였다. 광서제의 죽음은 역사의 일대 의안(疑案)이다. 백년동안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몇년전, 과학자들은 광서제의 두발을 연구하여 광서제가 독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백년공안은 마침표를 찍는다. 각종 흔적을 보면, 광서제를 독살한 막후의 인물로 관계를 벗어나기 힘든 사람은 서태후일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가장 많이 의심을 받는 인물이다.

 

군주제 제국의 운명은 현대정치국가와는 다르다. 최고의 정치권위(군주 혹은 참주)의 신체상황, 권력승계는 심각한 관련이 있다. 1908년, 청제국의 운명은 3살짜리 어린 황제 부의와 평범한 섭정왕 재풍 그리고 구중궁궐에 깊이 틀어박혀 있던 융유황후에게 맡겨진다. 섭정왕 재풍에게 남겨진 청제국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더더구나 권위있는 인물이 사망하면서 그는 정치적인 통합능력이 부족했다. 정치을 적 통합능력이 부족하여, 재풍의 인재기용이나 시정은 그저 황족들에 국한되었고 개혁은 마침내 황족소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가 되어 버린다. 마침내 그후의 3년동안 전체 한족개혁파들을 혁명당의 편으로 몰아버리게 된다.

 

청제국의 말기에서 최대의 명제는 개혁이었다. 개혁은 상층의 컨센서스를 이루었따. 다만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서로 견해가 달랐다. 어떻게 개혁을 추진할 것인지의 명제를 놓고, 광서제와 서태후는 커다란 편차가 있었다. 결국 광서제가 영대에 갇히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1898년, 서태후의 의지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단어는 바로 "조종지법(祖宗之法)은 망가뜨릴 수 없다"

 

무엇이 '조종지법'인가? 간단히 말해서, 바로 조종(祖宗)이 정해준 법이다. 청실은 삼조일종(三祖一宗)이 있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친히 정한 정치제도는 팔왕의정(八王議政)이다; 홍타이시(청태종)에 이르러서는 남면칭고(南面稱孤)한다; 입관(入關)이후, 군주(순치제)의 나이가 어려서, 도르곤이 '황부섭정왕'이 된다; 순치제가 죽고, 4보신이 정무를 본다. 실제로, 청나라의 정치제도가 최종적으로 형태를 갖춘 것은 강희제의 손에서이다. 강희제는 오배를 주살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 건강독단(乾綱獨斷)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종지법"은 계속 변화했다. 강희제는 원래 적장자계승제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두번에 걸쳐 태자를 폐위시키면서, 옹정제가 신비롭게 황제위에 오른다. 그후에는 비밀건저제(秘密建儲制)를 취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청나라때의 '조정지법'은 변화무상하였다. 다만 후궁이 정사에 관여할 수 없게 하고, 태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할 수 없게 한 것은 청나라의 조훈(祖訓)으로 시종 바뀌지 않는다. 이를 보면, 바로 말끝마다 '조종지법은 망가뜨릴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서태후가 '조종지법'을 망가뜨린 것이다.

 

1861년, 기상정변(祺祥政變)으로 서태후가 권력을 잡는다. 이는 황족근지(近支)가 대신세력에 대항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황족근지의 권력타협의 산물이다. 공친왕은 원래 도르곤을 본떠서 섭정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여론의 압력에 결국 정변후에 총리왕대신의 직위로 물러앉는다. 양궁이 수렴청정하는데, 이는 원래 합법성이 없다. 다만 '주소국이(主少國移)', '일후환정(日後還政)'으로서 미봉책으로 받아들인 정치적 안배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동치제가 18세때 기녀를 찾다가 매독에 걸려 목숨을 잃는다. 친정을 하기 2년전에 죽어버린 것이다. 이때 동태후는 이미 죽었고, 양궁중에서 단지 일궁 즉 서태후만이 남아 있었다. 서태후의 세력이 중추를 독단한다. 4살짜리 광서제가 대통을 승계한다. 이 조치는 중국전통 참주정치의 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를 보면, 소위 '조종지법'은 그저 겉으로 내거는 말에 불과하다. 실질은 권력투쟁이다.

 

'무술변법'으로 광서제는 '조종지법'을 '근대신법'으로 바꾸고자 했다. 다만 소위 변법은 청실통치의 근본적인 문제 즉 군주전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무술변법'의 조항은 이미 모조리 교육, 공업, 우전, 철로에 집중되어 있었고, 강량(강유위,양계초)는 '군주입헌'을 할 용기와 담량이 아예 없었다. 다만 모든 개혁과 마찬가지로, 변법은 인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사문제는 바로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칼이다. 서태후은 원래 광서제의 변법을 지지했다. 다만 일부 급진적인 조치에 대하여는 그녀는 의지를 내려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고 하여 막지는 않았다. 진정 서태후가 두려움을 느낀 것은 광서제가 인사문제에서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서태후가 수십년간 길러놓은 심복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인사변혁은 바로 서태후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서태후가 신정을 폐할 때의 구호는 여전히 '조종지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무술정변의 풍운인물인 남해성인 강유위를 얘기해보자. 강유위의 호는 장소(長素, 장소라는 것은 소왕(素王) 공자보다 낫다거나, 소왕을 수정한다는 뜻이다. 이 호 자체만 보더라도 그는 유가윤리가 중심인 사회에서 참월범상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이고 일생동안 제왕의 스승으로 자부했다. 남해성인 강유위는 평생 서태후와 혁명당을 미워했고, 해외로 망명할 때 자주 '위의대도(僞衣帶詔)'를 내세워 스자긍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재물을 모았다.

 

대체로 말해서, 가짜성인 강유위는 무술년이후 대부분은 자아상상과 자편역사(自編歷史) 속에서 살았다. 무술년의 사실은 광서제가 근본적으로 강유위를 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예 강량유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진정 변법을 추진한 사람은 장지동(張之洞), 진보잠(陳寶箴)등 권력을 장악했던 봉강대리들이었다. 몇몇 새로 박탁되어 실제 실무를 담당한 군기처장경이 있고, 막후에서 이들을 받쳐준 것은 외성의 고관들이었다. 겨우 담사동(譚嗣同) 정도는 억지로 강유위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무술변법'에서 강유위는 육품의 하급관리였고, 직접 글을 권력자에게 올릴 권한조차 없었다. 황제에게 글을 올리려면 다른 사람을 거쳐야 했는데, 무슨 변법을 주재한단 말인가? 후세의 역사학자들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소위 '공거상서(公車上書)'도 강유위가 크게 과장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연급할 점은 변볍자의 변법이유와 서태후의 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모두 '조종지법'이라는 것이다. 강유위의 변법은 공자개제(孔子改制)를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고문경학대사인 전목(錢穆)은 <공자개제고>는 '그저 신문지 선전 공능밖에 없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보수파이건 유신파이건 '조종지법'은 모두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다.

 

서태후가 나라를 망친 것은 맞다. 그러나 강량(강유위 양계초)의 한마디가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것도 진실이 될 수 없다. 청나라말기의 문제는 그 실질을 따져보면, '조종대법으로 예약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대청제국이라는 낡은 전차가 날카로운 서양의 대포를 맞이하여 버티지 못하게 되자, 서양에서 무기를 구매하여 강해지고자 했다. 중국은 활실개인재산을 가짜군주입헌이라는 명목으로 남겨두고자 했다. 병이 급해지자 아무 의사나 찾은 꼴이고, 결국 엉터리없는 조치만 취하다가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다.  

 

1908년 11월 13일과 14일, 광서제와 서태후가 선후로 사망한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에서 이 뉴스를 평론하면서 중국인의 관념을 소개한다: "청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사람들이 지금 발생하는 일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흔적은 거의 없다. 황제가 죽었다는 것과 황태후가 짧은 기간내에 죽었다는 일은 청나라사람들에게 있어서 거의 영향이 없는 것같다." 이 평론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갑오전쟁(청일전쟁), 무술정변, 의화단의 난, 팔국연합군의 북경점령, 황제의 죽음을 겪으면서 희한할 일이 더 없다. 암살의 스캔들도 민국연간에 야사에서 청나라조정의 부패를 조롱하던 거리였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Telegraaf> 중국주재기자인 Henri Borel은 서태후의 장례식에 참가한 후, 이렇게 평가한다: "서태후는 신성하고 오래된 이념의 마지막 대표이다...또 다른 새로운 여명이 이미 미래세계의 일부분이 된 기묘한 왕국에 강림할 때, 이상의 이념은 이미 그녀와 함께 죽어버렸다."

 

확실히, '조종지법'은 풍촉잔년(風燭殘年)의 서태후와 마찬가지로, 난제를 견뎌내지 못하고 신해혁명으로 죽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