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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자오궈(王兆國)와 후진타오(胡錦濤): 일마당선(一馬當先)과 후래거상(後來居上)

by 중은우시 2022. 9. 13.

글: 고벌림(高伐林)

 

한 친구가 지난 기의 <벌림추문>을 본 후에 댓글을 남겼다. 기억하기로 중공12대에서 중점배양하기로 선발된 사람은 왕자오궈이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모두 그의 밑에서 일했었다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 2002년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후계자로 올랐지만, 근 30년전에 왕자오궈는 중공중앙판공청 주임 겸 공청단중앙제1서기였으며, 원자바오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이었고, 후진타오는 공청단중앙 상무서기였다. 이들 둘은 모두 왕자오궈의 부하였다. 이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왕자오궈는 후진타오보다 공청단중앙에 3개월가량 먼저 왔다. 1982년 한영(韓英)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등소평이 1980년 7월, 후베이 스얜시(十堰市)의 제2자동차제조공장(二汽)을 시찰할 때 발견했다. 당시 얼치(二汽)의 당위서기 황진아(黃振亞)는 1976년 분공장 부공장장(그때는 혁명위원회 부주임이라고 불렀다)인 왕자오궈는 '4인방'의 비등(批鄧, 등소평비판)을 막았다고 소개하며, 후베이성위서기 진비현(陳丕顯)도 왕자오궈는 성의 후비간부(後備幹部)라고 말한다.

 

후진타오와 왕자오궈 두 사람의 관료생애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평보청운(平步靑雲)이다. 다만 왕자오궈는 선성후쇠(先盛後衰)했다: 막 불혹의 나이가 넘었을 때 가장 잘나갔고, 1987년이 되어 돌연 강급되어 중앙지도자에서 지방관료로 내려간다.(이 해에 호요방이 물러난다). 나중에 왕자오궈는 다시 천천히 승진하여, 2002년에 비로소 정치국에 들어간다. 이와 비교하면, 후진타오는 후래거상이다. 1992년 정치국위원은 건너뛰어 바로 정치국상위에 오른다.

 

1980년대초기를 얘기하면, 왕자오궈는 공청단의 1인자이다. 다만 실제로, 단의 간부, 기관간부이건 산하의 성시위 간부이건 모두 후진타오를 '총관(總管)'으로 여긴다. 왕자오궈는 공청단중앙으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83년 봄에 복막염을 앓아 병원에 입원한다. 비록 나중에 병세가 좋아져서 단중앙서기처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중남해로 가서 보고할 때는 여러번 빠졌다. 단중앙서기들과 각 부의 부장들언 수시로 병원으로 가서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야 했다. 다만, 어쨌든 후진타오는 단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각 성시의 하층을 돌아다니며 시찰했다.

 

두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차이가 크다: 왕자오궈는 박력이 넘치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다; 후진타오는 조심스럽고 세심하며, 흐트러짐없이 조리있게 처리한다.

 

후진타오와 왕자오궈는 단중앙서기를 맡은 후, 두 사람이 연이어 각종 관직을 맡게 된다. 비교하자면, 왕자오궈의 직위는 공청단이라는 단일영역을 벗어나, 더욱 넓은 활동공간을 개척한다: 중공정당공작지도위원회 위원, 중일우호21세기위원회 중국측 수석위원, 그리고 '후베이대표'의 신분으로 제6기 전인대에 참석하여 상위로 선출된다...그러나, 후진타오의 직위는 공청단분야내이다: 전국청련주석, 소선대공작위원회 주임...1983년에는 제6기 전국정협 상위에 선임되고, 역시 청년조직대표의 신분으로 한 자리를 맡은 것이다.

 

왕자오궈는 사람을 혼내기를 좋아했다. 일반간부뿐아니라, 일정한 직급의 동료 부하에게도 그는 전혀 거리낌없이 훈계했다. 심지어 다른 부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훈계했다. 이런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기고만장하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1984년, 대일친선을 위해 당중앙은 호요방이 나서서 일본의 3천명 청년을 중국으로 초청하기로 결정한다. 접대의 주요임무는 공청단중앙에게 맡겨진다. 왕자오궈는 이때 잘 나갔다: 그는 5월에 차오스의 뒤를 이어 중앙판공청주임이 되고, 다시 호요방의 추천으로 중일우호21세기위원회의 중국측 수석위원이 된다. 이건 원래 민간기구이고, 일본측 위원은 대부분 교수, 학자였는데, 중국측의 위원은 관방색채가 강했다. 3천의 일본청년을 접대하는 일은 당연히 왕자오궈가 해야하는 일이다. 활동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특별히 단중앙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한다. 서기처 서기들과 각부의 부부장이상이 참석한다. 필자는 그때 무슨 우연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열석(列席)했다. 왕자오궈는 이후 몇달동안, 단중앙은 3천일본청년을 접대하는 일을 '가장 큰 일'로 여겨야 한다. 기관 각부문과 직속단위는 '가장 강한 간부'를 접대제일선으로 보내라고 한다.

 

회의에서 여러 서기와 부장들은 "자오궈 동지의 말씀은 아주 중요하고, 아주 적절하다"고 한 후, 단중앙서기처의 서열 막내인 송더푸(宋德福)이 발언한다: 먼저 "자오궈 동지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후, 완곡하게 제출한다. "가장 강한 간부'를 보내라고 한 것은 '가장 적절한 간부'를 보내라고 수정하는 것이 어떤지 말한다. 단중앙기관과 직속단위는 요구에 따라 2/3이상의 간부를 중일청년연환의 조직선전에 파견한다. 어쨌든 다른 업무도 있고,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기관에 1/3의 간부는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송더푸는 당시 기관의 일상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마땅히 이는 합리적인 건의라 할 수 있다. 기관에 남아있는 간부들의 적극성도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 왕자오궈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진다. "응...'가장 적합한 간부'. 다만..." 그는 강경한 어조와 격렬한 언사로 말한다: 여하한 부서도 본위주의를 해서는 안된다. 다른 업무는 그만둘 수 있다. 3천일본청년을 접대하는 일은 전체 단의 대국이다. 잘 해야 하고, 실수해서는 안된다. 어느 단계이든 누구도 이 대국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즉시 책임을 추궁하고 즉시 처리하겠다!"

 

전체 수십명의 단중앙 부부장이상의 간부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송더푸는 아무런 표정없이 듣기만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송더푸는 군인출신이고, 총정치부에서 전국청년공작을 주관했다. 그때 여추리(余秋里), 양상곤(楊尙坤)등의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 군사위의 책임자가 단중앙에 물어본 적이 있다: 너희가 만일 송더푸를 발탁중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를 군대로 돌려보내라. 우리가 그를 쓰겠다! 왕자오궈는 이렇게 많은 간부들 앞에서 송더푸를 무안하게 만들었으니, 무형중에 군대세력과 담장을 쌓은 셈이 된다. 후진타오는 자신이 구이저우로 간 후에 당중앙에 송더푸를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한다. 서기의 서열 마지막에서 단중앙제1서기를 넘겨받는다. 그가 바로 후진타오와 군대정공계통간에 연결통로를 뚫어준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내가 당시 단중앙에서 일할 때 느꼈던 것이다. 아마도 부분적일 수 있을 것이다. 왕자오궈에게 유사한 사례는 여러 건이 있다. 다만 왕자오궈는 여러해 후 전국총공회의 1인자가 된다. 나의 동기동창이 전국총공회에서 중간급 간부를 맡고 있었는데, 그녀는 왕자오궈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다. 그는 관후하고 겸허하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내가 아는 왕자오궈와 전혀 다른 사람같았다.

 

왕자오궈와 비교하면, 후진타오는 당시 중남해와의 연락은 적었다. 다만 업무성격으로 인하여 후진타오는 널리 인맥을 닦았다. 주로 두 가지 라인이다.

 

한 라인은 단중앙의 각부문과 각성단위책임자들과의 연락이다. 후진타오는 단중앙기관당위서기이고, 왕자오궈가 병으로 입원한 후, 조직, 인사도 관리했다. 간부승진, 이동, 심사, 전업에 그가 발언권을 가졌다. 주택을 나눠주고, 곤란할 때 보조금을 주는 것, 가족을 베이징으로 데려오는 지표등의 문제에서도 그는 관심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는 것은 그가 통정달리하고 말을 잘 들어주면서도, 원칙을 견지하고,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후진타오는 이들 정치계의 미래의 스타들과 장기적인 관계에 좋은 관계를 맺어두었다.

 

그의 또 다른 라인은 바로 왕자오궈가 갖지 못한 것이다. 전국청련주석으로 청련상위들 중의 엘리트, 문예계, 사상이론계, 기업계등등 각 전선의 내일의 스타들과도 연결되었다. 

 

공청단은 명의상, 표면적으로 전국청련(전칭은 전국청년연합회)의 한 단체회원이지만, 실질적으로 전국청련이 단중앙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런 상호 연결되는 것은 중국특색의 특이한 관계이다. 전국청련은 단중앙의 통전부 관할을 받았고, 단중앙 통전부 부장이 전국청련 비서장을 겸임했다. 그가 바로 전국청련 일상사무의 책임자였다.

공청단과 전국청련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후진타오는 청화대학에 있을 때 바로 문예골간이었다. 단중앙기관연환회에서 그는 그럴 듯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는 탁구를 즐겨했고, 문학예술에도 감성이 있었다. 당시의 전국청련 상위에는 문학평론가 유재복, 작가 섭신, 화가 한미림, 경극예술가 유장유, 수학자 양락, 엄가기, 범증, 유심무, 도사량, 강곤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 청년기업가도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후진타오는 청련주석으로서, 그들과 많이 접촉하고 교류했다. 이는 자신에게 신지식구조를 갱신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사회동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지신의 엘리트층 사이에서의 권력기초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왕자오궈와 후진타오 두 사람의 당시 사상과 언행은 중공의 정통이데올로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혁파'로 분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필자 개인의 느낌으로, 후진타오는 종합하는 능력이 더욱 뛰어났다.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에게 태만하게 하거나, 어떤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개인생활에서도 후진타오는 영향을 아주 주의했다.

 

그의 처인 류용칭(劉永淸)은 그를 따라 베이징으로 옮겨온다. 처음에 단중앙 산하의 중국청년여행사에서 일했다. 얼마 후, 후진타오는 방법을 강구하여 그녀를 북경시건설위원회로 옮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전문성'에 부합하여, 그녀가 재능을 더욱 발휘할 수 있고, 둘째는 '공청단산하'에서 승진, 장려등을 받을 때 '과전이하(瓜田李下)'로 말이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에게 '일인득도(一人得道), 계견승천(鷄犬昇天)'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단중앙에 온 후, 기관총무처는 전문 동대가 곁의 단중앙숙사루의 가장 서쪽의 직급에 맞추어 후진타오에게 2채의 3실1청의 주택을 배정한다. 창문이 서쪽을 향해서 매번 여름이 되면 방이 찜통처럼 뜨거웠다. 이런 주택은 몇몇 단중앙서기들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이었다. 후진타오는 전혀 이를 따지지 않았다. "기관의 주택은 부족하니, 이 정도면 아주 좋다." 그리고 몇년을 거기서 살았다.

 

상급간부가 하급기관에 내려가서 '먹고 마시고 노는' 기풍은 중공에서 아무리 금지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단조직은 상대적으로 돈이나 권력이 있는 곳은 아니다. 다만 단중앙서기가 성시 자치구를 시찰하면, 단성위는 마찬가지로 산해진미를 차리고, 당의 성위제1서기 혹은 공청단업무를 관장하는 성위서기, 성위선전부장등 정계요인들을 불러, 단중앙제1서기와 함께 상석에 앉도록 안배했다. 80년대 단중앙관리가 이런 상황을 만나면 왕왕 머리가 아팠다. 그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야망이 있었다. 많이 먹고 마시다가 누군가 중앙기율위원회에 고발하면, 앞길을 망칠 수 있다. 그러나 거절하면, 다시 상하관계가 긴장되게 된다. 1983년말 상하이에서 단중앙서기처 서기로 옮겨온 리위안차오(李源潮)는 당시 서생기가 강한 관리였다. 지방에 갈 때면 중앙이 규정한 '4채1탕'을 준수할 것을 견재했다 .그렇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돈을 냈다. 물론 비장의 단성시위의 접대자는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난감한 장면이 연출되곤 했다. 어떤 때는 단성위서기가 불만을 얘기하기까지 했다.

 

후진타오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또 다른 고명한 방법을 강구한다. 그는 부하들을 대신하여 설명했다. 아래의 단조직이 풍성하게 접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부득이한 고충이 있다. 그들은 단중앙서기가 시찰하는 기회를 틈타, 성위관리들과 소통하고 접촉하고 연락하여 둠으로써 나중에 일하기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 자리에서 성위의 주요간부들에게 보고도 하고 요구도 제출한다. 네가 억지로 '원칙을 견지하고' '체면을 봐주지 않으면'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다. 그 성의 단위업무에 장애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후진타오는 막 현지에 도착하면 먼저 이 말을 하고, 단성위책임자에게 음식을 준비할 때는 최대한 간단하게 하고, 표준을 넘어서지 말도록 하라고 한다; 다만 단성위가 정식 연회를 준비하여, 중공의 성시위책임자들을 모실 때면, 그는 잘 응대하면서 그들 지방관들과 웃는 얼굴로 잘 상대해서, 단성위의 체면을 살려주곤 했다.

 

시찰기간, 그는 돈을 내는 일로 접대인원과 밀고 당기는 일이 없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그는 단성위에 돈을 부쳐준다. 나는 한 가지 일을 알고 있다. 후진타오가 광시에 시찰갔을 때,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후진타오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비서 예커동(葉克冬)에게 30위안을 부쳐주라고 했다. 이는 80년대초 그의 한달 월급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

 

후진타오는 겸허했다. 단중앙의 부하들이나 외부사람들에게 평판이 높았다. 오가상(吳稼祥)은 한 글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비교한 적이 있다. 장쩌민이 총서기를 하기 전에 최신모델의 TV를 등소평집에 보내고, 바닥에 엎드려서 조정했다. 총서기의 지위가 공고히 된 후에는 등소평부인 탁림(卓琳)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노부인은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 후진타오는 '사람됨이 아주 겸허했다. 누구에게든 그러했고, 그 사람의 권력이 크든 작든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이건 오가상이 한 말 그대로이다. 그는 이런 사례를 들었다.

 

나에게는 친구 L(오가상이 이렇게 영문자를 썼다)이 있다. 이 L에게는 동기동창이 있는데 단중앙제1서기 후진타오의 비서였다. L는 전화를 걸어 그의 동기동창을 찾았다. 그런데 후진타오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지금 여기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L이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진타오입니다." 목소리는 온화했고, 목소리가 크지도 않았다.

"누구라고?" L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진타오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고, 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큰 소리로 말해줄 수 없나요, 잘 안들립니다."

"나는 진타오입니다."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어투는 그대로였다. L은 마침내 알았다.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즉시 끊었다.

공청단에서 추진하는 일들은 어떤 때는 개혁개방에 협력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안정유지에 협력하는 것이다(당시에는 안정유지라는 말이 없었다. 왕왕 '반자산계급자유화'라고 했었다). 한번은, 단중앙연구실의 한 여자간부가 반농담조로 후진타오에게 물었다. 만일 어떤 일이 분명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합니까? 후진타오의 대답은 상투적인 관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면으로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도 농담조로 대답한다: "언젠가 네가 내 자리에 오르면, 너도 왜 그런지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