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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93

천민얼(陳敏爾): 후계자의 비극적 운명 글: 채신곤(蔡愼坤) 천민얼이 주변으로 밀려난 것(텐진시위서기)으로부터 후계자의 암담한 최후를 살펴보기로 한다. 후계자가 필요없는 시대에 중국정권의 후계자들은 최후가 좋지 못했다. 모택동시대에, 유소기, 임표, 왕홍문이 모두 참혹하게 죽지 않았던가! 시진핑시대에는 반부패를 명목으로 쑨정차이(孫政才)를 정리했고, 59세의 후춘화(胡春華)는 정협이라는 양로원에 일찌감치 들어가 버렸다. '지강신군(之江新軍)의 강력한 간장(干將)이던 천민얼까지 주변으로 밀려나 버렸다. 2015년 천민얼이 구이저우(貴州)성위서기를 맡았을 때, 외부에서는 천민얼이 시진핑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보았다. 그때는 정국의 향방이 불명확했고, 왕치산(王岐山)이 주도하는 반부패가 전력을 다하여 장쩌민, 후진타오의 사람들을 처벌하고 있었다... 2023. 6. 25.
진혜민(陳惠敏): 모택동 애인의 특이한 인생 글: 장박(張朴) 만일 2020년 4월에 쓴 이 나의 연상과 충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진혜민과 모택동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완성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 진혜민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1999년이다. 하루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나에게 진혜민을 만나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모택동의 애인이다." 친구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너의 누나가 분명 흥미를 느낄 것이다" 이때의 장융(張戎)은 그녀의 또 다른 거작 를 쓰고 있었고, 나는 막 을 읽은 때였다. 이지수는 서문에서 네 글자로 모택동의 사생활을 형용했다: "해인청문(駭人聽聞)"(들으면 깜짝 놀랄 일). 책에서는 심지어 모택동의 여자친구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대체로 그녀들의 이름은 숨겼지만. 설마 진혜민도 그 중의 .. 2023. 5. 20.
유경당(劉慶棠)이 본 "사인방(四人幇)" 유경당(劉慶棠) 구술 진도수(陳徒手) 정리 유경당이라는 '발레왕자'는 문혁때 관직이 문화부 부부장, 중공10대 주석단성원, 제4기 전인대 주석단성원에 이른다. 1976년, '사인방'이 타도된 후 즉시 격리조사를 받았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문화부 부부장으로 있던 유경당은 사인방과 밀접하게 접촉했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상사와 부하관계, 동료관계, 친구관계이므로 피차간에 애증이 교차할 것이므로 어느 정도 편향될 수는 있고 완전히 객관적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가 사인방을 이해하는데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인식과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1. 요문원(姚文元): 산양처럼 수염을 길렀다. 유경당의 인상 속에서 요문원.. 2023. 3. 2.
"신삼계(新三屆)": 중국특색의 77-79학번 대학입학생 글: 사성우(謝盛友) "신삼계(신싼제)"는 문혁이 끝나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이후의 77,78,79학번 대학생을 가리킨다. 문혁기간의 노삼계(老三屆)와 구분하기 위하여 대학입시회복후의 3년간 학번의 대학생을 "신삼계"라고 부른다. 신삼계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1979년의 고중졸업생으로 1963년생이다. 이 3년간의 입학생의 연령은 1947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16년에 걸쳐 있다.(일부 대학교에 입학한 대학생들 중에는 보기 드물게 1946년생도 포함되어 있다) 신삼계내에서도 차이가 적지 않다. 77학번은 거의 당년 고중졸업생이 없었고, 78학번중에는 당년고중졸업생이 약간 있었으며, 79학번에는 당년 고중졸업생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량이 당년 고중졸업생이 들어왔기 때문에, 79학번은 77.. 2022. 11. 2.
왕자오궈(王兆國)와 후진타오(胡錦濤): 일마당선(一馬當先)과 후래거상(後來居上) 글: 고벌림(高伐林) 한 친구가 지난 기의 을 본 후에 댓글을 남겼다. 기억하기로 중공12대에서 중점배양하기로 선발된 사람은 왕자오궈이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모두 그의 밑에서 일했었다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 2002년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후계자로 올랐지만, 근 30년전에 왕자오궈는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겸 공청단중앙제1서기였으며, 원자바오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이었고, 후진타오는 공청단중앙 상무서기였다. 이들 둘은 모두 왕자오궈의 부하였다. 이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왕자오궈는 후진타오보다 공청단중앙에 3개월가량 먼저 왔다. 1982년 한영(韓英)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등소평이 1980년 7월, 후베이 스얜시(十堰市)의 제2자동차제조공장(二汽)을 시찰할 때 발견했다. 당시 얼치.. 2022. 9. 13.
"문혁(文革)"의 진상을 가장 먼저 통찰한 사람들.... 글: 부국용(傅國涌) 56년전인 1966년, 중남해에서 일어난 태풍이 밀려올 때, 일시에 파도가 하늘에 닿고, 음습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많은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중공고관들이나 전공이 혁혁한 대장, 원훈(元勳)들, 그리고 한 지방을 다스리는 봉강대리(封疆大吏)들까지도 이때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고, 그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운명의 처분을 기다렸다. 유소기(劉少奇) 마저도 단지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는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문혁발생초기, 많은 권력무대에서 부침을 거듭한 고관들은 거의 모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앞장서서 이 전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동란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 2022.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