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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88

황소양(黃蕭養)의 난: 명나라때 남쪽지방 최대규모반란 글: 미남덕(米南德)​1449년은 대명왕조에 다사다난했던 한 해이다. 먼저 명영종(明英宗)이 토목보(土木堡)에서 패배한 후 오이라트몽골에 포로로 잡히고, 다시 오이라트몽골은 북경을 몇달간 포위공격한 바 있다. 재정지출이 커서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의 이동조차 난국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은 인심이 흉흉하고, 여러가지 감춰왔던 문제들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된다.​예를 들어, 영남(嶺南)의 주강(珠江)델타지역은 황소양집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규모반란이 일어난다. 이들 반란군의 출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배후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요소가 숨어 있다. 나중에 실패로 끝나면서 역시 광범위학 영향을 끼쳐, 이 지역의 역사발전에 수백년간 그 여파가 미치게 된다.​고대 통일.. 2024. 9. 17.
이성량(李成梁)의 군현조선론(郡縣朝鮮論)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에 이성량은 동북아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그가 요동(遼東)에 있는 동안 여진(女眞)의 굴기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명나라에 충성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8년의 한 사건은 이성량의 허약과 야심을 보여준다. 이성량이 조선을 군현으로 삼으려한 거동은 이미 명말군벌할거의 싹이 드러난 것이다. ​광해군의 계위를 둘러싼 갈등​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은 조선 선조(宣祖)의 차남(次男)이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도 않은 상황하에 1608년에 왕으로 등극한다. 급히 등극하게 되고, 게다가 명나라에서 그를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것을 거절당하자, 광해군의 통치는 불안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통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광해군은 즉위ㅜ 즉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2024. 9. 4.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민국(閩國): 망국의 조짐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글: 춘추소력(春秋小歷)​오대십국시기에 복건은 민국이 할거하고 있었다. 민국의 경내에는 세 개의 중요한 성이 있다. 각각 복주(福州), 천주(泉州)와 건주(建州)였다.​복주는 민국의 도성이니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천주는 민국의 왕씨(王氏)가 발원한 곳이고, 경제도 가장 발달한 지역이니 중요한 세금원이었다. 건주는 군사요충지로,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전국이 영향을 받을 정도이니,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복주는 황제 왕연희(王延羲)가 차지하고 있고, 건주를 다스리는 사람은 자사(刺史) 왕연정(王延政)이며, 천주는 자사 왕계업(王繼業)이 관리하고 있었다.​왕연희와 왕연정은 이전에 여러번 갈등이 있었고,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쨌든 두 사람은 형제간이고, 금방 관계를 회복하고, 군신관계도 .. 2024. 8. 20.
사보의 난(沙普之亂): 명나라말기 운남(雲南)의 혼란상황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의 혼란한 국면에서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 후금(後金)등 유명한 반란세력을 제외하고, 사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서남토사(西南土司)들도 있다.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들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후로 36년간 지속된 사보의 난(沙普之亂)이다. 사보의 난은 운남(雲南)지구에 침중한 재난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운남에서 이백년간 지속되고, 거의 명나라의 존속시기와 나란히 했던 목씨(沐氏)가족의 운남통치도 끝장내게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명나라말기의 운남​사보의 난은 운남 남부에서 발생했다. 이곳은 토사(土司)가 많고, 한인(漢人)은 비교적 적었다. 게다가 외국에 이웃하고 있었으며, 당시는 국경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늘 .. 2024. 8. 19.
명나라말기의 "가정병(家丁兵)": 유일하게 전투력이 있던 부대이며 명나라멸망의 원인이 되다.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의 소설을 보거나 TV드라마를 보면, 명나라말기에 위소병(衛所兵)은 이미 완전한 거지군대(乞丐軍)가 되어 버렸고, 변군(邊軍)도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유일한 역량은 각 장군들의 개인무장세력인 가정병(家丁兵)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가정군을 기르는 돈은 부정부패로 얻은 군비였다. 그렇게 하여 악순환이 이어진다. 군대의 전투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가정의 전투력은 갈수록 강해진다. 그렇다면, 가정병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명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을까, 아니면 늦춰주었을까?​명나라 가정의 탄생​가정제(嘉靖帝)때의 신하인 전미(錢薇)가 쓴 에 따르면, 가정의 기원은 정통제(正統帝)때부터이다. 정통시기 선대순무(宣大巡撫) 나형신(羅亨信)은 가장 먼저 가정군을 두자고 건의한 인물.. 2024. 8. 19.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條約)": 왜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이를 국치(國恥)로 여길까?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청나라초기 강희(康熙)연간에 중국역사상 첫번째로 중요한 대외조약이 체결된다. 그것은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이다. 이 조약은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그리고 그 논쟁은 아주 재미있다. 즉 조약을 체결한 쌍방은 모두 공식적으로 이 조약이 불평등조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쌍방의 학술계와 민간에서는 시종 두 가지 전혀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조약이 러시아에 불평등한 조약이어서 러시아의 국치라고 보고, 청나라쪽에서는 더더욱 이 조약은 전형적인 치욕조약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네르친스크조약의 내력에 대하여는 아마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러시아는 16세기이래 대외확장을 추구해왔다. 소위 쌍두응(雙頭鷹)으로 유럽을 공략하는 것은 놔두고라도, 동방에 대하여 우랄산맥을.. 2024.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