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장풍명월(長風明月)
명나라 정통14년(1449년), 오이라트(瓦剌)대군이 남하하여 명나라변경으로 침입했다. 명영종(明英宗)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고, 토목보에서 오이라트군대에 패배하여, 명영종이 포로로 잡힌다. 토목보의 변은 명나라가 상승기에서 하강기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되었는데, 사서의 기록에는 여러가지 의문점이 많다.
- 주류기록상의 토목보의 변의 경위
토목보의 변
토목보의 변은 주로 <명사> 명종본기와 왕진전(王振傳)에 실려 있다. 다른 사람들의 전기에도 드문드문 관련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요 경과는 다음과 같다:
[오이라트침입]
정통14년(1449년) 칠월, 오이라트는 4로로 나누어 대거 침입한다. 동로는 요동을 공격하고, 서로는 감주(甘州, 지금의 감숙성 장액)을 공격하고, 중간은 2로로 나누어 1로는 예센(也先)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대동(大同)을 공격하였으며, 다른 1로는 아칙지원(阿敕知院)이 군대를 이끌고 선부(宣府)와 적성(赤城)을 공격했다.
칠월 십일일, 대동의 우참장(右參將) 오호(吳浩)는 는묘아장(猫兒莊, 지금의 산서성 양고현 북쪽일대)에서 오이라트군을 맞이해 싸웠으나 전사한다. 칠월 십오일, 대동총독 송영(宋瑛), 부마도위 정원(井源)등 4명의 장수가 각각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양화(陽和)로 가서 오이라트 예센의 대군과 전투를 벌인다. 태감 곽경(郭敬)이 중간에서 장난질을 치는 는바람에 전멸하고 만다. 송영, 주면(朱冕)은 전사한다. 석형(石亨)은 단기필마로 대동성안으로 도망쳐 돌아온다. 곽경은 풀숲 속에 몸을 숨겨 화를 면했다.
[영종친정(英宗親征)]
북경에 보고서가 올라오자, 명영조는 이부상서 왕직(王直)등이 백관을 이끌고 극력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직접 친정하겠다고 고집한다. 칠월 십육일, 황급히 군대를 출동시킨다. 북경성을 떠난 다음 날 군대는 혼란에 빠진다. 칠월 이십삼일 선부에 도착한다. 여러 대신들이 멈추기를 청했지만, 명영종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이미 동사하고 아사한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십사일, 군대는 계명산(鷄鳴山,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동남쪽)에 도착한다. 병부상서 광야(鄺埜)와 호부상서 왕좌(王佐)가 여러차례 철군을 청했지만, 왕진에 의해 거부당한다. 이십팔일 양화에 도착하고, 시신이 온 들판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군대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팔월 일일, 대동에 도착한다. 이일 대동에 진주했다가 철군한다.
<왕진전>에 따르면, 왕진은 처음에 자형산(紫荊山, 지금의 하북성 역현 서북)에서 철군할 생각이었고,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에게 자신의 고향인 울주(蔚州, 지금의 하북성 울현)로 가줄 것을 청했으니, 다시 방대한 군대가 고향의 양식을 짓밟을 것을 우려하여 길을 바꾸어 선부로 우회한다.
팔월 십일, 명군이 선부에 들어간다. 보얀테무르(伯顔鐵木兒)는 추격병을 이끌고 선부의 동남쪽 60리에 있는 계명산에 도착하여 명군의 퇴로를 막는다. 곧이어 예센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온다. 공순백(恭順伯) 오극충(吳克忠), 도독(都督) 오극근(吳克勤) 형제는 뒤에서 예센의 기병을 막다가 반이상의 사상자를 낸다. 그리고 형제 둘도 모두 전사한다. 명영종은 다시 성국공(成國公) 주용(朱勇), 영순백(永順伯) 설수(薛綬)로 하여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지원가도록 한다. 나이많고 무능한 주용은 부대를 직접 몽골인의 포위권내로 밀어넣었고, 결국 3만의 기병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주용과 설수 본인도 전사한다.
[토목보의 변]
팔월 십삼일, 토목보에 도착한다. 회래성(懷來城)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행하는 문무대신은 황제에게 회래(懷來)로 들어가기를 권했지만, 왕진은 1천여수레의 개인물품을 신경써서 밤에 토목보에서 야숙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음 날, 즉 팔월 십일, 오이라트대군에 포위당한다. 명군은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하려 했지만, 땅을 2장이나 팠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팔월 십오일, 명군은 군영을 옮겨 물을 취할 때, 오이라트군에 대패하고 명영종은 포로로 잡힌다. 오십여명의 대신은 전사하고, 오십여만명의 병사들은 사상자가 절반이 넘었다. 호위장군 번충(樊忠)은 분노하여 소리친다: "너는 용서하지 못하겠다. 나는 천하를 위해 이 놈을 죽이겠다!" 그리고 철추로 왕진을 내리쳐 죽여버린다. <명사>에는 "군대가 궤멸하고, 죽은 자가 수십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토목보의 패배는 혼자서 결정을 내리고 고집한 명영종과 권력을 농간한 환관 왕진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보면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2. 토목보의 변 기록중의 논쟁과 이상한 점.
첫째, 명영종의 친정은 올바른 선택이었는가?
명태조는 천하를 얻은 황제이고, 명성조 주체도 일생동안 말 위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더구나 북정후 회군하는 길에 죽었다. 명선종 주첨기도 직접 친정에 나서 반란을 평정했다. 이들이 모두 명영종 이전의 명나라황제들이다. 명혜종 주윤문과 재위가 1년도 되지 않는 명인종 주고치를 제외하면 모두 대군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섰던 것이다.
토목보의 변 이전에, 명영종은 3차례 북벌에 나선 바 있다. 그중 정통9년(1444년) 봄, 제3차북벌 이극열소지전(以克列蘇之戰)에서 거의 타타르 본부의 병마를 섬멸시켰고, 부락수령 15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후 타타르는 날로 쇠약해진다.
명영종은 육월 십칠일, 왕진이 보내온 오이라트가 대동으로 진격하려 한다는 계획을 보고받고, 부마도위 서녕후 송녕을 총독대동삼로군마로 보내 적을 맞이하게 한다. 칠월 십일일 오이라트가 침범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말리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가 하늘을 거스르고 은혜를 배신하며 이미 국경을 침범하여 군민을 살륙하고 약탈하고 있으며, 변방의 장수들이 연이러 지원을 요청하니, 짐은 부득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가서 소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칠월 십육일 출정한다.
둘째, 오이라트의 침입과 명영종의 친정의 군사역량비교
오이라트는 12만 내지 15만을 투입했다는데 거의 이견이 없다. 그중 예센이 이끄는 부대는 개략 9만으로 대동으로 진격했다. <명실록>에 따르면, 체포한 2명의 내간(內奸)인 왕문(王文) 파백(把伯)이 모두 예센대군 구만명이라고 일치한다. 칸 탈탈불환(脫脫不歡)이 3만을 이끌고 고북구로 진격했고, 지원아랄(知院亞剌)은 3만명을 이끌었다.
그래서 오이라트가 투입한 선부, 대동방향의 역량은 12만가량이다. 토목보를 포위공격할 때, 오이라트정예 기병은 3만명가량이고, '공현지사(控弦之士)'10만가량이라는데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명영종이 이끄는 인원은 주류사료기재에 따르면 50만이고, 반이상이 사상당한다. 이 내용은 명영종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보면, 인원은 개략 8만 내지 12만이다.
첫째는 경성의 인원총수가 18만이다. 그중 경군(京軍)이 10만, 반군(班軍)이 8만이다. 병영장소를 보면, 토목보의 변이전에 경성군대의 군수물자상황이 나와 있는데, 경성의 최대인원은 24만이다. 우겸열전에서 그가 경성을 수위할 때, "피로한 병졸이 십만이 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명영종이 데리고가는 병력은 15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국공 주용이 미리ㅣ 대동(3만)과 선부(1.5만)에 증원보냈으므로 경성의 4.5만명은 이미 빠져나갔다.
그래서, 명영종이 북경을 떠날 때, 이끌고간 군대는 10만을 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조실록에는 "황제가 8만을 이끌고 거용관을 나섰다"고 되어 있는 것과 일치한다. 명영종이 병력소모후의 성국공 주용과 잠히 회합한 후에도 병력의 최대한은 11만정도일 것이다. 주용과 오씨형제가 이끈 기병부대가 전멸한 후, 토목보에 이르렀을 때는 명군이 8만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정예부대는 명영종 휘하의 2만정도이다.
여기에서 한 마디 덧붙여야 할 점은 명군의 주력은 차례차례 예센의 9만대군에게 격파당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주용의 3만기병이 신속히 섬멸당한 원인이다.
셋째, 양초(糧草)문제
칠월 십육일에 출정하고, 이십삼일에 선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병사들중 굶어죽고, 동상에 걸린 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북경, 선부에는 7개의 대형 비축군량미창고가 있다(신개구보창, 장가구보창, 서양하보창, 만전우위창, 만전좌위창, 도구보창, 이신둔보창). 이는 명나라가 전쟁을 대비하여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이다. 토목보의 변이후, 우겸이 양식창고조사를 철회하도록 건의하고, 적지 않은 관외의 양식창고를 불태워버린 것을 보면, 양식창고에 양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양식창고에 양식이 없고, 후방에서 운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마도 왕진이 병부상서와 호부상서를 초원에 무릎꿇린 이유였을 것이다. 명영종의 대군이 대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병들은 굶어서 논밭의 곡식을 먹었다. "병사들이 지나가는 곳은 곡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토목보로 돌아왔을 때, 살아있는 병사들도 배고픔에 시달렸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언급할 점은 오이라트가 남하하기 전에, 명영종은 이미 문관의 권리를 통제하여, 양식창고를 검사하고, 강남에서 은세, 염세, 차선세를 거두어 남방에서 일어난 여러 건의 반란을 평정했다는 것이다.
토목보의 변이후, 경성의 양초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우겸이 관외양식창고를 불태우고나서, 군권, 재권을 신속이 문관들이 장악하게 된다. 강남지구의 은세, 염세, 차선세는 취소된다.
넷째, 정보전달지연, 오류문제
우선, 시간선을 보면, 명영종은 칠월 십일일 대동우참장 오호가 묘아장에서 패전하여 전사하 후, 친정에 나섰다. 양화에 도착한 후, 4만의 주력군이 전멸한 참상을 보고 비로소 오이라트대군의 실력을 깨닫는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팔월 일일 명영종은 대동에 진주한 후, 왕진은 진수태감 곽경의 밀고로 비로소 4만주력군이 전멸했고, 게다가 양식도 부족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황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명영종은 자형관으로 40리를 간 후에 다시 토목보를 선택했으며, 양식부족으로 병사들이 굶어죽고 있는 대군이 같은 수량의 기병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사서의 기록에서와 같이 왕진이 고향의 농사를 망칠까 우려하여 방향을 틀었다는 것은 어렵다고 할 것이다. 비교적 큰 가능성은 명영종이 이때 아랄지원이 독석, 마영을 함락시키고, 오이라트군대가 며칠전에 전방로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평원이 많은 원래의 귀환로를 버리고, 다시 산길이 비교적 많은 토목보노선을 선택한 것일 것이다.
이상의 상황을 보면, 명영종은 처음에 오이라트침입대군의 병력을 잘 몰랐던 것같다. 그리고 상대방은 명영종의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책임자의 문제
사만의 대동 주력군이 양화에서 전멸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진수태감 곽경이 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곽경의 밀고로 오이라트의 침입군대의 실력을 알게 되었고, 명영종의 대군은 비로소 철수하게 되어, 한줄기 살길을 열게 된다. 토목보는 거용관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도망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주용의 4만기병이 전멸한 것에 대한 책임자는 내감감군(內監監軍) 유승(劉僧)인데 전사했다.
최대의 책임자인 왕진도 죽어서 가산몰수당한다. 조카 왕산(王山)은 능지처참당한다. 왕진이 죽은 것에 대하여, 주기진의 호위장군 번충(樊忠)이 철추로 때려죽였다는 설이 있다. 번충은 왜 주기진이 난군에 포위당한 상황하에서 황제의 안위는 보살피지 않고, 왕진을 찾아가서 때려죽였을까? 명영종이 복벽한 후 왕진의 죽음에 대하여 분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왕진의 죽음을 짐이 직접 목격했다!" "왕진을 추념하며 나중에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향나무로 왕진의 모습으 만들어 혼을 불러 장례지내고, 사당을 지었으며 그 편액을 내려 "정충(旌忠)"이라 한다.
그리고 양준(楊俊)은 독석, 마영등 10여개 성을 빼앗기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이라트는 가볍게 동선으로 관내로 진입한 것이며 며칠 전에 도착하여 명영종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여러 명나라장병들은 배고프고 피곤한 상태이므로 그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준에 대한 처벌은 그후 흐지부지된다.
3. 토목보의 변의 결과
명영종의 개혁과 문관의 권리회수는 실패로 끝난다. 명나라의 귀족집단은 무너지고, 명나라의 정예군대도 모조리 손실되었고, 오직 문관집단이 독점하여, 내각권력이 황제에 직접 대항할 정도로 커지게 된다. 병권도 문관들이 장악하며, 변방정책은 적극적인 진격에서 피동적인 방어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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