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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83

자오러지(趙樂際): 처지가 위험해지고 있는가? 글: 이운(李韻)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자오러지의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다. 동생 자오러친(趙樂秦)은 최근 꾸이린(桂林)시위서기에서 물러났고, 그가 적극적으로 발탁한 "가장 아름다운 여서기"로 불리던 자오리(趙麗)도 낙마했다. 또한 자오러지의 옛부하이자 사법부 정치부주임인 펑리쥔(馮力軍)은 투신자살했다. 2월 9일, 광시일보 웨이신계정에는 이런 소식이 실렸다: 광시자치구당위는 저우자빈을 꾸이린시위서기, 상위, 서기로 임명하고, 자오러친은 더 이상 중공꾸이린시위서기, 상위, 위원직무를 맡지 않는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자오러친은 1960년 1월생으로 샨시 시안 사람이다. 2007년전에는 샨시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고, 관직은 한중(漢中)시위부서기, 시장에 이르렀다. 2007년 자오러지가 샨시성위서기를 맡으면서.. 2021. 2. 13.
1980년 왕동흥(汪東興)과 함께 정계를 떠난 4명의 풍운인물의 최후는...? 글: 무한적야사(無限的野史) 천명에 이르는 개국소장(開國少將) 중에서 왕동흥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17살때 홍군에 들어가서, 장정,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치면서 여러번 구사일생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동흥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전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았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왕동흥은 계속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고, 중앙경위단(中央警衛團)을 장악한다. 그는 일을 열심히 했고, 여러번 특수한 임무도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리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건국후, 왕동흥은 소장의 계급을 받았으며, 관료로서의 승진도 순조로웠다. 말년에는 정치국에 들어가, 상임위원에 당선되어 일약 당내서열5위의 풍운인물이 .. 2021. 2. 12.
예젠잉(葉劍英)가족: 성극이쇠(盛極而衰) 글: 장걸(張杰) 예젠잉가족은 홍콩, 시진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세기말, 예씨일가는 남월(南越)을 웅패한다. 홍콩, 마카오의 여러 홍색자본가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광동에 투자하게 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여러 대형 SOC공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중공을 위하여 홍콩, 마카오의 부호자본가들과의 통전네트워크도 구축한다. 마카오의 카지노왕 스탠리 호(何鴻燊)가족, 헨리 폭(霍英東)가족, 리카싱(李嘉誠)가족은 모두 예씨일가와 빈번하게 내왕했다. 광동현지의 본토세력은 주로 객가(客家), 조산(潮汕), 광부(廣府)의 3대세력으로 나뉘는데, 그중 예씨일가를 대표로 하는 "객가방"의 세력이 가장 컸다. 예씨일가는 시진핑일가와의 관계도 밀접하다. 개혁개방초기, 예젠잉은 시중쉰이 광동의 정무를 담당한 최선의 후보라고.. 2020. 10. 26.
오함(吳晗): 한 역사학자의 비극 글: 왕우군(王友群) 오함은 에 이렇게 썼다: "그물이 다 펼쳐졌다. 포위망은 점점 줄어들었다. 창응(蒼鷹)은 하늘을 맴돌고, 사냥개(獵犬)는 땅위에서 추격한다. 호각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가 들리고, 매를 부르고 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그물에 걸려든 문인(文人)들은 하나하나 목이 잘리고, 가슴이 깨져 핏물 속에서 신음한다." 이 내용은 1949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문인들을 대하는 생생한 모습이기도 하다. 오함은 스승을 버리고 중공에 투신한다. 오함은 절강 금화 의오(義烏) 사람이다. 1928년 가을, 상해중국공학(上海中國公學)에 입학하여 호적(胡適)의 제자가 된다. 얼마 후, 호적은 상해를 떠나 북경대학 교장이 된다. 오함도 그를 따라 북상한다. 그러나 북경대학에는 불합격하고, 청화대.. 2020. 10. 17.
그녀는 문혁때 모욕을 참지 못하고 강물이 투신한다. 그의 아들이 종남산(鍾南山)이다. 글: 이대야(二大爺) 1. 1957년 9월 21일, 당산철도학원 '마르크스레닌부'의 역사 강사인 '우파'로 낙인찍힌 호사두(胡思杜)는 '자살'한다. 그는 당형인 호사맹(胡思孟)에게 유서를 남긴다: "현재 나는 가족이 없습니다. 오직 형뿐입니다. 제가 남긴 600위안이 돈은..... 형님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해서 사회주의를 위해 공을 세우기 바랍니다." 1948년 12월, 북평(북경)은 이미 포위되었다. 당시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던 호사두는 부모와 함께 타이완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북평에 남기를 고집했다. 그는 "내가 무슨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 후의 운동에서, 가정배경이 부담을 가진 호사두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적극.. 2020. 10. 16.
해군부사령관 도용(陶勇) '투정자살(投井自殺)'의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중공 원수 진의(陳毅)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나는 도용이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중공 대장 속유(粟裕)는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살아 있을 때 도용이 살해당한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라고. 진의와 속유는 모두 도용의 옛 상사들이다. 도용 "투정자살" 1967년 1월 21일, 당시 남경군구 부사령원, 해군 부사령원, 동해함대 사령원으로 있던 중장 도용은 '투정자살'한다. 장소는 상해시 동해함대 제4초대소 후화원의 우물 안이다. 그날 오전 도용은 상해경비구사령원 요정국(廖政國)과 함께 타도당한 전 상해시위제1서기 진비현(陳丕顯)을 구해내는 일을 얘기했다. 정오에 도용은 요정국과 함께 식사를 하고, 마오타이주도 .. 2020. 10. 14.
홍얼다이(紅二代) 류허(劉鶴)의 집안내력은....? 글: 봉황인문역사(鳳凰人文歷史) 1967년 9월 14일, 쓰촨 청두의 조반파, 홍위병은 50만명을 조직하여, 지금의 텐푸광장(天府廣場)에서 문혁중 쓰촨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비투회(批鬪會)를 개최한다. 이번의 비투대상은 쓰촨의 지도자들이다. '반혁명수정주의분자 리징췐(李井泉) 및 한줌의 동료들"이다. 흑패(黑牌)를 목에 걸고, 좌분기식(坐噴氣式, 목에 흑패를 걸고 몸을 90도로 굽히는 동작을 하게 하는 것)외에 비투당하는 사람은 청두시의 주요 길거리로 끌려다녔다. 서남국 서기 겸 조직부장이었던 류즈얜(劉植巖)도 비투당한 10명 중 한 명이었다. 3개월후, 그는 갇혀있던 청두 진장(錦江)호텔 9층에서 투신자살한다. 나이 49세때였다. 류즈얜의 아들이 바로 부총리 류허이다. 1. 광서14년 사월 이십사일, .. 2020. 9. 17.
위마오춘(余茂春, Miles Yu): 미국의 대중강경책의 배후인물 글: 포발(鮑渤) 난카이대학(南開大學) 역사학과 1983년 졸업단체사진의 마지막줄 왼쪽에서 첫번째 자리에 안경을 쓰고 서 있는 남학생은 겉으로 보기에 약간 어색하고 딱딱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바로 이 졸업사진의 귀퉁이에 서 있든 눈길을 끌지 않던 인물이 지금 미국의 대중정책의 대전환을 이루는 막후인물이 될 줄은. 위마오춘의 현직은 미국해군학원(United States Naval Academy, USNA)의 교수이다. 국무장관 폼페이오가 가장 의지하는 막료이다. 이 이름없던 중국계 미국인이 돌연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의 신세내력도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위마오춘은 1962년 충칭에서 태어났다. 1979년 그가 17살때, 용촨중학(永川中學, 중국은 중학교를 초중, 고중으로 나.. 2020. 9. 14.
왕치산의 내력: 부친은 국민당 장교였다. 글: 정중원(鄭中原) 이전에 사람들은 모두 왕치산(王岐山)을 중공 태자당에 속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왕치산은 중공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역대이래로 '근정묘홍(根正苗紅)'을 중시하는 중공의 권력귀족층에서 고의로 왕치산의 진정한 출신은 언급하지 않아왔다. 그는 국민당 장교의 아들인 것이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왕치산의 부친 왕더정(王德政)은 1907년생(광서33년)이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왕더정은 청화대학 제5기 졸업생으로 중화민국의 국국 상위(上尉)를 지낸다. 대륙의 위챗 계정 "청화대학토목공정과및건설관리계" 2018년 3월 19일 발표한 "5기선배 왕더정 - 한 보통 청화인의 경력"이라는 글에서 왕더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 2020. 9. 4.
마르크스주의역사학자 전백찬(翦伯贊)은 문혁때 왜 자살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2월 19일 심야, 북풍은 사납게 불고, 차가움은 뼈를 찔렀다. 일찌기 중공에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역사학자"라고 불렸던 전백찬은 처 대숙완(戴淑婉)과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나란히 자신들의 침대에 누워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여 자살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전백찬이 윗옷 오른쪽 주머니에서 종이조각을 발견한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나는 실로 말할 수 없다. 이런 막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 막다른 길로 간 것을 두사부(杜師傅)는 전혀 모른다." 두사부는 전백찬 부부의 감시감독을 책임지고 있던 은퇴노동자이다. 그리고 전백찬의 윗옷 왼쪽 주머니에서는 또 다른 종이조각이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라고 쓰여져 있었다. 전백.. 2020.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