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성우(謝盛友)
"신삼계(신싼제)"는 문혁이 끝나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이후의 77,78,79학번 대학생을 가리킨다. 문혁기간의 노삼계(老三屆)와 구분하기 위하여 대학입시회복후의 3년간 학번의 대학생을 "신삼계"라고 부른다.
신삼계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1979년의 고중졸업생으로 1963년생이다. 이 3년간의 입학생의 연령은 1947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16년에 걸쳐 있다.(일부 대학교에 입학한 대학생들 중에는 보기 드물게 1946년생도 포함되어 있다)
신삼계내에서도 차이가 적지 않다. 77학번은 거의 당년 고중졸업생이 없었고, 78학번중에는 당년고중졸업생이 약간 있었으며, 79학번에는 당년 고중졸업생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량이 당년 고중졸업생이 들어왔기 때문에, 79학번은 77학번, 78학번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전 두 해의 학번과 비교하여, 79학번은 평균연령이 아주 낮았다. 개략 이전 2년보다 평균연령이 5년은 어렸다.
1977년 겨울, 570만명의 수험생이 대학입시에 참가한다(저장, 상하이등지에서는 예비시험을 치렀다. 만일 예비시험에 참가한 숫자까지 합치면 실제수험생은 1천만명을 넘었다), 그중 합격자는 27.3만명이다(여기에는 추가모집자가 포함되어 있다. 대학본과 2.3만명, 각종 전문대학 4만명 합쳐서 6.3만명이 추가모집되었고, 비율은 29.3%에 달한다), 합격률은 4.8%였다. 이는 중국대학입시사상 가장 낮은 합격률이다. 1978년에는 이미 예비시험이 없어졌고, 수험생의 숫자는 610만명이었고, 합격자는 40.2만명이었다(원래 계획은 29.3만명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10.9만명을 추가했다). 합격률은 6.6%였다. 1979년의 수험생은 468.5만명이고, 28.4만명이 합격했다. 합격률은 6,1%였다. 3년간 수험생총수는 1,648만명이고, 합격자수는 95.2만명으로 3년간 합격률은 5.7%였다.
신삼계는 나이차이가 많아서 16살의 차이가 난다. 특히 77, 78학번의 경우에는 나이차이가 15,16살이 나는 경우가 특히 문과전공의 경우에 아주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이미 아이를 몇 가진 가장이고, 어떤 사람은 연애가 뭔지도 몰랐다. 신삼계는 출신이 복잡하고, 사회경력도 풍부했다. 보편적으로 하층생존경력이 있었다. 상산하향(上山下鄕)했던 도시지청(知靑, 지식청년)도 있고, 황토에서 농사짓던 농촌청년도 있었으며, 공장의 노동자도 있었고, 기관간부도 있었으며, 군대에서 여러해동안 복역한 퇴역군인도 있었다. 공농병학상(工農兵學商), 여러 출신들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여러 해동안 굴렀고, 세태의 염량도 겪었다. 시대의 풍운이 만나 이렇게 경력이 서로 많이 차이나고, 나이가 서로 많이 차이나는 청년들이 한 무리로 모이게 된 것이다.
신삼계는 인원들의 자질이 뛰어났다. 특히 77학번은 중국사회에서 10여년동안 누적된 우수한 자원들이 다 모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천하위기임(以天下爲己任)"으로 여기는 포부와 "천장강대임어사인(天將降大任於斯人)"의 영웅적인 기개도 있었다. 엘리트의식은 합격한 그 순간부터 사회로부터 인정받았고, 스스로 그렇게 여겼다.
신삼계는 힘들게 얻은 공부의 기회를 중시했다. 특히 77,78학번은 그러했다. 이들중 많은 사람들은 지식욕이 왕성했고, 해면을 물 속에 넣은 것처럼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공부하고 지식을 흡수했다. 당시 모두 공부에 열중했다. 일부 학생들은 자습교실에 남아서 등이 꺼질 때까지 공부하다가 숙사로 돌아갔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등이 꺼진 후에도 전등을 켜고 이불 속에서 계속 책을 보았다. 저녁에는 길거리의 가로등 아래에 항상 무리를 이루어 책을 보는 학생들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중산계층'이라는 말이 없었다. 지금 회고해보면, 신삼계중에서 지식인가정 출신이 아주 많았고, 간부가정출신이 아주 많았다. 이들은 모두 현재의 정의로 보면 '중산계층' 출신이다. 중산계층출신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서적이 부족하고, 사회가 보편적으로 교육을 중시하지 않던 시절에, 부모의 교육소양과 부모가 지식을 중시하는 것이 자녀에게 미친 영향이 비교적 컸다는 것이다. 신삼계 특히 그중에서 77학번은 대학입시시험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그래서 수험생의 원래 기초가 특히 중요했다. 이때 지적인 요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농촌가정에서 왔더라도, 교육을 중시하는 지역문화가 있던 경우에 더욱 우세를 보였다.
1980년 여름부터, 1982년 봄까지, 1977년에 입학한 27만명의 본과, 전문대학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한다. 1982년 여름에는 40만명의 1978학번의 대학생들이 졸업한다. 1983년 여름에는 28만명의 1979학번 대학생들이 졸업한다. 이때는 개혁개방의 서막이 이미 열렸고, 중국은 백년만에 가장 격동적이었던 1980년대가 시작된다. 중국사회는 인재에 대한 수요가 절박했고, 이 95만명의 신삼계 졸업생들은 큰 기대를 받았다. 신삼계는 사람들에게 "천지교자(天之驕子)"였고, 당대사회의 중견역량이 된다.
현재 신삼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일찌감치 각 분야의 동량지재로 성장했다. 정계, 학계, 상계를 불문하고, 많은 지도자급 인물들이 이 95만명의 집단에서 나왔다. 사회는 신삼계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학계를 예로 들면, 미국의 국가과학원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원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미국의 국가과학원의 원사는 2,291명이고, 근 200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그중 외국국적의 원사는 465명인데, 신삼계가 그중 13명이다. 그들중 대부분은 중국에서 본과 혹은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과학연구에 종사한 일류학자들이다. 정계에서, 일부는 자신의 노력으로 고위직에 올랐다. 부국급(副國級), 정국급(正國級)의 지도자를 포함해서.
신삼계의 결함도 있다. 문과생이건 이과생이건 대다수가 학문의 '동자공(童子功)'이 결핍되어 있다. 외국어기초가 보편적으로 떨어진다. 특히 77, 78학번이 심하다. 신삼계는 지금 대부분 은퇴했다. 역사는 이들 집단중 개인개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신삼계라는 이 집단의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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