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왕동흥(汪東興)과 함께 정계를 떠난 4명의 풍운인물의 최후는...?
글: 무한적야사(無限的野史) 천명에 이르는 개국소장(開國少將) 중에서 왕동흥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17살때 홍군에 들어가서, 장정,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치면서 여러번 구사일생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동흥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전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았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왕동흥은 계속 모택동주석의 경위를 맡고, 중앙경위단(中央警衛團)을 장악한다. 그는 일을 열심히 했고, 여러번 특수한 임무도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리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건국후, 왕동흥은 소장의 계급을 받았으며, 관료로서의 승진도 순조로웠다. 말년에는 정치국에 들어가, 상임위원에 당선되어 일약 당내서열5위의 풍운인물이 ..
2021. 2. 12.
예젠잉(葉劍英)가족: 성극이쇠(盛極而衰)
글: 장걸(張杰) 예젠잉가족은 홍콩, 시진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세기말, 예씨일가는 남월(南越)을 웅패한다. 홍콩, 마카오의 여러 홍색자본가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광동에 투자하게 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여러 대형 SOC공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중공을 위하여 홍콩, 마카오의 부호자본가들과의 통전네트워크도 구축한다. 마카오의 카지노왕 스탠리 호(何鴻燊)가족, 헨리 폭(霍英東)가족, 리카싱(李嘉誠)가족은 모두 예씨일가와 빈번하게 내왕했다. 광동현지의 본토세력은 주로 객가(客家), 조산(潮汕), 광부(廣府)의 3대세력으로 나뉘는데, 그중 예씨일가를 대표로 하는 "객가방"의 세력이 가장 컸다. 예씨일가는 시진핑일가와의 관계도 밀접하다. 개혁개방초기, 예젠잉은 시중쉰이 광동의 정무를 담당한 최선의 후보라고..
2020.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