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
미국학자 엘리엇(Mark C. Elliott)는 <만주의 길: 팔기제도와 청나라의 민족인식>이라는 저서를 통해 만주족의 민족특성을 '만주의 길(The Manchus Way)'로 설명했다.
소위 "만주의 길"은 만주 최초의 생활방식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이민족왕조의 방식과 비교하자면, 요, 금, 원과 다른 방식이다. 기본요소는 마술(馬術), 궁술(弓術), 만주문자와 소박한 풍속이다.
이는 모두 청나라조정이 강조한 것이고, 만주인의 만주화를 강화한 것이다. 어떤 때에는 다른 약간의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조상을 공경하고, 황제에 충성하는 것을 '용감한 품성'이라고 보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명과 복식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무엇이 "만주"인가? 글자 자체로 볼 때 "만주"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서로 다른 시간대에 각계의 "만주"에 대한 인식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만주"는 "동북(東北)"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먼저 자료를 찾아보기로 하자.
- 글자의 의미로 본 "만주"
현재까지 "만주"의 의미를 둘러싼 연구성과는 아주 많다. 거기에는 컨센서스를 이룬 것도 있고 이견이 있는 것도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문제 '만주' 칭호의 원류와 의미를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만주" 칭호의 원류
"만주"칭호의 기원에 관하여 십여가지의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1) 관점1. "지산주(地産珠)"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설
이 견해는 러시아의 인류학자 시로코고로프(S. M. Shirokogoroff, 1887-1939)가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만주에서 옛날에 구슬(珠)이 나왔는데, 중국에서 수입한 후 중국인들이 아주 좋아해서 '만주(滿珠)의 땅'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역사학자 풍가승(馮家昇)은 이렇게 보았다. 이 견해는 아마도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나오는 "건륭42년(1777년) 팔월 십구일 유지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왕조가 처음 일어날 때, 옛 이름이 만주(滿珠)였다. 소속은 주신(珠申)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만주(滿珠)로 개칭되었다. 한자로 바뀌면서 만주(滿洲)로 와전되었다."는 구절을 잘못 읽은 것이다.
실제로, 건륭제가 유지를 반포한 본래 의도는 그저 만주족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었고, "만주"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2) 관점2: '만주(蠻主)'라는 단어의 전음(轉音)이다.
이 견해는 학자 영은승(寧恩承, 1902-2000)이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이다. 그는<만주자의고(滿洲字義考)>에서 이렇게 적었다: "현재 우리는 모두 남쪽사람을 만(蠻)이라고 부르고, 어떤 때는 북이(北夷)에 사용한다. 명나라때의 전적은 청나라사람을 토만(土蠻)이라고 불렀고, 그 군주를 만주(蠻主)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군주는 아마 먼저 만주라고 불렀고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에 자리잡은 것)후 의미가 좋지 않다고 보아 만주(滿珠)로 개칭한다. 그후에 지명으로 쓰였다. 그리고 만주(滿洲)로 개칭되었다.
(3) 관점3: "이추득구어저(夷酋得救於猪,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돼지의 도움으로 살았다)"에서 유래했다.
이 견해는 대체로 이러하다.
고대 동이(東夷)와 한족의 전투과정에서 동이의 우두머리(추장)이 패전하여 돼지우리로 도망쳤고, 돼지들 틈에 숨는다. 추격병이 쫓아왔으나 돼지들만 보고, 동이의 추장은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만저(滿猪, 모조리 돼지이다)"라고 소리친 후 후퇴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동이의 추장은 나중에 나라를 건립하는데 그 나라 이름을 "만저(滿猪)"라고 한다. "주(洲)"와 "저(猪)"는 발음이 유사하다. 그리하여 "만주(滿洲)"로 와전된 것이다.
시로코고로프는 <만주족의 사회조직>에서 이 견해를 언급했다. 다만 그는 이를 "한족의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영은승은 <만주자의고>에서 "러시아인에 의해 와전된 설"이라고 보았다. 풍가승은 이를 황당무계하다고 보았다.
(4) 관점4: "만중지중출(滿仲之重出)"
이 견해는 "징기스칸은 미나모토노요시쓰네(源義經)이다"라는 것과 유사하다. 그중 일본학자 이문정부(伊文貞夫)가 <수필>에서 묘사한 것이 가장 상세하다:
"청나라의 선조는 미나모토노요시쓰네(源義經)에서 나왔다. 요시쓰네는 하이(蝦夷, 현재의 홋카이도)를 거쳐 금나라로 건너가서 공을 세워 집안을 이르킨다. 노아간추(奴兒干酋, 누르하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가 대를 이었다. 그 자손 맹특목(孟特穆)이 건주도독이 되니 청나라의 조상이다.
요시쓰네는 문치5년 윤4월 하이를 거쳐 금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남송이 존재했고, 금나라가 강성했다. 요시쓰네의 성은 원(源)인데, 바로 맹특목의 시호인 원황제(原皇帝)와 부합한다.원(原)과 원(源)은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다. 요시쓰네의 선조중에 만중(滿仲)이라는 사람이 있다. 만주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외에 일본의 사학자인 이치무라 신지로(市村瓚次郞, 1864-1947)는 <청조국호고(淸朝國號考)>에서 유사한 견해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본질적으로 근대일본학자들이 동북을 노리면서 날조해낸 가설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믿을만한 주장이 아니다.
(5) 관점5: "숙신(肅愼)"과 "주신(珠申)"의 전음(轉音)이다.
이 견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만주원류고>이다:
"건륭42년(1777년) 팔월 십구일의 유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리 왕조가 처음 일어날 때, 옛 이름이 만주(滿珠)였다. 소속은 주신(珠申)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만주(滿珠)로 개칭되었다. 한자로 바뀌면서 만주(滿洲)로 와전되었다. 기실 고숙신(古肅愼)이고 주신(珠申)의 대음(對音)이다."
<대금국지(大金國誌)>에 금나라의 원래 이름은 주리진(珠里眞)이다. 본조의 옛 명칭은 만주(滿珠)인데, 소속은 주신(珠申)이다. 주리진과 음이 비슷하다. 다만 약간의 완급의 차이가 있다. 실은 모두 숙신(肅愼)의 전음이다. 나중에 여진(女眞)으로 와전된다. 혹은 여진(慮眞)이라고도 하는데, 숙신씨의 후손이고, 발해(渤海)의 별족(別族)이다.
(6) 관점6: "만절(滿節)", "만식(滿飾)"과 "만번(滿番)"에서 유래했다.
"만절"설은 이러하다. "만주"라는 말은 북송 <논어주소(論語注疏)>에 나오는 "구이(九夷)" 중 "만절(滿節)"에서 나왔다. 나중에 음이 바뀌어 만주(滿珠)가 되고, 다시 바뀌어 만주(滿洲)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치무라 신지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학자 부랑운(傅朗雲)은 <동북민족사략(東北民族史略)>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주"라는 단어는 아마도 '구이'중의 '만식'에서 변해져 내려온 것일 것이다.
"식(飾)"을 나누면 '주(州)'가 되고, 이는 건주(建州)의 '주'와 같다. 다시 삼점수를 더한 것은 고의로 덧붙인 것이다. 그 의미는 수덕(水德)을 나타내고, 명나라의 화덕(火德)을 극하는 의미이다. 진한시대에는 '만번'이라고 불렸다.
그외에 학자 왕경의(王景義)는 <만주족형성중의 몇가지 문제에 관한 탐토(探討)>라는 글에서 "만주(滿住)"와 "만주(滿珠)"라는 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만주"는 아마도 "만번"이라는 말이 변해서 전해진 것이라고 보았다.
(7) 관점7: "파저강(婆猪江)"이라는 이름에서 바뀌어 전해진 것이다.
대만학자 진첩(陳捷) 선생은 <만주총고(滿州叢考)>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만주"라는 단어는 "하다(哈達)등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이 부락이 거주한 적이 있는 산천의 이름엣 따온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건주여진의 수령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선조중 한명인 이만주(李滿住, ?-1467)시대에, 그가 살고 있던 "파저(婆猪)"강이 바뀌어 '만주'가 되었다.
(8) 관점8: "물길(勿吉)"과 "말갈(靺鞨)"의 음이 바뀐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먼저 "물길"이 "말갈"로 바뀌고, "말갈"이 다시 "만수(滿殊)"로 바뀌고, 마지막으로 "만주(滿洲)"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치무라 신지로는 <청조국호고>에서 특별이 이 견해를 소개했지만,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명한 청사학자인 왕종한(王鍾翰, 1913-2007)은 <만주명칭문제를 얘기한다>라는 글에서 이 견해에 동의했을 뿐아니라, 아주 상세히 논증했다.
(9) 관점9: "만돌(瞞咄)"에서 나왔다.
이 견해는 소련학자인 고르스키가 가장 먼저 제기했다. 그가 보기에 "만주"는 동호(東胡)민족의 존호(尊號)이다. 실위(室韋), 말갈은 그 추장을 '만돌'이라고 불렀다. 이 '만돌'이 지금의 '만주'이다. 이에 대하여 풍가승은 <만주명칭의 여러가지 추측>이라는 글에서 동의했을 뿐아니라, 비교적 상세한 해석을 붙였다.
그러나, 이탈리아학자인 조 스탈리는 이에 대해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그는 <만주구명신석>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대북경말에서 한자 '돌(咄)'은 'chu'라고 읽지만, <북사>시대에는 "tu"로 읽었다. <강희자전에서도 단지 "tu" 혹은 "to"로 읽었다.
(10) 관점10: 범어 "만수(曼殊)"에서 나왔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은 주로 위원(魏源), 장태염(章太炎),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등 중국일본학자들이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아주 많을 뿐아니라, 논거도 비교적 충분하다.
먼저, "만주라는 명칭은 본토에서 기원한 것이지 외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관적염칭은 동토에서 나왔는데, 동토내의 고유명칭을 버리고, 스스로 만주라고 칭한 후에 나온 만수를 만주라는 이름의 뿌리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만주족이라는 이름은 1635년에 이미 정식채용되었다. 그러나 5세 달라이라마가 만주칸(홍타이시, 청태종)을 "만수실리보살(曼殊室利菩薩)에 봉한 것은 1642년의 일이다." 시간적으로 논리적이지 못하다.
불교체계에서 "만수행존자(曼殊行尊者)"는 바로 "문수보살당세신(文殊菩薩當世身)"이다.
(11) 관점11: "만차(蔓遮)"라는 말에서 왔다.
청사학자 손문량(孫文良, 1933-1995)이 <만족의 굴기>라는 글에서 제기한 것이다.
만차의 땅은 지금의 길림성 집안현내에 상당한다. 여기는 여진여러부락의 고향이다. 즉 명나라때 건주여진이 남천한 곳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만주는 명나라때 여진의 부락명칭이며, 기원은 그들이 거주하는 만차산에서 온 것이다. 오랫동안 민간에서 유전되어 내려왔고, 누르하치때까지의 여러 만주글, 조선인의 발음은 만차이다. 홍타이시가 한문으로 만주로 적은 것이다.
(12) 관점12: 건주여진수령의 존호인 "만주(滿住)"에서 온 것이다.
이 건해는 저명한 청사학자 맹삼(孟森, 1869-1938)이 그의 저서 <만주명의고>에서 가장 먼저 제기했다.
간단히 말해서, "만주"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명나라 문헌에 나오는 "만주(滿住)"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만주"는 수당때의 "만돌(瞞咄)"이 바뀌어 온 것이며, 모두 추장의 존칭이다. 근원은 "만수(曼殊)"이다. 오늘날 보기에 "만주설((滿住說)"은 많은 정도로 '만돌설(瞞咄說)'과 '만수설(墁殊說)'의 보완이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에 동의하지만, 이탈리아학자인 조스탈리는 반대의견을 제기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만주는 명군에 격살당한 후, 집안계보가 기본적으로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의 민족을 부르는 칭호로 쓴다는 것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13) 관점13: "건주(建州)"에서 유래한다
만청의 종실자제인 성백희(盛伯希)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주" 두 글자는 실은 "건주"라는 단어를 바꾼 것이다. 1960년대, 일본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泰助)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주"라는 단어는 마땅히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한 이후에 붙인 국명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일본의 청사학자인 칸다 노부오(神田信夫, 1921-2003)는 유사한 견해를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최소한 천총6년(1632년)이전에 누르하치의 국가는 계속하여 '만주'라고 불려왔다.
(14) 관점14: '만주부(滿洲部)에서 유래한다.
학자 왕경의는 <만족형성중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탐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신각라의 선조인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 창건한 "만주부"는 기실 역사상의 "알타리(斡朵里部)"이다.
원나라때, 중앙은 만주부의 옛땅에 알타라만호부(斡朵里萬戶部)를 설치하여, '만주'라는 원래 이름을 대체한다. 명나라는 다시 이곳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한다. 그리하여 건주여진이 통일된 명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알타리인은 자신이 '만주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문노당(滿文老檔)>에 '만주인'이 나타나는 빈도가 아주 높은 것이다. 기타 부족도 알타리인을 만주인으로 보았다. 알타리부의 사람은 건주삼위(建州三衛)의 핵심부족중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건주여진을 '만주'라고 불렀다.
둘째, "만주"칭호의 의미
(1) 관점1: '청량(淸亮)'
러시아의 목사인 로스(The Rev., J. Ross)는 저서 <만주인>에서 "만주"라는 단어를 '청량'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같은 러시아인인 시로코고로프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는 아마도 '청순'하다는 의미를 지닌 대청왕조의 명칭에서 온 오해일 것이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만문문헌이건 한문문헌이건 '만주'라는 단어가 '청량'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 것은 없다.
(2) 관점2: 용맹(勇猛)
이치무라 신지로는 고증후에 몽골어의 'mong'이 여진어의 '만주'이며, 그 뜻은 '용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는 언어학적으로 충분한 뒷받침이 없다. 그래서 풍가승은 이를 '망설(妄說)'이라고 하였다.
(3) 관점3: '신전(神箭)' 혹은 '강력한 화살'
어떤 학자는 고증후에 '만주'는 '신전(신의 화살)'이라는 뜻이며, 우록(牛祿, niru)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또 어떤 학자는 manju(滿洲)는 복합어로서 mangga(어렵다. 단단하다, 강하다, 강인하다. 뛰어나다. 고귀하다. 잘한다)와 jugoro(화살)의 조합이라고 본다. 즉 강력한 화살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만주족이 "화살을 잘 만들고, 활쏘기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보면, 주변의 민족들이 그들을 인식하는 주요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견해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고 있다.
(4) 관점4: "용사(勇士)" 혹은 "영웅(英雄)"
만주족학자인 오랍희춘(烏拉熙春)은 <언어로 논하는 여진만주의 족칭>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보았다. '만돌', '만주(滿住)'이건, '만주(滿洲)'이건, 원래 의미는 모두 '사냥꾼', '용사' '영웅'이라는 뜻이 있다.
(5) 관점5: "물(水)"의 의미를 담고 있고, 불(火)을 이긴다(克)는 의미이다.
범문란(范文瀾)은 <중국통사간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滿)자는 만주(滿住)의 첫글자이고, 주(洲)자는 '건주(建州)'으 둘째글자이다. 주(州)의 옆에 삼점수를 붙여서 주(洲)가 되었다. 만(滿), 주(洲), 청(淸)은 모두 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나라의 성씨가 주(朱)이고, 주명(朱明) 두 글자는 모두 불(火)이라는 뜻이므로 오행상극의 원리에 부합된다."
(6) 관점6: 금(金)
일본학자 칸다 노부오는 애신(愛新)이 '금'이라는 뜻인데, 이는 '만주'라는 단어의 번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7) 관점7: 흑룡강위의 사람
이탈리아학자인 조 스탈리는 <만주구명신석>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견해를 제기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의 동의는 받지 못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당시의 만주족은 흑룡강을 "사하렌우라(薩哈連烏拉)"라고 불렀고, '만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8) 관점8: 위대, 역량 및 권위
이탈리아 학자 조 스탈리는 "만주"라는 단어가 누르하치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manju'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퉁구스어로서 예로부터 존재했다. 위대, 역량 및 권위라는 뜻을 가졌다. 누르하치 시기에 이 단어를 채용한 것은 건주여진이 강대해지고 힘이 있어져서 더욱 'manju'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소결론
이를 보면 아주 간단해 보이는 두 가지 문제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동의하는 정설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위 문제를 둘러싼 연구는 언어학의 어음, 어의, 어경, 어사성질, 어원 및 역사언어지명, 역사지리학, 지명고증, 민족언어학, 민족어의, 역사문헌학등 여러 학과에 걸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 학자들의 공동노력으로 하루빨리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리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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