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금린(楊錦麟)
1840년이래, 중국인은 눈물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미망(迷茫)과 배회(徘徊) 속에서 항쟁, 학습, 융합, 개혁과 개량을 진행했다. 외부열강세력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부정치투쟁이 끊이지 않고, 내외부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민중의 인식수준도 제고되고, 공업도 발전되었다. 여러가지 추진요소들이 합쳐지고 모이면서 변화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열강들의 교주만(膠州灣), 광주만(廣州灣)등의 조차는 중국인들을 자극했고, 이는 근대중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치욕은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놀라고 난 이후에는 회의, 방황, 곤혹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 민족정신의 대각성이고, 변화의 가속이다. 유신변법, 신정(新政), 공화, 20년도 되지 않는 기간동안 서방국가들이 수백년이 걸려 걸어갔던 길을 걸었다. 중국사회는 급격히 변화했다. "방생방사(方生方死), 방사방생(方死方生)"(살아야 죽고, 죽어야 산다). 사망과 탄생은 고난에 깊이 빠진 중국을 찢어발겼다.
"삼천년만의 대변국(三千年未有之大變局)"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우세와 열세, 곤경(困境)과 순경(順境)을 진정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중국역사의 내재적 논리가 발전한 필연적 결과이다.
서방문명의 강력한 충격하에, 중화문명이 직면한 것은 엄준한 도전이었다. 근대중국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중국사회발전과 변혁의 구동력은 무엇일까?
중국의 변화를 이끈 각종 구동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서로 교차하고 겹쳤을까? 또 어떻게 중국문명의 진전에 영향을 주었을까?
이에 기하여, 여기에서는 근대중국을 살펴보고, 내재적인 정치적 변화논리 및 사회발전규율을 탐색하여, 역사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1
저명한 사학자인 장정불(蔣廷黻)은 임칙서(林則徐), 기선(琦善)과 아편전쟁의 관계를 토론할 때 했던 말은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장정불은 이렇게 말했다. 기선은 명을 받고 광동으로 가서 영국과의 충돌을 처리할 때, 확실히 군사적으로 영국과 자웅을 겨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개략 양국의 군사상의 차이를 알고 있었고, 전쟁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심시도세(審時度勢)하여 이성적인 선택을 내리고, 나라를 구하면서, 청나라의 약간의 체면을 살린다.
그러나, 기선의 이성적인 선택은 그 개인에게 거대한 치욕을 가져다 주었을 뿐아니라, 중국인들이 죽이라고 소리치는 매국노가 되어버린다. 이는 기선에게는 개인적으로 비극이다. 더더욱 근대중국에게는 거대한 실책이다. 장정불의 추리에 따르면, 만일 기선이 나서서 중영간의 충돌을 해소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은 분명 임칙서가 설정한 바대로 전쟁을 선택했을 것이고, 중영간에 큰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하면 반드시 패배하고, 패배하면 반드시 재빨리 화의했을 것이다. 빠르게 화의했으면 중국의 손실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고, 또한 중국은 최소 20년 앞서서 유신으로 나아갈 수 있고, 정치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은 일본보다 30년앞서서 서방으로 향하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나중의 정치, 문화적인 동탕과 풍파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장정불의 이 견해는 비록 잔인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다. <남경조약>은 중국에 손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홍콩을 할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던 '중앙제국'에 있어서, 1,200만원의 배상금은 확실히 껌값이었다. 오구통상(五口通商)은 그저 원래의 광주라는 일구통상(一口通商)의 기초 위에 4개의 통상항구를 증가시키는데 불과했다. 기껏해야 4개의 '경제특구'를 마련해준 것이다. 청정부는 잠깐의 아픔이 있었지만 곧 다행이라고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어쨌든 지나갔고, 중국은 다시 제국의 원래 궤도로 돌아가면서 '천조상국(天朝上國)'의 아름다운 꿈을 계속하여 꿀 수 있었으니까.
청나라정부는 확실이 대난임두(大難臨頭)의 긴박감이 없었다. 중국의 지식엘리트들은 임칙서, 위원(魏源)등 소수를 제외하고 영국과 이전의 '만이(蠻夷)'들간의 차이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영국인들이 주변의 만아국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과거 200년간 동남연해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어쨌든 동문동종(同文同種)이 아닌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는 역사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증명했다. 영국이라고 하여 중화제국이 다르게 볼 것인가?
아편전쟁은 표면적으로 보면 아편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기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편무역은 금지되지 않았다. 중국이 이 전쟁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것은 전투가 아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중국은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는다. 즉, 중국의 국제무역수지는 여전히 정상적인 무역으로는 균형을 이룰 수 없었고, 아편은 여전히 영국이 대중무역에서 균형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전쟁이 끝났고, 평화가 다시 도래했다. 그러나, 중국인은 이 전쟁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영국인이 전쟁까지 불사했던 근본목적도 알지 못했다. 중국은 이 5개의 새로 개방한 통상항구를 통해 서방의 근대이래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구통상을 통해 중국시장을 배양하거나, 신흥산업을 배양하거나, 새로운 사회계급과 계층을 배양하지도 못했다. 청정부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취생몽사하면서, 계속 중국문명의 옛날옛적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다.
중국이 실패한 원인은 아주 많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것은 역시 전통적인 농업사회가 비교적 현대적인 공업사회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 두 시대의 차이는 선진과 낙후의 구분이 아니라. 시대가 다른 것이다. 중국이 그때 유일하게 갔어야 하는 길은 바로 임칙서가 말한 "눈을 떠서 세계를 보는 것(睁眼看世界)"였다. 즉 위원이 말한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이기는 것(師夷之長技以制夷)"이었다. 그러나, 왜 중국은 얻어맞은 후에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조상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을까?
한가지 견해에 따르면, 중국이 실패한 것은 군사적으로 다른 나라만 못하고, 정부가 다른 나라만 못하고, 인민과 전체 사대부계층도 다른 나라만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이 어떻게 죽어라 저항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며, 중국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서양을 배우는 것, 즉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 수천년간, 중국은 아편전쟁같은 위험한 상황을 수도 없이 맞이했었다. 그러나 중국은 아편전쟁이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호적(胡適)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이 무수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항상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후에 다시 이민족을 정복했고, 정복자들을 최종적으로 중국문명에 동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그런 것이 되지 않았을까?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당시의 임칙서, 위원등 소수인을 제외하고 대다수 중국인들은 중국이 실패한 근본원인을 알지 못했다. 수천년문명의 중국이 쉽게 다른 나라에 패배할 것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중국문명은 원래 변혁정신이 있는데, 실패하 후에 오히려 그것을 가리고, 무시하고, 실패를 우연한 일로 보며, 중국과 서방문명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근본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었다. 또한 변혁사상이 나타나지 않았고, 심지어 아편전쟁이전에 가졌던 약간의 변혁사상마저도 폐지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공자진(龔自珍)은 아편전쟁전에 변혁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실패후에 국가와 민족의 각성을 부르짖지 않고,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더욱 보수적인 지경으로 끌고 들어갔다.
전통중국은 "사농공상(士農工商)" 구조의 '사민사회(四民社會)'였다. 사농공상의 4개 계층중에서, 진정 사회진보를 이끄는 것은 사대부계층이다. 사대부계층은 많은 경우 사회를 앞서갔다. 그러나 문화문제에서 사대부계층은 비교적 보수적이다. 그들은 과거 수천년간 중국사회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문화변혁에 대하여는 본능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전통은 그들이 보호해야할 정신일 뿐아니라, 그들의 자산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학문은 단지 천하, 국가이다. 천하, 국가를 떠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른다. 문화의 동요 혹은 불신임은 사대부계층에게 중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었다. "배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배운다(盡棄其學而學焉)"라고 일본인들이 뒤에 그랬던 것처럼, 서방으로 몸을 돌리고 신학문으로 구학문을 대체할 생각이 없었다. 이건 앞서간 자의 비극이고, 중국문명의 비애이다. 중국문명은 자고이래로 여시구진(與時俱進), 생생불식(生生不息)을 강조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은 또 한번의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사대부계층은 천년이상의 발전을 거쳐, 이미 혁신을 주저하지 않던 것에서 보수적이로 새로운 것을 꺼리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은 갈수록 자신의 명예, 신분, 지위를 걱정했고, 갈수록 자신들의 지위가 무너질까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들중 어떤 사람들은 시대추세를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사적으로 얘기할 뿐, 공개적으로 토론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더더구나 공개적으로 호소하고 천하를 이끌 용기는 없었다. 예를 들어, 임칙서같은 경우 서양인들과의 교류과정에서 이미 중국문제의 소재를 상당히 분명히 깨달았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서양과 같은 등급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외국의 총포, 선박을 구매하기를 주장했고, 사람을 시켜 서방자료를 번역하게 했다. 임칙서의 이런 사상과 방식은 위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위원은 기회가 있으면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이기자(師夷之長技以制夷)"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임칙서, 위원의 이런 사상과 주장은 20년후 일본인들을 각성시켰고, 명치유신에 비록 여러가지 우원인이 있지만, 임칙서의 사상,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誌)>도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미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이 되었다.
임칙서는 이런 각성과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기에 그는 감히 공개적으로 제창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떠 세계를 보자"는 것과 같이 애매모호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은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그 세계가 중국만 훨씬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임칙서의 진실한 뜻은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중국과 세계간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그는 사대부 언관들이 꿈속에서 헤매고, 국가가 꿈속에서 계속 헤어나지 못하게 둘 지언정, 그 자신의 명예를 희생해가면서 시속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런 사대부의 심리상태는 중국이 20년의 시간을 그낭 허송하게 만든다.
아편전쟁후, 중국은 이치대로라면 쉽게 변혁의 길에 들어섰어야 한다. 치욕을 알고나면 용감해지고, 분발도강하여, 서방을 학습해야 한다.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이기자"라는 층면에서도 옛날 그대로 통치해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청은 하지 말아야했을 것을 했다. 그후 20년을 보내고 다음 위기가 나타나고, 더욱 큰 실패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각성하게 된다.
2
100여년후, 우리는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엄청난 굴욕이라고 느꼈다. 특히 <남경조약> 그리고 다음해의 <호문조약(虎門條約)>에서 규정한 일련의 통상제도와 교역원칙으로 중국이 거대한 손실을 입었고, 중국영토완정과 주권독립이 크게 침해받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근대중국의 서방세계와의 불평등관계의 시발점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남경조약의 6개조문내용을 보면, 전쟁에서 졌고, 진 것을 인정한 것이다. 홍콩을 할양한 것도 100년후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콩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조정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콩의 상업가치와 국방의의는 나중에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때의 중국은 아직 영토를 확장하는 농경시대이다. 조야에서 역사가 역전되어 영토를 개척하던 것에서 영토를 양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가슴아파한 것은 그저 땅이었지 홍콩이 아니었다.
진정을 조야에서 불만으로 생각한 것은 오구통상이었다.
과거 200년, 특히 최근 수십년의 역사를 보면, 영국인들의 이런 방식이 통했을 것이라는 것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이 개혁개방후에 아주 짧은 시간내에 국민들이 외국물질문명을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습관을 갖게 만들었다. 중국인의 소비능력은 그 과정에서 점차 제고되었고, 중국정부가 정책에서 약간의 변통만 해주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도 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후세중국의 경험을 도광제가 알 수는 없다. 조야에서 오구통상을 용인하였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서 생존방식, 생활방식을 바꾸려는 것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산업혁신, 업그레이드나 전환은 꿈도 꾸지 않았다.
중국은 아편전쟁후 오구통상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산업을 개조하지도 않았고, 혁신하지도 않았고, 전환하지도 않았다. 그저 옛것을 그대로 고수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고수는 그 세대 혹은 그 다음 세대의 수공업자들의 생활을 더욱 비참하고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만일 중국이 오구통상후 결심을 내려, 서방의 기계생산으로 수공업을 대체했더라면, 중국은 분명히 서방공업화의 발걸음을 따라잡았을 것이다. 서서히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전환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구통상은 원래 중국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청정부는 각종이유를 대며 이 5개 '경제특구'의 지역적 경험을 더욱 넓은 범위로 확장하는 것을 거부했다. 중국자본주의의 발생은 이로 인하여 50년 늦어지게 된다. 중국공업화의 시작은 최소한 20년을 허비했다. 1860년에 이르러 중국은 다시 한번 서양인들에게 패배하고, 그제서야 공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확실히, 오구통상때부터 중국농업, 농촌은 점점 쇠퇴하는 상태가 된다. 농민도 전면적으로 버려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는 공업화로 모든 나라가 겪은 문제이다. 그 어느 국가도 피해갈 수 없는 철칙이다. 오구통상후, 청정부가 5개 에서 대폭으로 중국공업화를 추진했더라면, 중국공업의 발생과 발전을 용인했더라면, 중국농업은 전면적인 쇼크상태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설은 의미가 없다. 청나라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전통농업을 보전하지도 않았다. 적절하게 자신의 공업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조야에서 가장 신경쓴 것은 기실 전통사회의 안일(安逸)과 영정(寧靜)이었다. 일종의 전공업문명(前工業文明)이었던 것이다.
3
아편전쟁이후 20년, 중국은 오구통상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중국은 이 기회를 살려 산업전환을 이루는데 노력하지 않았다. 농업문명을 공업문명으로 궤도를 틀게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소비를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시장을 육성하지도 못했고, 중국인에게 새로운 소비습관과 소비이념을 배양하지도 못했다. 중국은 전쟁의 짧은 고통을 겪은 후 금방 안일과 영정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농업문명의 혜택을 앉아서 누렸다.
아마도 중국사회의 타성(惰性)때문인지, 아니면 통치자의 무지, 이기심때문인지, 중국은 오구통상으로 세계를 향하지 못했고, 오히려 통상을 허용한 것을 통해 중국인들이 서양인을 원망하도록 만들고, 오구통상이 중국영토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여겼다. 오구통상항구에 거주하고 영업하는 외국인들이 누려야할 치외법권은 더더욱 중국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중국은 당시 국제공법, 국제무역체계와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목창아(穆彰阿), 이리포(伊里布), 기영(耆英), 황은동(黃恩彤)등의 건의와 정책결정은 확실히 문제가 많았다. 중국은 확실히 그들이 전후로 체결한 조약으로 적지 않은 경제적이익을 잃었고, 주권 심지어 존엄도 상실했다. 다만, 긍정해야할 점은 근대중국에서 최초로 서양인들과 접촉한 정치가, 외교가로서, 그들의 공헌과 실수는 기실 모두 대변혁시기의 정신직 부이고 가치가 크다. 후견지명(後見之明)으로 그들이 미외(媚外), 매국했다고 질책할 필요는 없다. 시대때문에, 무지때문에, 중국은 당시 현대의식이 전혀 없었고, 현대민족국가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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