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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27

우계마후(牛繼馬後): 사마예(司馬睿)는 우예(牛睿)였을까? 글: 사해심진(史海尋珍) 서진(西晋)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들간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역사에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고 부른다. 거듭되는 혼전속에 동한말기이래 원래 심각하게 손상입은 국력이 더욱 소모된다. 북방이 머물던 유목민족은 그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고자 한다. 사마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의 보호하에, 남방의 건업(建鄴, 지금의 남경)으로 내려가 동진(東晋)을 세운다. 다만, 사마예의 즉위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바로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후손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소문은 "우계마후(牛繼馬後)"로 불린다. 그렇다면, "우계마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서 전파된 것일까? 우리는 먼저 시간을 삼국시대 후기로.. 2022. 10. 6.
추잉(褚英): 누르하치 장남의 수수께끼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아르하투투먼패륵(阿爾哈圖圖門貝勒)은 누르하치의 장남 추잉(褚英)이다. 추잉은 누르하치의 첫번째 대푸진(大福金, 푸진은 만주어로 부인이라는 뜻임)인 퉁자씨(佟佳氏) 소생으로, 만력8년(1580년)에 태어났다. 이때 그의 부친 누르하치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추잉은 용맹하고 지모가 뛰어나서, 전투에 능했고, 전공을 여러번 세운다. 만력26년(1598년) 정월, 누르하치는 막내동생 바야라(巴雅喇), 추잉과 가가이(噶蓋), 페이잉동(費英東)에게 1천의 병사를 이끌고, 동해여진(東海女眞) 안추라쿠루(安楚拉庫路)를 정벌하게 한다. 추잉의 공적 이때 추잉의 나이는 겨우 17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힘든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밤을 세워 달려가서" "둔채(屯寨) 20곳"을 취했다. 그러자, 나.. 2022. 10. 5.
아난다(阿難答): 중국역사상 유일한 무슬림황제가 될 뻔한 인물. 글: 자귤(紫橘) 이슬람교는 중국의 중요종교중 하나이다. 회족은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이슬람교는 오늘날 서북지구에서 극히 번성하고 있지만, 원나라이전에 서북은 실제로 '천리불국(千里佛國)'으로 칭해질 정도로 불교가 전파되는 중요한 교량이었다. 왜 불교가 서북에서 쇠퇴하고, 왜 이슬람교가 서북에서 크게 흥성하게 되었을까? 관건적인 인물은 몽골의 귀족인 아난다(阿難答)이다. 역사상 중국황제는 한족황제이건 소수민족황제이건, 대다수가 불교 혹은 도교를 신봉했다. 특히 몽골인은 불교를 가장 독실하게 믿었다. 다만 아난다는 몽골귀족중의 특이한 사례이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었고, 서북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한 중요인물이다. 그리고 하마터면 중국역사상 유일한 무슬림황제가 될 뻔했었다. 1. 천리불국에서 이슬람교로. 지리.. 2022. 9. 19.
왕자오궈(王兆國)와 후진타오(胡錦濤): 일마당선(一馬當先)과 후래거상(後來居上) 글: 고벌림(高伐林) 한 친구가 지난 기의 을 본 후에 댓글을 남겼다. 기억하기로 중공12대에서 중점배양하기로 선발된 사람은 왕자오궈이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모두 그의 밑에서 일했었다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 2002년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후계자로 올랐지만, 근 30년전에 왕자오궈는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겸 공청단중앙제1서기였으며, 원자바오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이었고, 후진타오는 공청단중앙 상무서기였다. 이들 둘은 모두 왕자오궈의 부하였다. 이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왕자오궈는 후진타오보다 공청단중앙에 3개월가량 먼저 왔다. 1982년 한영(韓英)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등소평이 1980년 7월, 후베이 스얜시(十堰市)의 제2자동차제조공장(二汽)을 시찰할 때 발견했다. 당시 얼치.. 2022. 9. 13.
"문혁(文革)"의 진상을 가장 먼저 통찰한 사람들.... 글: 부국용(傅國涌) 56년전인 1966년, 중남해에서 일어난 태풍이 밀려올 때, 일시에 파도가 하늘에 닿고, 음습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많은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중공고관들이나 전공이 혁혁한 대장, 원훈(元勳)들, 그리고 한 지방을 다스리는 봉강대리(封疆大吏)들까지도 이때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고, 그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운명의 처분을 기다렸다. 유소기(劉少奇) 마저도 단지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는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문혁발생초기, 많은 권력무대에서 부침을 거듭한 고관들은 거의 모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앞장서서 이 전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동란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 2022. 9. 7.
"고요반당연맹(高饒反黨聯盟)"중 고강(高崗) 자살의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8월 17일, 당시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사위부주석, 국가계획위원회주석 고강(高崗)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 향년 49세이다. 고강은 중공건정후 부국급(副國級) 고관으로 자살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고강은 왜 자살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중공에 큰 공을 세웠다: 드는 중공 섬북(陝北)근거지의 창업자중 한명이고, 모택동등이 강서에서 '장정'을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섬북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다; 국공내전기간동안 그는 동북으로 파견되어 동북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되고, 가장 '선진'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1950년,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그가 이끄는 동북은 가장 중요한 군수기지가 된다; 1952년.. 2022. 9. 6.
관로(關露): 43년간의 매국노 오명을 벗은 후 자살한 여시인 글: 제맥청청(薺麥靑靑) 1982년 3월 23일 베이징 차오네이대가(朝內大街) 203호 10평방미터가량의 한 작은 집에서, 중공중앙조직부는 정식으로 병상의 노인에게 결정문을 읽어주었다: "관로(關露)의 역사문제는 이미 조사확인되었다. 매국노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관로 동지에게 억지로 붙여진 일체의 모멸적이고 사실이 아닌 말들을 취소한다." 마침내 오명을 씻은 노인의 혼탁한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역사의 잘못된 평가로 그녀는 일찌기 공인된 '매국노'였다. 43년간 죄인으로 살아가면서 공정한 판결을 기다렸다. 명예가 회복되는 날, 관로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이 날을 그녀는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늙고 심신이 모두 병들 때까지. 7개월후, 관로는 회고록을 완성하고 또한 그녀의 옛 상사인 .. 2022. 8. 31.
홍천귀복(洪天貴福): 태평천국의 유천왕(幼天王) 글: 만두설(饅頭說) 1 1864년 7월 19일 새벽, 홍천귀복은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는 꿈속에서 청군 관병이 천경성(天京城, 태평천국의 도성, 현재의 남경)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벌떼처럼 성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꿈은 정오가 되자 사실로 확인된다. 천경성을 2년여 포위하고 있던 상군(湘軍)이 이날 총공격을 실시하여, 일거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밀물처렴 성안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일찌기 굶어서 사람행색이 아니던 태평군은 곳곳에서 반격을 가했지만, 적군은 실로 너무 많았다. 여러 성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홍천귀복은 궁루(宮樓)에서 이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네 명의 처가 그를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 그는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말.. 2022. 8. 23.
호해(胡亥)즉위문제: <사기>와 출토자료중 어느 것이 사실일까? 글: 난가인(爛柯人) 호해즉위건은 이천년동안 안개 속에 쌓여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했다고 보지만, 새로 출토된 자료는 그가 합법적으로 즉위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설중 어느 것이 정확할까? 두 가지 설이 나오게 된 배후에는 어떤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일까? 1. 의 출토와 획기적 발견 2003년, 북경대학은 죽간(竹簡)을 기증받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였다. 는 이 책의 첫부분 "석자진왕조정출유천하(昔者秦王趙精出遊天下)"에서 나온 것이다. 진, 한 이전의 서적에는 이름을 지은 경우가 드물어, 서적의 첫마디를 가지고 명명하는 것이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조정은 바로 진시황이다. 진시황의 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진(秦), 조(趙)의 조상은 뿌리가 같아 모두 .. 2022. 8. 17.
손권(孫權) 말년의 태자쟁탈전 글: 고소소고사(搞笑小故事) 중국고대의 강력한 제왕에게는 자주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전명후암(前明後暗). 전반기에는 제왕이 여러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큰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도 있으면서, 심혈을 기울여 통치하지만, 후반기에 이르러, 한쪽 말만 듣고, 간신을 총애하며, 후계자다툼이 치열해지게 된다. 한무제, 당현종, 주원장, 강희제에게서 모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제왕은 바로 삼국의 삼대군주중 하나인 손권이다. 손권의 성취에 관하여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는 등극초기 웅주의 모습을 보였다. 유비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조조를 격패시켰다. 그후 오나라의 경제발전과 영토확장에 전력을 다했다.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고 전성기를 이룬 후, 손권은 형주를 기습하고 관우를 잡아 죽여, .. 2022.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