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진실한 이릉지전(夷陵之戰): 유비는 겨우 5만을 거느렸고, 제갈량은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중은우시 2024. 7. 26. 14:24

글: 역사전쟁(歷史戰爭)

이릉지전은 삼국시대 "3대전투"중 마지막 전투이다. <삼국연의>는 이릉지전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관우의 피살로 인하여, 제갈량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분개하여 70만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육손에게 화소연영(火燒連營)당하며 전군이 몰살당한다. 육손은 오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의 팔진도에 격퇴당하고, 촉군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연의에서는 이릉지전을 아주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변화무쌍하고 곡절이 많은 스토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이릉지전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1. 이릉지전의 원인

연의에서는 유비가 온 나라의 힘을 모아서 동오를 공격한 원인에 대하여 동오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유비는 의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유비가 동오를 치기로 결심한 원인중에 확실히 그런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유비라는 일대효웅이 단순히 의동생를 위하여 국운을 망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유비를 너무 모르는 것이다. 혹은 주관적으로 감정적인 유비를 생각하는 것이다.

진실한 유비는 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인자하고 순박한 한황실의 계승자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군자(僞君子)", "소인(小人)"도 아니다. 유비의 일생은 분투노력한 일생이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 나갔고, 청하에 이름을 떨쳤다. 이는 절대로 인자함이나 교활함만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비는 모략이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가 내린 결정은 모두 심사숙고를 거친 것이다. 동오가 관우를 죽였을 때, 유비는 확실히 분노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비의 동오에 대한 공격의 근본원인은 아니다. 유비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동오와 일전을 벌이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형주(荊州)이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 있어서 감정적인 타격이었고, 인재의 손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형주를 잃은 것은 촉과 유비에게 있어서 팔 하나를 잘린 셈이고, 심장에 대못을 받은 셈이 되었다.

형주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갈량의 융중대에서 언급한 모략의 핵심도 형주이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촉국에 있어서, 형주는 공수를 자유자재로 벌일 수 있는 전초기지이다. 형주가 있으면, 위, 오를 모두 견제할 수 있고, 형주가 없으면, 촉국은 그저 서남에 갇혀 있는 맹수일 뿐이고, 힘이 아무리 있더라도 쓸 곳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형주를 잃어서는 안된다. 설사 국운을 걸더라도 유비는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관우의 죽음은 그저 유비가 동오에 전쟁을 일으킨 이유중 하나일 뿐이다.

2. 이릉지전의 전황

연의에서는 유비가 70여만의 군대를 이끌고 호호탕탕하게 동오를 정벌하러 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상 유비의 대군은 70만은 고사하고 10만도 되지 못했다.

유비가 직접 이끌고 간 촉군은 3만여명이고, 여기에 오계만(五溪蠻)의 1만여명이 있다. 유비의 총병력은 겨우 5만이 되지 못했다. 손권이 조비에게 보낸 구원요청서신에서도 유비군대를 약 4만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이릉지전에서 유비의 병력수는 개략 5만가량이었을 것이고, 나중에 추가된 병력을 합치더라도 10만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연의에 나오는 70만은 그저 과장된 소설적인 묘사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촉한 당시의 국력과 인구를 감안하면 절대로 70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을.

오나라도 20만이 아니다. 손권이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이끄는 군대수는 약 5만명이었다. 그래서 촉군의 군대는 인원수에서 절대우세를 점할 수 없었다. 그저 한중지전(漢中之戰)의 승리로 촉군의 사기는 오군보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군대인원수를 제외하고, 연의에서 참여인물에 대하여 한 묘사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감녕(甘寧)과 황충(黃忠)은 기실 이릉지전이전에 모두 사망한 사람들이다. 주연(朱然)과 반장(潘璋)등도 전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전공을 세웠고, 강릉지전(江陵之戰)때 조위를 상대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육손은 추격하지도 않았고, 제갈량의 팔진도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조위가 기회를 틈타 동오를 공격할까 우려하여 급히 회군하여 방어를 펼쳤다. 사실도 그가 예상한 바와 같았다. 육손이 유비를 격패한 후, 위나라는 즉시 남하하여 동오를 공격한다. 그러나 육손이 유비를 추격하지 않고, 위군의 공격을 미리 대비하였기 때문에 위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고 만다.

3. 유비의 출정시 왜 제갈량을 데려가지 않았을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연의에서 묘사한 것은 제갈량이 유비가 동오와의 맹약을 깨고 동오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비는 의동생 관우의 죽음에 비분강개하여, 출정하여 복수하겠다고 다짐했고, 그리하여 제갈량을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촉한의 영혼인물이고,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역사상 제갈량이 진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유비가 죽은 이후이다.

유비의 성공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천을 취했을 때, 유비의 군사참모는 주로 방통(龐統)과 법정(法正)이었다. 이엄(李嚴)이 유비에 투항하고나서 제갈량은 비로소 뒷수습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한중지전에서 전체 전투를 지휘한 것은 유비였고, 선봉에 선 것은 장비와 황충이었다. 제갈량은 그저 대본영에 앉아 있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유비에게 지극히 중요한 몇차례의 전투에서 제갈량은 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는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유비에 있어서, 제갈량은 주로 후방에서 물자조달을 책임지고 대본영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지, 군대를 지휘하여 싸우는 군사참모는 아니었던 것이다.

후방에 남아 있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거기에서도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신임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방통, 법정같은 사람과 비교하면, 제갈량은 확실히 '주변인물'이었다. 군사분야에서는 제갈량이 기본적으로 끼어들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가 동오를 정벌하기로 결정했을 때, 제갈량은 법정이 있었다면 유비를 말릴 수 있었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행동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발언권이 없었다. 유비도 당연히 그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연의에 역사와 부합하는 사실도 있다. 그것은 바로 육손이 확실히 화공을 취했다는 것이다. 유비는 이번 전투에서 너무 상대방을 경시했다. 조비는 유비의 군대주둔방식을 보고 확실하게 말한다: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어찌 칠백리군영으로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포원습험조이위군자위적소금(包原隰險阻而爲軍者爲的所擒)' 이는 병가의 금기이다.

여기서 포원습험조의 포는 초목이 무성한 곳을 가리키며, 시선이 가로막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은 광활하고 평탄한 곳으로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습은 저지대의 습지로 쉽게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어 위험하다는 것이다. 조는 군대가 행군하는데 방해되는 곳으로 쉽게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험은 험준하여 통과하기 쉽지 않은 곳으로 손쉽게 기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주요한 문제는 유비가 이릉에서 반년간이나 머물렀다는 것이다. 정월에서 유월까지. 비록 촉군이 여러차례 도전했지만, 오군은 여전히 굳게 지키며 성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가을이 되기를 가디린 후에 다시 공격하고자 한다.

이런 조치는 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촉군은 오나라의 경내로 2,3백리를 들어왔다. 자신의 후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보급이 쉽지 않다. 이치대로라면 속전속결을 해야 하는데, 유비는 왜 반년이나 시간을 소모했다.

그렇다면, 유비가 어떻게 해야 이런 대치국면을 타파하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삼군지중(三軍之衆), 가사필수적이무패자(可使必受敵而無敗者), 기정시야(奇正是也),...범전자(凡戰者), 이정합(而正合), 이기승(以奇勝)."

그 뜻은 대체로 이러하다: 전체 부대가 적과 대항하면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정확히 "기(奇)"와 "정(正)"을 잘 운용해야 한다. 무릇 작전이라 함은 정병(正兵)으로 적과 정면으로 교전을 벌이고, 기병(奇兵)을 써서 상대방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파고들어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의 부대에서 무엇이 정이고 무엇이 기인가?

유비의 주력이 이도(夷道) 포위공격하는 것이 정이다.

그럼 기병은 무엇인가?

첫째, 강북의 황권(黃權)부대이다.

황권의 부대는 강북에 있고, 유비의 주력은 강남에 있었다. 이때 황권의 부대는 육손의 동오군과 이릉에서 대치하고 있지 않았다. 이릉을 우회하여 계속하여 동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저수(沮水)를 건너 형주의 각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유비는 형주에 오래 있었고, 형주의 사족들과도 모두 안면이 있었다.

당시 동오가 형주를 기습하여, 많은 형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투항했지만, 내심은 비교적 유비의 통치를 원하고 있었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동정을 개시한 후, 남부형주에서 계양(桂陽), 영릉(零陵)등지는 반란이 일어나 호응했다. 오직 장사(長沙)만이 동오의 보즐(步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아무런 이상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만일 황권이 촉군을 이끌고, 육손이 방어하는 이릉을 우회하여 동쪽으로 진격하여 형주의 각부로 쳐들어갔다면, 반드시 일련의 나비효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즉, 만일 황권의 부대가 형주로 진격했더라면, 상대하는 적군은 단지 장사에 있던 보즐의 군대뿐이다.

만일, 육손이 이릉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저 두눈 멀거니 뜨고 황권의 군대가 저수를 건너 당양(當陽), 맥성(麥城)으로 쳐들어가고, 그후 남하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키면서 강릉까지 쳐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육손이 이릉을 포기하고 황권의 부대를 추격한다면, 이릉은 방어가 비게 되고, 유비는 일부 병력을 보내 강북으로 건너가 이릉을 공격하게 할 수 있었다. 이릉만 공격했다면, 이도(夷道)는 고성이 되어 오래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동오의 주력은 이릉에서 유비와 대치하고 있고, 형주의 각군은 수비군사의 수가 비교적 적어, 방어가 허술했다. 황권의 부대는 자연히 파죽지세로 형주의 각성을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비를 그리워하는 형주의 사족들은 자연스럽게 안에서 호응해주었을 것이고, 동오의 형주통치는 자연스럽게 와해되었을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유비집단의 상당한 일부가 형주사람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갈량 같은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원래 유표(劉表)의 부하였고, 풍남(馮南), 부동(傅彤)같은 사람도 형주사람이다.

황권이 부대를 이끌고 형주로 들어가면, 이는 마치 "귀향단"과 같은 것이다. 형주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는 것까지는 몰라고, 유비군을 최소한 환영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 유표가 형주를 통치할 때, 강동과 -여러 해동안 싸웠기 때문에 피의 원한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오에 통치를 받는 것을 형주사람들은 내심으로 기꺼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황권이 저수를 건너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더라면, 유비의 촉군주력은 이도 일대의 동오군대 주력을 협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동오의 주력이 퇴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포위섬멸이었을 것이다.

혹은 황권이 이도를 공격하여, 동오의 이도로의 보급선을 끊더라도, 이도는 스스로 무너졌을 것이다.

두번째 기병은 바로 유비의 주력이다.

손항(孫恒)이 성을 굳게 지키면서 나와 싸우려고 하지 않으면, 유비는 일부 병력으로 이도를 포위하고, 1,2만의 병력을 보내 이도를 우회하여 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여 형주의 중요도시 강릉(江陵) 혹은 공안(公安)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선은 공안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안은 강남에 있고, 강릉은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공안을 함락시키고 다시 강을 건너 강릉을 함락시키면 기본적으로 형주를 되찾아 올 수 있는 것이다.

강릉과 공안은 모두 유비가 오랫동안 경영해온 지방이다. 유비의 대군이 도착하면 반드시 성내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이때 유비는 남하한 황권의 부대와 강릉에서 회합할 수 있었다.

육손이 쫓아온다고 하더라도, 유비와 황권 맞서 싸우게 되면 야전에서 반드시 패배했을 것이다.

만일 공안 혹은 강릉이 유비에 투항하거나 유비가 점령하게 되면, 손항이 지키고 있는 이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원래 그는 유비를 막았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인, 아무런 쓸모없는 성이 되어버릴 것이다.

유비가 강릉과 공안을 점렴하면 형남사군(荊南四郡)을 수복하는 것은 손바닥뒤집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전 자신의 형주에서의 기반을 절반은 손에 넣은 것이 될 것이다.

동오의 "거적어국문지외(拒敵於國門之外)"의 전략은 완전히 파탄났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안정요소가 있다: 위나라.

이때 양양(襄陽)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조인(曹仁) 혹은 하후상(夏侯尙)이다.

만일 두 사람이 유비가 동오군을 격파하고 강릉을 점령하는 것을 본다면, 분명히 그냥 좌시하지는 않고, 남하하여 유비를 쳤을 것이다.

이전에 조비는 좌산간호투(坐山看虎鬪). 산에 가만히 앉아서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구경한다는 심정으로 유비와 육손의 전투를 보고 있었다.

다만, 승부가 이미 가려진다면, 조위는 반드시 화중취율(火中取栗)하여 전체 형주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동오의 형주에서의 통치는 이미 와해되었고, 육손과 손항이 할 수 있는 것은 형주를 포기하고 전력을 다해서 강동으로 돌아가 거기만이라도 지키는 것이다. 그후에 동오는 유비와 조인, 하후상이 형주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조인, 하후상이 먼 길을 달려와서 유비의 주력이 방어하는 강릉성을 공격한다면, 분명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아마도 위와 오가 연합하여 함께 유비를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동맹군의 관계는 아마 촉한과 동오의 관계보다도 불안정할 것이다.

승리를 거두든 패배를 하든 쌍방은 분명 바로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유비는 그저 방어만 하면서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아마도 적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어부지리를 거두는 것은 유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전투를 통해 유비가 형주를 되찾았다면, 촉한의 세력은 크게 증강되고, 유비는 비로소 천하를 쟁탈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익주라는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주를 탈취하면 유비는 북상하여 양양을 칠 수도 있고, 동시에 한중을 지키는 위연으로 하여금 전군을 이끌고 자오곡을 나가 장안을 공격하여 관중을 점령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