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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유경당(劉慶棠)이 본 "사인방(四人幇)"

by 중은우시 2023. 3. 2.

유경당(劉慶棠) 구술

진도수(陳徒手) 정리

 

유경당이라는 '발레왕자'는 문혁때 관직이 문화부 부부장, 중공10대 주석단성원, 제4기 전인대 주석단성원에 이른다. 1976년, '사인방'이 타도된 후 즉시 격리조사를 받았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문화부 부부장으로 있던 유경당은 사인방과 밀접하게 접촉했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상사와 부하관계, 동료관계, 친구관계이므로 피차간에 애증이 교차할 것이므로 어느 정도 편향될 수는 있고 완전히 객관적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가 사인방을 이해하는데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인식과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1. 요문원(姚文元): 산양처럼 수염을 길렀다.

 

유경당의 인상 속에서 요문원은 비교적 "답답했다(悶)."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오직 주은래, 강청이 그를 지명해서 특별히 "문원동지도 의견을 말해주세요."라고 해야 비로소 몇 마디 할 뿐이었다.

 

기실 그는 말을 아주 잘했다. 내가 초중을 다닐 때, 그의 <불등당집(不登堂集)>을 읽어본 적이 있다.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렸지만, 두 마디는 내가 평생 기억했다. "천무지경(天無止境), 노무진두(路無盡頭)". 그가 창작한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문혁이 가까워오자, 그는 들고 일어나 두 편의 글을 쓴다. 한편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이고, 다른 한편은 <'삼가촌' 연산야화를 평한다><이다. 그는 졸지에 유명인이 된다.

 

다시 이후 상해에서 북경까지, 선전을 담당하면서 사인방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그의 인생에서 대부대귀(大富大貴)한 전성기라 할 수 있다. 1976년 10월 분쇄되어 재판을 받고, 진성감옥(秦城監獄)에 들어갔을 때, 유경당과 나뉘어 갇혔고,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년후, 요문원은 유경당, 지군(遲群), 왕홍문(王洪文)과 함께 TV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발견했다. 요문원이 수염을 기른 것이다. 산양수염이 가슴팍까지 내려왔다. 사람들과 인사할 때도 예전보다 훨씬 밝고 열정적이며, 대화에도 적극적이었다.

 

유경당이 그에게 물어보았다: "왜 수염을 기른 겁니까?" 요문원은 이렇게 답한다: "수염을 기르면 노숙해 보인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가가대소한다. 아주 쾌활하게 웃었다.

 

요문원은 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유경당이 그에게 최근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책을 읽고, 좀 쓰기도 하고..." 나중에 간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요문원은 철학방면의 원고를 쓰는데 변증법에 대한 것이었고, 그는 출판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2. 왕홍문(王洪文): 마오타이 2병은 마실 수 있었다.

 

진성감옥에서 각자 다르게 갇혀 있었지만, 2년의 시간동안 유경당은 왕홍문, 지군과 함께 TV를 보았다.

 

1984년 국경절 열병식을 유경당등은 그날 저녁에 보았다. 다음날 감옥측에서 의견을 물어왔고, 그들은 "충분히 보지 못했고, 다 보고싶다"고 대답한다. 왕홍문은 "맞다. 우리는 다시 보고 싶다." 감옥에서 심사를 책임지는 사람이 동의해주어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왕홍문은 등소평등 천안문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방안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한번은 왕홍문이 다른 사람들과 채소밭으로 갔다. 산보로 신체단련을 겸해서였다. 그런데 걷다가 그가 돌연 쓰러진다. 지군과 유경당이 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붙잡지 못했다. 그런데, 위병이 그를 그냥 두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여러번 이랬다. 당신들은 절대 그를 부축해주지 말라. 그를 부축해주면 10분만에 깨어날 것이고, 그를 부축해주지 않으면, 5분이면 일어날 것이다." 모두 접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과연 5분후에 그는 손발을 움직였고, 위병이 즉시 다가가 그를 부축해서 앉히고 그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그때 그의 얼굴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눈도 뜨지 못했다. 그가 2,3분 앉아있은 후, 일어서려고 했다. 위병과 주변사람들이 함께 부축해서 한바퀴 돌자 그는 얼굴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유경당에게 물어보았다: "금방 내가 병에 걸렸던 것인가? 갑자기 눈앞이 시커멓게 되고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 여러분들 표정을 보고, 내 몸의 흙을 보니 내가 또 병으로 쓰러졌다는 걸 알겠다."

 

왕홍문은 이미 10-20번 쓰러졌다고 했다. 의사는 자율신경실조증이라고 했다는데, 얼굴도 몇번 깨졌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작은 목소리로 유경당에게 말했다: "과거에는 1주일에 두 번정도 쓰러졌는데, 지금은 모두 같이 있다보니 심정이 좋아져서 반달에 한 번 정도 쓰러진다."

 

왕홍문은 원래 몸이 아주 좋았다. 마오타이를 두병정도까지 마실 수 있었고, 주량이 주은래 총리에 가까웠다. 유경당은 또 이런 일도 기억한다. 한번은 경서빈관(京西賓館)에서 회의를 개최했는데, 저녁에 모두 함께 모여서 땅콩을 안주로 술을 마셨다. 그때 허세우(許世友)가 왔다. 그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난 너희가 술을 먹고 있을 줄 알았다. 자 마시자, 마셔." 술이 들어가자 허세우는 왕홍문,유경당등 몇사람과 팔씨름을 했다.

 

나중에 지군은 병으로 먼저 진성감옥을 떠난다. 국경절 열명식이후 다시 유경당도 간염이 발견되어 병원에 입원한다. 왕홍문만이 그 안에 남아 있게 된다.

 

3. 장춘교: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TV에서 사인방재판을 보고 있을 때, 장춘교는 항상 몸을 옆으로 기울여 앉아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고, 법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나중에 공안부 부장을 맡았던 왕방(王芳)은 당시 장춘교 예비심사조의 조장이었다. 예심때, 그는 전후로 장춘교를 11번이나 심문했는데, 장춘교는 "삼불주의(三不主義)"로 일관했다: 말을 하지 않고, 문건을 보지 않고, 서명을 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장춘교는 일관되게 침묵을 유지한다. 오직 단 한번, 왕방이 심문할 때, 장춘교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앙의 결정에 따라 너의 사건은 공안부에서 법에 따라 수리했다. 동시에 그에게 <형사소송법>의 관련규정을 읽어주면서 피고인은 "유죄의 사정 혹은 무죄의 변명을 진술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이때 장춘교는 말을 했다: "나는 반혁명이 아니다. 네가 말하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너의 그 법을 위반한 적이 없다."

 

그는 나중에 아예 말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좋은 것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좋지 않은 것은 더더욱 답변하지 않았다. 일반인들이라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진성감옥에서 방광암에 걸린다. 주은래 총리를 치료한 적이 있는 오계평(吳階平)등 6명의 의사가 진료를 했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유경당은 진성감옥에서 부지불식간에 그와 한번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장춘교는 머리를 박박 밀었고, 아주 뚱뚱해 보였다.

 

유경당은 나중에 감염으로 공안부 산하의 부흥병원에 입원한다. 장춘교는 옆의 병실에 있었다. 찾아온 공안부장을 보자 그는 여전히 무시했다. 공안부장은 "장춘교, 최근 몸이 어떤가?" 그는 답하지 않았다. 공안부장이 다시 말한다: "네가 우리에게 무슨 불만이 있으면, 말해도 좋다." 장춘교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 곁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장춘교, 부장이 묻는데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 너는 예의를 차려라." 장춘교는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장은 할 수 없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얘기하자."라고 말하고 끝낸다.

 

그러나 부장이 병실을 나가기도 전에, 장춘교는 의사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아주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유경당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전에 일할 때 장춘교는 말을 적게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는 진지하게 들었고, 마지막에 몇 마디를 했을 뿐이다. 강청과 상해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인정했고, 그의 말을 따랐다.

 

모주석의 병이 위중했을 때, 영화를 보고 싶어했다. 심지어 삼간삼불간(三看三不看)의 원칙까지 제시했다. 그 일은 유경당, 광둥성위서기 위국청(韋國淸), 홍콩마카오공위 양모(梁某)가 책임지고 홍콩의 쇼브라더스영화사에서 중국과 외국의 영화 500편을 빌려온다. 유경당이 사전에 영화제목과 주제를 심의하고, 그후에 전화를 걸어 장요사(張耀祠), 장옥봉(張玉鳳), 모원신(毛遠新)에게 말해서 사람을 보내 영화사로 가서 영화필름을 받아가라고 했다.

 

1977, 1978년 유경당을 비판할 때, 이 일이 언급된다. 그가 강청, 장춘교에 빌붙어, 특히 장춘교에게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유경당은 이렇게 해명했다. 그건 장춘교에게 억울한 일이다. 그는 신문을 보길 좋아했지, 영화는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매번 명절때 새로운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유경당은 여러번 전화를 들어 빨리 심사해달라고 재촉하면서, 심사가 더 늦어지면 복사를 할 수없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면 그는 겨우 답했다: 내일 아침일찍 일어나서 보겠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그는 의견이 많지 않았다. 항상 "너희들의 심사의견에 동의한다. 아주 좋다..." 어떤 때는 몇 가지 사소한 점을 고치라고 했다. 강청, 요문원은 의견을 아주 많이 제시했었다.

 

장춘교는 유경당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영화보는 걸 좋아하지 않고, 책보는 걸 좋아하고, 신문보는 걸 좋아한다. 매일 홍콩의 몇 개 대표적인 신문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장춘교와 등탁(鄧拓)은 일찌기 <진찰기일보>에서 함께 일한 바 있다. 그때 그는 등탁의 밑에서 일했다. 1965년말 해서파관을 비판하기 전에, 장춘교는 몰래 등탁에게 소식을 전한다. 이는 당시에 위험한 일이었다.

유경당은 강청이 발탁한 미남 부장이었다.

4. 강청: 진성감옥에서 강청에게는 노동을 시키지 않았다.

 

강청은 어떤 때 주은래와 다투었고, 얼굴을 붉혔다. 강청은 유경당등 몇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주총리에 반대한 적이 없다. 다만 우리도 어떤 때는 의견이 달랐다..." 유경당이 보기에 강청은 주은래 총리를 존중했다. 왜냐하면 강청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안에서 주은래는 그녀와 모택동의 결혼을 지지해주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관례에 따르면,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에서 국무원회의를 개최하면 점심식사를 할 때 양표(糧票)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조어대(釣魚臺)에서 개최하면 강청이 참가자들에게 돈을 내고, 양표를 내라고 요구했다. 그녀 자신도 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아주 진지했다.

 

강청은 화를 잘 냈다. 성격이 확실히 불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반성도 하고 상대방에 용서를 구하곤 했다. 이건 조어대 17루 강청의 거처에서 일하던 복무원이 한 말이다.

 

한번은 회의를 개최했는데, 강청이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니, 모모는 문제가 있다" 유경당이 그녀에게 해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강청은 바로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자는 516통지를 위반한 혐의가 있다. 그러면서 유경당 네가 책임질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유경당이 나중에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강청에게 설명했더니, 그녀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잘못 비판했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내지 말아달라. 내가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것이지, 고의로 너희에게 잘못 질책한 것은 아니다. 너희가 비판을 견뎌낼 수 있다면, 모주석이 나를 비판할 것이고, 직접 나를 욕할 것이다. 내가 잘못했으면 주석은 전화로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욕할 것이다."

 

강청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1970년 여산회의후, 임표, 섭군이 도처에 탐문하고 다녔다. 조어대로 와서 강청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는데, 강청은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촬영기기를 모두 거두어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댔다. 임표, 섭군이 조어대를 떠날 때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강청은 모주석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몇시몇분에 임표가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자 모주석은 5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돌연 화를 벌컥 낸다. "이 바보, 멍청이. 네가 대사를 망쳤다. 너는 임표와 단결해서 진백달을 분화시켜야 한다는 걸 모르느냐. 너는 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느냐. 일관되게 조직도 없고, 기율도 없다...." 강청은 깜짝 놀라서 전화통을 붙잡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다. "주석 어떻게 시정할까요?" 모주석이 말했다. 오늘 오후에 네가 사진기, 촬영등을 가지고 임표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말해라. 네가 진심이라고 생각되면 임표가 사진을 찍을 것이다..." 강청은 신속히 촬영기자재를 챙겨서 임표의 거처로 가서 임표에게 잘못했다고 인정한다. 임표는 아주 기뻐하며, 말한다. "그게 무슨 잘못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임표가 모택동선집을 공부하는 사진의 유래이다. 

 

강청은 전문가이고, 극(劇)을 잘 알았다. 극을 본 후에 그녀는 메모를 들고 의견을 제시한다. 일찌기 <홍색낭자군>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백숙상(白淑相)이 나중에 교체된다. 이는 당시에는 정치문제였다. 그녀의 부친은 국민당의 소장계급의 특무였고, 문일다(聞一多)를 해치는 일에 가담한 바 있었따. 해방후에는 심양에서 진압된다. 백숙상은 부친을 그리워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군대표는 그녀가 현대극에 반대했다고 고발한다. 그녀가 주먹을 쥐는 것이 무슨 예술이냐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문제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강청은 그녀를 간부학교로 보내 단련시키면서 돼지를 기르는 것을 책임지게 한다.

 

80년대 유경당은 진성감옥에서 강청을 만난다. 진성감옥에는 4개의 대원(大院)이 있다. 피차간에 바깥으로 나가는 시간이 달라서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평소에 서로 볼 수 없었다. 한번은 유경당이 복도를 걷다가 강청과 맞부닥친다. 강청은 그를 보고는 의외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꺼내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갔다. 강청은 그때 이미 늙은 모습이었고, 걸음도 느렸고, 반응도 더뎠다.

 

1981년 5월 21일, 강청은 그녀의 옥중일기에 이렇게 쓴다: "....진성감옥에는 오직 '관(關)'과 '관(管)'만 있을 뿐이다. 나는 3층건물의 아래층에 있는데, 여기에는 나 혼자만 있다.......나를 감시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나의 주위로 접근할 수가 없다. 서쪽의 '풍장(風場)'도 두 줄이 비어 있다. '풍장'바깥에는 넓은 토지가 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는 거기에서 바람을 쐬었다; 토지 밖에는 몇 장 높이의 전기철조망이 있는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담장 바깥도 감옥의 건물이다. 범인의 창은 외부를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내가 노동에 참가하는 시간은 않지 않다. 신체가 늙었다. 2,3년동안 나는 항상 말했다: 일년의 계획은 봄에 세운다. 1981년의 봄이라면, 나의 세계관을 바꿀 권리를 돌려달라." 그녀는 마치 잊은 듯했다. 10년간의 문혁때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는지.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이 관계로, 감옥에서 강청에게는 노동에 참가하지 않도록 했다. 그저 그녀에게는 옷을 짤 수 있는 도구와 실을 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 한땀 한땀 짜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