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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의 연금생활은 어떠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6. 10.

글: 낙방거사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유지를 반포하여, 광서제는 질병으로 조정업무를 처리할 수 없어, 서태후가 다시 "훈정"을 한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이번 "훈정"은 이전의 "수렴청정"과는 달랐다. 직접 황제와 나란히 앉아서 신하들을 마주하고 업무를 듣는 것이다. 이때의 그녀는 완전히 조정대권을 독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하들이 아뢸 때, 광서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서태후가 말을 해도 된다고 할 때만 억지로 몇 마디 말을 하곤 했다. 그 어떤 자신의 의견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이후, 광서제는 진정한 허수아비황제, 죄수황제가 된다. 매번 조회가 끝나면, 광서제는 영대로 돌아가서, 이 '수뢰'에 구금된다. 시위들이 가까이에서 감시하고 있는 상태하에서 구금된 생활을 보내야했던 것이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구금시키는 장소를 고르는데 있어서 여러가지를 고려했다. 청나라역사상 황제를 연금시키기 위한 곳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이전에 '냉궁'은 있었지만, 그것은 비빈과 황자를 가두어두는 곳이었다. 광서제는 재위하고 있는 일국의 황제이므로, 그의 신분에 맞는 장소를 골라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신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서원 남해에 있는 영대가 이상적인 장소로 선정된다.

 

영대는 남대라고도 부른다. 명나라때 건축되었다. 청나라 순치제, 강희제때 두 번에 걸쳐 중수되었다. 이곳은 제왕 후비가 정무를 보고 피서를 하고 거주하던 곳이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있고, 정대누각으로 가득 차있어, 마치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사는 섬과 같다. 그래서 영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청나라 순치, 강희제때부터, 각 황제들은 모두 이곳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영대는 호수의 경치와 산의 경치가 있어 풍광이 수려했다. 정대누각의 유리기와는 푸른 나무와 짙은 그늘에 비추어진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봉래선산에 와 있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매년 황제가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면, 행사를 마친 후 영대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상원가절에 황족은 영대로 와서 연화(폭죽)를 구경한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모두 이 곳에서 연회를 베푼 바 있다.

 

광서제가 유폐된 세월은 처량했고, 무료했다. 무술정변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광서제를 모신 바 있는 태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변방의 군대로 보내버렸다. 총관태감 이연영이 친히 20명의 태감을 뽑아서 광서제를 모신다. 이들은 겉으로는 광서제를 모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광서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서태후에게 보고되었다. 나중에는 관리감독에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서태후는 영대와 호숫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판교를 철거시키고, 매일 새벽 황제가 서태후와 함께 조회에 나갈 때만 새로 연결시키곤 했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해의 겨울, 북경의 날씨가 아주 추웠다. 남해의 수면에 얼음이 얼었다. 하루는 광서제가 미복을 입고 얼음 위를 걸어갔는데, 얼마 걷지 않아서 태감 최옥귀등에게 발견된다. 그들은 급히 황제를 끌고 전각으로 되돌아간다. 서태후는 이 일을 들은 후, 사람을 시켜 수면의 얼음을 깨버리게 한다. 광서제가 수면이 언 틈을 타서 도주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광서제를 모시고 남해를 걸어간 여섯 명의 태감은 모조리 곤장을 쳐서 죽여버린다. 그후, 광서제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영대의 주변에서는 매일 쉬지않고 얼음을 깨야만 했다.

 

함원전의 창호지가 뚫어졌지만, 아무도 이를 막지 않았다. 광서제는 차가운 바람에 온 몸을 떨었다. 그는 내무부의 대신을 불렀고, 대신은 그 모습을 보고 급히 사죄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창호지를 발랐다. 서태후가 이 일을 들은 후, 다음 날 내무부 대신을 불러서 상을 내린다. 모든 대신들에게 하포를 내렸다. 그러나 광서제를 위하여 창호지를 바른 그 대신이 상을 받으러 나가자 서태후는 그에게 강아지를 한 마리 내린다. 모욕을 당한 그 대신은 그래도 할 수 없이 강아지를 향하여 절을 하고 성은에 감사해야했다. 그때부터 내무부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황제의 생활에 관심두지 않았다. 가련한 광서제는 정치권력을 빼앗겼을 뿐아니라,  인신의 자유마저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한헌제보다 못하다고 자조했다.

 

영대의 생활은 재미없었다. 매일 조회가 끝나면, 광서제는 영대의 건물로 돌아와서 있어야 했다. 그는 매링 식사하고, 독서하고, 잠을 자는 것밖에 할 것이 없었다. 무료한 때면 종이를 가져가다 거북이를 그리고, 거북이의 등에는 원세개의 이름을 쓰곤 했다. 그 후에 종이를 함원전의 벽에 붙여놓고 과녁으로 삼는다. 죽첨을 던져서 맞히고,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면, 뜯어내어 갈기갈기 찢어서 공중에 던진다. 그후 십여년의 유금생활에서, 광서제는 시종 유신당을 팔아먹고 중용된 원세개를 저주했다.

 

할 일이 없을 때에는 그냥 함원전에서 글을 읽었다. 유금된 10년간 그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이를 가지고 소일했다. 광서29년(1903년), 서태후는 청나라정부의 주프랑스,주미국등 공사인 유경의 딸 덕령을 입궁시킨다. 덕령은 서태후의 곁에서 여관을 지냈을 뿐아니라, 매일 광서제에게 1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다. 어떤 때는 광서제와 함께 서양댄스를 추기도 했다. 덕령은 궁안에서 서태후를 2년간 모시는데 이 기간동안 덕령과 광서제는 스승제자이며 친구관계가 된다. 광서제의 유금기간동안 약간의 즐거움과 따스함을 느끼게 해준 것이 그녀였다. 나중에 덕령은 그녀가 청나라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을 영문으로 써서 <청궁이년기>, <영대읍혈기>, <어향표묘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