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박(張朴)
만일 2020년 4월에 쓴 <전처의 눈으로 본 시진핑>이 나의 연상과 충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진혜민과 모택동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완성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 진혜민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1999년이다. 하루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나에게 진혜민을 만나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모택동의 애인이다." 친구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너의 누나가 분명 흥미를 느낄 것이다"
이때의 장융(張戎)은 그녀의 또 다른 거작 <모택동: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었고, 나는 막 <모택동의 개인의사 이지수(李志綏) 회고록>을 읽은 때였다. 이지수는 서문에서 네 글자로 모택동의 사생활을 형용했다: "해인청문(駭人聽聞)"(들으면 깜짝 놀랄 일). 책에서는 심지어 모택동의 여자친구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대체로 그녀들의 이름은 숨겼지만. 설마 진혜민도 그 중의 한 명이란 말인가?
당연히 걱정도 잇었다. 나는 전화에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녀가 모택동의 애인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친구의 말투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80년대중반 진혜민은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다가 비밀리미 감금된 적이 있다. 그녀는 일찌기 홍콩신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회귀할 때, 그녀는 중국당국에 잡혀갈 것을 우려해서, 모택동의 애인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홍콩영국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친구의 말은 갈수록 구체적이었다.
"영국의 정보기관이 조사를 한 후에 그녀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망명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말은 그녀가 홍콩에서 나와 이미 영국에 정착했다는 말이냐?"
"그녀의 아들과 함께 런던에 살고 있다."
며칠 후, 우리는 진혜민과 만날 시간, 장소를 정했다: 그녀에게 "Blue Elephant"라는 태국음식점에서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이 식당은 런던의 서쪽에 있고, 겉모습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별천지였다: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열대화훼, 그리고 태국인들이 보시는 금색불상까지. 진혜민과 우리는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진혜민은 1948년생으로 이 해에 막 50을 넘겼다. 168센티미터의 큰 키에 색채가 선명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짙고 무성한 검은 머리카락은 금방 미용실에서 걸어나온 듯했고, 어깨 위를 덮고 있었다. 그녀는 미목이 수려하고, 피부가 하앴으며 몸매는 약간 통통했지만, 여전히 우아한 자태는 변함이 없었다. 역시 옛날에 공군정치부 문공단(文工團)에서 무용수로 있을 때의 늘씬한 몸매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지수에 따르면, '날씬한 몸매'를 모택동이 가장 좋아했었다고 한다.
얘기를 나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진혜민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발랄하며 성격이 강하고, 말을 솔직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잇었다. 그녀의 얼굴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겼었다!' 그녀의 행동거지는 곳곳에서 이런 것을 드러냈다: "나는 조용히 살 수는 없는 여자이다!"
진혜민의 또 다른 특징은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홍콩에 있을 때 했던 사업들에 대하여 장황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군수물자사업, 부동산사업. 그녀는 마치 돈을 좀 번 것같았고, 홍콩에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한둘이 아닌 것같았다. 그러다가 화제를 갑자기 모택동에게 돌린다. 그녀는 즉시 1980년대에 홍콩에서 대륙으로 돌아갔을 때 비밀이에 감금되었던 일을 꺼낸다: 홍콩에서건 대륙에서건 그녀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게 친구든 아니든 모두 그녀와 모택동간의 이야기를 했었다. 한번은 북경으로 돌아갔는데, 진혜민이 국가안전부에 비밀리에 붙잡혀서 단독으로 시교외에 갇혀버린다. 그녀가 '국가기밀을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심문을 받을 때는 욕을 얻어먹기도 했다. 나중에 기회를 잡아, 그녀는 사람을 통해 당시 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있던 양득지(楊得志)에게 연락했고, 그제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개략 나의 눈빛에서 의심하는 눈초리가 느껴졌나보다. 진혜민은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양득지는 나의 부친의 전우이다. 1976년 내가 모택동을 떠난 후, 그와 잠시 내왕이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계산해봐도 양득지는 진혜민과 개략 40살이 차이났다. "양득지는 나를 아주 사랑했고, 이혼하고 나와 결혼하려고 했다. 내가 응락하지 않았다." 진혜민의 애매한 말 속에서 나는 그녀와 양득지간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당신은 왜 양득지를 거절했나요?" 나는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듯이 물었다.
진혜민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모택동이 나를 그녀의 딸이면서 애인이라고 한 이후에 나는 다시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약간 놀랐다: "모택동이 당신을 딸로 보았다면, 그건 난륜이 아닌가?" 나는 급히 물었고 대답을 알고 싶었다.
"나도 그렇게 모택동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크게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혜민은 잠시 침묵하면서 표정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때, 정말 비슷한 느낌이었다. 모택동은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고 친근하여 충후한 어른, 자상한 부친같았다. 내가 그를 바라볼 때, 특히 그가 내 손을 잡으면, 나는 딸이 부친에게 기대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내가 그의 벗은 몸을 끌어안을 때, 그의 배를 쓰다듬을 때는 다시 남녀애인의 심리상태로 되돌아간다."
화제를 다시 이지수가 쓴 회고록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즉시 진혜민은 분명하게 경멸하는 말투로 이지수의 책이 뭐 볼 게 있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비웃으며 말했다. 이지수가 쓴 것은 모택동의 침실 밖에서 발생한 일들이지만, 그녀가 얘기하려는 것은 침실문을 닫은 후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개인(풀타임) 보건의사로서 이지수는 1955년부터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할 때까지, 모택동의 곁을 지켰다. 이지수는 그와 모택동간의 많은 대화를 기록했을 뿐아니라, 중공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발생한 여러 중요사건의 내막을 기록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공고위층인물간의 그리고 모택동의 사생활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이 책은 1994년에 출판된 후, 영문이건 중문이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나는 진혜민이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그 놀라운 저작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혜민은 남경군구자제소학을 졸업한 후, 12살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 들어가 무용수가 된다. 나중에 다시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그녀를 경시하려는 생각은 없다. 비록 단지 소학교졸업의 학력이지만, 진혜민의 기억력은 아주 좋았고, 두뇌도 영민했으며 다른 사람의 관점과 견해를 빌어 자신을 충실하게 하는데 능했다. 그녀는 정치화제에 특히 흥미를 보였다. 심지어 97년 홍콩회귀이전에 그녀는 모택동파가 미래 중국에서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20년후에 시진핑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좌경으로 유명한 유태인부호 소로스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금년8월 시진핑을 토발하자는 글을 발표했다: 시진핑은 현재 중국을 모택동식의 독재폐쇄사회로 바꾸고 있다.
진혜민은 왜 이지수의 책에 대하여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을까?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진혜민은 만나자마자 나에게 영국에서 출판사를 하나 구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사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조건은 원고료 4백만파운드를 선지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말한 금액은 미국대통령이 은퇴후에 받는 원고료대우와 비슷하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지수가 회고록으로 얼마를 벌었는지 아는가? 사십만달러! 그게 뭐라고!" 그녀는 냉소하며 말했다. " 내가 홍콩에서 부동산에 투자할 때 삼천육백만홍콩달러를 손해보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써주면 분명 이지수의 책보다 잘 팔릴 것이다!"
원래 진혜민은 이지수가 모택동의 이야기를 쓰면서 얼마를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분명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양자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지수가 쓴 것은 모택동의 침실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고, 그녀가 얘기하려는 것은 모택동의 침실 안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진혜민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래봐야 모택동의 사생활중의 한 장면이어서, 이지수의 이야기와 나란히 얘기할 수준은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지수의 책에 당신이 있는가?" 진혜민은 "대피동면(大被同眠)"장면을 들엇다. 이지수가 얘기한 몇명의 여자아이들과 모택동이 침대에서 즐기고 있는데, 강청이 돌연 도착한.
"내가 바로 그 중이 한명이다." 진혜민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때는 1975년이고, 그녀가 27살때이다.
나는 진혜민의 얼굴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처음 모택동은 만난 일을 얘기해주겠다." 목소리를 깔고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건 1962년 중남해에서 열린 무도회에서였다. 모택동은 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고,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그가 나의 상의와 치마를 찢었다. 나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그해에 나는 막 14살이 되었을 때였다."
진혜민은 매번 모택동과 한 곡을 춤출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은 조금 달랐다.
무도회의 중간휴식시간에 모택동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걸어와서 춤을 추자고 청한다. 그리고 한곡을 추고 다시 한곡을 추었다. 진혜민은 모택동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모두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모택동이 그녀를 보던 눈빛은 분명히 기억한다. 여전히 온화하고, 친절하였지만, 느낌이 조금 달랐다.
개락 밤11시경, 옅은 회색의 중산복을 입고 같은 색깔의 양복바지를 입은 모택동이 한곡을 춘 후에 멈추고는 진혜민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도장 옆의 휴식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가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중남해 무도회는 1959년 8월 모택동이 향산을 떠나 중남해로 이주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시작되었다. 공개적인 이유는 중공지도자들이 업무에 바쁘니 조금 긴장도 풀고 몸도 움직이면 신체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중남해 풍택원(豊澤園) 서북쪽에 설치된 춘우재(春耦齋) 무도장은 가면 갈수록 모택동만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유소기, 주덕등은 비록 참석하기는 했지만, 모택동이 나타나야 무도회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심지어 무도장 옆의 휴식실도 모택동만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공군 정치부 문공단의 여자들은 1958년 10월부터 중남해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다. 행사명칭은 "중남해임무"였다. 공군 정위(政委) 오법헌(吳法憲)이 직접 책임지고 담당했다. 개략 1967년초, 문혁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되고, 중남해 무도회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부정기적으로, 모택동은 이미 익숙해진 여자들을 불렀고, 중남해에서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섹스도 했다. 진혜민이 중남해에 드나들었던 기간은 5년을 넘지 않는다.
진혜민이 모택동과의 첫경험을 얘기할 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모택동이 당신의 손을 끌고 휴식실로 갈 때 당신은 무슨 느낌이었나요?"
"너무 긴장했다. 머리가 하얗게 빈 것같았다." 진혜민은 이렇게 회고한다. 마치 37년전의 그 장면이 눈앞에 펼처진 것처럼.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랐었다."
진혜민은 여러번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모택동이 같이 춤추는 여자아이중 한명의 손을 잡고 휴식실로 들어가는 것을. 그러면 어떤 여자아이들은 그 안에서 한시간정도 있다가 혼자서 나왔다. 어떤 여자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다가, 하루 이틀 후에 문공단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녀들이 왜 남았는지 알지 못했고, 아무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당시 직접 여자아이들을 선발하고 심사한 후 데리고 중남해로 들어가는 것을 책임졌던 사람은 문공단의 정위(政委) 육우(陸友)였다. 그는 재삼 여자아이들에게 기밀유지를 강조했다: 알지 말아야할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모두 말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기밀을 유지하는데 십분 주의해야 한다. 구분반도 안된다. 반드시 십분이어야 한다. 항상 말이 많았던 진혜민도 감히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모택동에 의해서 남겨지고 나서야 비로소 중남해에서 하루이틀 남아있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커피숍에 안자서, 우리는 모택동과 배무(陪舞, 댄스파트너) 여자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었다. 중공의 지속적인 신격화운동으로 중남해의 무도회에 참가한 여자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모택동이 인민의 대구성(大救星)일 뿐아니라,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품격이 고상한 위인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모택동보다 위대하지 않았다. 당시 한 여자아이는 진혜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도회에서 모택동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 감동하여 울고 싶었고, 팔짝팔짝 뛰고 싶었고, '모택동만세'를 외치고 싶었다고. 진혜민은 생각한다. 이런 모택동에 대한 사랑(熱愛)과 남녀간의 사랑(情愛)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나는 이지수의 책에서도 유사한 견해를 본 적이 있다. 즉 모택동은 양자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사랑(熱愛)을 남녀간의 사랑(情愛)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의 견해는 정반대이다: 성욕이 왕성했던 모택동이 여자아이들의 그에 대한 숭배심리를 이용하고, 게다가 지고무상의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단 필요하면 욕정을 배설하기 위한 육체를 점유하는 것은 그에게 항상 손쉬운 일이었다. 거의 어떤 여자아이들도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한명을 제외하고. 그녀는 바로 진혜민이었다.
그날 밤 휴식실에서 모택동은 진혜민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한다. 그녀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제 막 14살이 된 진혜민은 성의식이 전혀 없었다. 한번도 '성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소리치고 싶었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저 비는 것처럼 모택동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자상하고 친근한 모습이던 모택동은 이때 이미 욕정이 불타올랐다. 그는 진혜민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으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같자 바로 대노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와서 진혜민의 상의와 치마를 마구 찢기 시작한다. 성격이 강했던 진혜민은 반항한다.
여기까지 말하고서, 진혜민은 돌연 멈추었다.
나는 급히 재촉했다: "왜 더 말하지 않는 겁니까. 계속 얘기해주세요."
진혜민은 담담하게 웃음을 띠면서 화제를 돌렸다: "먼저 나를 도와서 출판사에 연락해주세요."
나는 이미 진혜민이 얘기하는 모택동과의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고 예감되었다. 그러나 400만파운드의 원고료로 그녀의 이야기를 살 출판사를 구하기는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완곡하게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때부터 그녀와의 연락이 끊겼다. 10여년후인 2012년이 되어서 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데 우연히 이런 말을 했다. 한 교회에서 선교를 듣다가 그가 진혜민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주소를 받은 후 즉시 진혜민을 찾아갔다.
나는 그녀가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처음 모택동으로부터 섹스요구를 받았을 때, 그녀는 어떻게 반항했는가? 모택동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최종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는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는 얼마나 엄중했는가?
역사상 보기 드문 잔인한 폭군인 모택동은 반혁명진압운동에서 가볍게 그가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2백만을 죽여버린 사람이다. 또 다른 경제대약진에서는 인위적으로 대기근을 만들어 3천만이상의 보통민중을 굶겨죽였다.
모택동은 어떻게 그의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진혜민을 징벌했을까?
그 교회는 런던시내 중심의 보통 건물에 있었고, 방한칸을 임차하여 선교활동을 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책임자는 한 중년여성이었는데, 여러해전에 그녀가 캠브리지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를 공부할 때, 그녀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기억하기로 그녀는 확실한 무신론자였다. 약간의 의문이 내 머리를 스쳤다: 누가 돈을 내서 그녀로 하여금 교회를 만들게 했을까? 혹시 중국공산당은 아니겠지.
교회활동이 끝난 후, 나는 진혜민과 바로 갔다. 진혜민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그녀가 출판사에 400만파운드의 원고료를 선급금을 받겠다는 생각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나의 생각을 전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시장의 반응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같은 책은 1997년 한 아주 작은 출판사에서 출판했고, 원고료 선급금은 수천파운드였다. 시장에 나온 후 큰 인기를 끌었고, 5년이 지나자, 작자가 받는 원고료는 400만파운드를 훨씬 넘어섰다."
진혜민은 나에게 설득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대리인이 되어 출판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리고 위임장에 서명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진혜민은 이야기보따리를 열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출판사에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분명히 흥미를 느낄 것이고, 분명히 큰 돈을 내놓으려 할 것이다." 조금 멈췄다가 한 마디 덧붙인다. "어쨌든 이지수가 받은 선급금보다 적어서는 안된다."
진혜민을 통하여 나는 알 수 있었다. 중남해 무도회에는 처음에 해방군 총정치부 문공단과 해군 정치부 문공단도 참여ㅓ했다는 것을. 개략 1959년 연말, 모택동은 이 두 문공단은 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때부터 중남해 무도회에서 배무임무를 맡은 것은 공군정치부 문공단의 여자아이들뿐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모택동과 함께 춤주고 모택동과 함께 잔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공군 정치부 문공단에서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나중에 그녀를 잘 아는 사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진혜민은 런던에 도착한 후, 정부에서 그녀에게 나누어준 집에서 지낸다. 진혜민은 환경이 너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층인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그녀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체면이 떨어지고 모택동의 애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한번도 손님을 집으로 부르지 않았다. 나는 일찌기 진혜민에게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친구의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억지로 잠깐 머물다가 바로 떠났다. 나는 차를 운전해서 그녀를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데려가 주었는데, 그녀는 계속 불평을 했다. 그녀는 가난한 나의 친구집에 가서 식사를 한 것이 그녀의 격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여러 여자친구들 중에서, 진혜민은 유일한 '고관자제'였다. 진혜민의 부친인 진옥생(陳玉生)은 관직이 강소성 정협부주석까지 지냈다. 중공의 관리직급체제로 보면, 성급간부이다. 그러나 진혜민은 부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옥생도 이 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진혜민이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진혜민은 임차한 아파트에서 나에게 그녀의 경제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홍콩에 있을 때의 주택은 계속 임차해주고 있었고, 임대료수입이 괜찮았다. 런던에서의 일상적인 지출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돈은 항상 쓰기에 부족한 것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말하면서, 입가에 장난기있는 웃음을 띠웠다.
영국으로 온 후에 진혜민은 하는 일없이 지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매일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그녀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나를 그녀의 침실로 데려갔다. 안은 크지 않았고, 더블침대가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채광이 부족하여 어두워보였다. 진혜민은 침대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후 이렇게 말한다: "이 집으로 이사온 후, 하루종일 저기에 앉아 있다."
"하루종일 앉아있다고요?" 나는 호기심이 일어 물었다. "그럼 의자에서 뭘 합니까?"
이때 그녀의 대답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모택동을 생각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이어서 한 한 마디는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나의 영원한 애인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진혜민은 모택동과 항상 꿈속에서 대화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존경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택동은 천재이다." 나는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천재인지를 얘기해달라고 했더니, 진혜민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꾸어, 모택동이 "초범탈속(超凡脫俗)"하다고 찬미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꼬면서 말했다: "당신은 전에 나에게 모택동이 성변태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떤 여자아이들도 적응할 수 없었다고. 네가 말하는 초범탈속은 그 점을 얘기하는 것인가?" 진혜민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약간 화가 난 표정이 드러났다. 말투도 조금은 공격적이 되었다. "너는 모택동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는가?" 그녀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정치적으로, 소련의 스탈린이건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이건 그 누구도 그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 생활문제에서도 아무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이 말이 아주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나중에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지수의 책에서 나온 말이다. 인용한 것은 강청(江靑)의 말이고. 나는 반박하여 말했다: "바로 그 아무도 그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기근, 문혁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를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택동은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여자친구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말한 "수많은 여자친구"라는 말이 그녀를 자극한 듯했다. 진혜민은 반복하여 모택동이 얼마나 그녀를 좋아했는지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용모도 예쁘고, 섹시했으며, 성생활에서도 장옥봉(張玉鳳)이건 맹금운(孟錦雲)이건 모두 너무 보수적이고, 뻣뻣하며, 소극적이었는데, 오직 그녀만이 모택동에게 물만난 물고기같은 쾌락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또한 모택동이 그녀에게 총명하고, 직설적이며 감히 반조류(反潮流)한다는 등등으로 칭찬했다고 말했다. 진혜민의 기뻐하고 흥분한 표정에서 나는 그녀의 만족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모택동의 사랑을 받았다고 믿는다. 설사 그게 다지 딸에 대한 사랑 혹은 애인에 대한 사랑과 유사하더라도.
모택동의 수많은 여자친구들 중에서 진혜민은 아마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전혀 거리낌없이 큰 소리로 내가 모택동의 애인이라고 말한 사람일 것이다. 그녀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옷입는 것이나 꾸미는 것에 대하여도 진혜민은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어쨌든 모주석의 사람이니까."
한번은 인터뷰를 할 때, 진혜민이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은 그녀를 망쳐버렸다고. 그녀가 여하한 다른 남자에게도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혼하겠다는 욕망은 아예 사라졌다. 홍콩에 있을 대, 한 돈있는 동사장이 그녀에게 구애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경멸하는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그 자는 모주석과 동등해지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진혜민이다. 비록 모택동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악마이고 폭군이고 무수한 중국인들이 모택동의 폭정으로 죽었지만, 그리고 모택동은 진혜민이 14살때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녀의 육체를 가졌지만, 그리고 진혜민이 원망하는 말을 몇마디 했다고 해서 그녀를 머나먼 변방의 농장으로 쫓아내서 온갖 고통을 겪게 하였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중국과 전세계에는 아직도 모택동을 숭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모택동의 화상은 천안문 성루에 아직도 걸려 있고, 모택동의 유체는 천안문광장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게 바로 진혜민이 지금도 몽유병환자처럼 모택동의 품에 머물고 있는 이유이다.
나는 돌연 깨달았다: 진혜민이 솔직하게 그녀와 모택동의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바로 그녀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택동에 대한 평가를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혜민이 보기에, 모택동은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위인이다. 모택동의 애인으로서, 그 신분은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고, 그녀를 빛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준다. 그녀의 고관자제라른 신분보다 훨씬 더 많이. 모택동이 살아있던 죽었건 그녀가 천애(天涯)에 있건 해각(海角)에 있건, 진혜민의 모택동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생각에 모택동의 그녀에 대한 정은 계속 그녀를 감싸고 있어서 그녀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외에 그녀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녀는 여러번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나중에 사람들이 모택동을 이야기할 때 나도 알았주었으면 좋겠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관계처럼."
진혜민은 위임장에 서명했고, 그후 우리는 런던의 마담투소밀랍인형박물관(Madame Tussauds London)에서 멀지 않은 Phoenix Palace에서 식사를 했다. 이때 진혜민은 아직 63세가 되지 않았는데, 이빨이 거의 다 빠졌고, 겨우 4개의 앞이빨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먹었으며 아주 먹는 것을 힘들어했다. 식사후에 나는 차를 몰아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나에게 좋은 소식을 빨리 듣기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 날 돌연 진혜민의 전화를 받는다. 첫마디가 나보다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목소리에서 나는 그녀가 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즉시 그 교회의 책임자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가 무슨 명령을 받아서 뒤에서 조종하는 것일까?
당시 나는 거의 그녀의 말에 끼어들지 못했고, 가장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진혜민의 마지막 말이었다: "네가 만일 나에 대해 쓰고 싶다면, 써라."
나는 쓰지 않고 더 기다렸다. 어쨌든 이야기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세부적인 부분은 더 깊이 알아보고 추가로 확인해야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 다시 진혜민을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당시 나는 장편소설 <아타라는 한 티벳소녀가 있다>를 구상하고 쓰는데 바빴었다. 이 '기다림'은 계속하여 8년여를 더 기다리게 된다. 그래도 진혜민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 기간동안 <아타>가 대만에서 출판발행되었다. 또 다른 두 분의 장편소설인 <그 머나먼 곳에서>와 <마지막 한잔의 커피>도 모두 구상을 마치고 집필하는 상태였다. 순식간에 2020년초가 되었고, 팬데믹이 중국에서 전세계로 확산되며, 인심이 흉흉해진다. 4월, 내가 <전처의 눈으로 본 시진핑>을 다 썼을 때 나는 돌연 진혜민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생은 짧고, 생명은 얼마나 취약하던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진혜민과 모택동의 이야기를 써보자.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글을 세상에 남겨놓자.
나는 진혜민이 해준 이야기에 감사한다. 비록 불완전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한다. 모택동과 피부를 맞댄 여자친구들은 지금까지 단 한명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인은 다른 게 아니라, 이들은 한명도 출국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소평의 특별허가가 없었더라면, 이지수가 미국으로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모택동에 관한 이야기도 영원히 묻혀버렸을 것이라는 것처럼. 다행히 진혜민은 빠져나왔고, 우리는 비로소 모택동의 사생활의 편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저 편린이지만, 중국대륙에서는 모두 '국가최고기밀'에 속하는 것이다.
모택동의 후계자들, 특히 시진핑은 계속하여 모택동신화를 유지하는 외에, 모택동에 관한 불리한 언론을 모조리 삭제봉쇄하고 있다. 진실한 모택동을 세상에 알리자.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모택동의 애인으로서 진혜민이 해준 이야기는 단순히 '성'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출판된 모택동에 관한 책은 수도 없이 많다. 가장 유명한 두 권은 중국인작가에게서 나왔다. 장융의 <모택동: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와 이지수의 <모택동의 개인의사회고록>이다. 나는 그것을 '파란장활(波瀾壯闊)'한 거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쓴 진혜민과 모택동의 이야기는 그저 이 '파란'과 '장활'에 자그마한 물결을 보내는 것일 뿐이다. (끝)
(작자의 자기소개: 장박, 영국거주중국인작가, 소설가, 주요작품: <대륙의 딸들((Wild Swans : Three Daughters of China)>중문판 번역. 장편소설 <가볍게 나는 떠난다> <아타라는 한 티벳소녀>. 중편소설 <여인아 여인> <대남자의 눈물>. 단편소설 <환간(換肝)>, <한 기녀의 64컴플렉스>. 정론글 <티벳은 눈물을 믿지 않는다> <다소왕사루우중(多少往事淚雨中)> 일물글 <섭원재인상> <전처이 눈으로 본 시진핑>. 여행기 <나와 장융회향기>등등. 지금까지 각종작품 백만자이상을 발표했음)
장박: 진혜민에게 보내는 서신
혜민, 안녕하세요.
나는 이이 오랫동안 오랫동안 당신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서신을 본 후에 나에게 연락주십시오. 나의 이메일주소는 zhangpu532@gmail.com입니다.
나는 나의 이 작품 <진혜민의 자백 - 나는 모택동의 딸이자 애인이다>를 발표하기 전에 먼저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외에 나는 당신에게 확인하고싶은 문제들도 있습니다. 아래는 그 중의 일부입니다.
1. 당신과 모택동의 첫경험에서 당신의 방항으로 모택동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다음 날 당신을 찾아와서 얘기하면서 당신을 협박회유한 사람이 문공단의 정위 육우였습니까?
2. 당신과 맹금운이 개인적으로 모택동이 당신들에게 그의 앞에서 나체로 춤을 초게 했다는 것을 얘기할 때, 당신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춤을 추었다고 했지요. 내 기억에 당신이 가장 즐겨 흥얼거리던 노래는 영화 <상감령>의 삽입곡 <나의 조국>이라고 했지 않았나요?
3. 유소원(劉素媛)과 충돌이 발생하여, 당신과 맹금운, 전령(田玲)이 경골두혁명조반단에서 나왔고, 모택동에게 당신들 처지를 호소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했지요. 당신들 세 명은 함께 불평을 터트렸다고 했는데 당신도 적지 않은 말을 했다고 했고 내 기억에 그 중의 한 마디가 "우리는 기녀(妓女)보다 힘든데, 기녀만도 못하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4. 북대황(北大荒)농장에서 노동개조때, 연대장이 당신을 강간하려고 했을 때 당신은 그에게 "나는 모주석의 사람이다. 네가 감히 나를 건드리겠다면 한번 해봐라!"라고 했다고 했는데, 그 말로 그가 물러났나요?
5. 모택동이 죽기 몇개월전에 당신은 중남해에서 쫓겨났는데, 당신은 장옥봉이 모택동의 면전에서 종용한 결과라고 생각하지요. 그때의 모택동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 위에 누워서 지냈고, 일찌감치 화장실에도 못가서 대소변도 그냥 침대위에서 보았지요. 당신은 그런 걸 보면, 바로 장옥봉을 불러서 처리하라고 했는데, 그게 장옥봉을 화나게 한 것인가요. 당신들 사이의 갈등은 그것때문에 생겼나요?
6. 임표사건후에 당신은 북경으로 돌아가서, 해방군대장 속유와 한동안 애인같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는데, 속유는 자주 당신 앞에서 모택동의 욕을 했다고 했지요. 그리고 한번은 칼을 가지고 중남해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그 '칼'은 과도인가요 아니면 비수인가요?
당신의 회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장박
2021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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