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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가정대지진(嘉靖大地震): 83만명이 사망한 명나라 광세천재(曠世天災)

by 중은우시 2025. 3. 31.

글: 백년고독(百年孤獨)

1556년 1월 23일의 깊은 밤, 인류역사상 사망자수가 가장 많은 지진이 황토고원을 찢어발겼다. <명사>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물이 솟으며, 건물은 모조리 무너졌다(地裂泉湧, 屋宇盡塌)"라고 한 진도8의 대지진이었다. 섬서성 화현(華縣)을 진앙지로 하여, 83만명의 목숨을 삼켰는데, 이는 당시 중국총인구의 1.5%에 해당했다. 이미 누렇게 된 사료들을 펼쳐보면, 460여년전의 그 겨울밤의 전율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1. "산천역위(山川易位)"의 말일광경

지진파는 매초 3킬로미터의 속도로 섬서, 산서, 하북의 3개 성을 석권했고, 600킬로미터에 이르는 단열대를 형성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성벽이 모조리 무너지고, 땅이 수십곳 갈라졌다(城垣盡崩, 地裂數十處)" 위하(渭河)는 물길을 바꾸어 홍수가 일어나고, 화산(華山)의 산봉우리에 있는 거석이 무너져 내렸다. 서안(西安)의 소안탑(小雁塔)의 2개층이 무너졌고, 천년고도의 종루(鐘樓)에도 갈라진 틈이 나타났으며,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다.

황토교동(黃土窖洞)이 펼처진 향촌은 재난이 더욱 참혹했다. 명나라때의 <노서(露書)>에 따르면, "동굴에 사는 주민들은 열중 아홉이 죽었다(穴居之民, 死者十九)" 위남현(渭南縣)에만 5만의 교동주민이 생매장되었다. 산서 영제(永濟) 포주진(浦州鎭)은 "민간가옥 관청건물이 모조리 기울어지고 무너졌다(民屋官廨, 傾圮殆盡)" 하남의 문향현(閿鄕縣, 지금의 영보)의 성벽이 모조리 파괴되고, 황하의 제방이 무너져 세 개의 현이 수몰되었다.

2. 파생재난: 기근으로 식인의 참극이 벌어지다.

한겨울의 생존자들은 더욱 잔혹한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전염병으로 죽는 자가 열중 셋이었다." 위북평원에 "인상식(人相食, 사람이 사람을 먹는)"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동관(潼關)일대는 나무껍질, 풀뿌리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 다음해 봄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동관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10집중 9집이 전염병에 걸려 문을 걸어잠그고 모두 죽어나갔다(十室九病, 闓門皆斃)."

사회질서는 철저히 붕괴된다. 산서 평륙현 관아의 사건기록을 보면, 재난발생후 2년동안 도둑, 강도사건이 40배나 급증했다. 조정이 내린 20만냥의 재난구조금은 여러 단계를 내려오면서, 이재민들에게는 3할도 내려가지 않았다. 명나라때 사상가인 왕정상(王廷相)은 <여개봉조이수서(與開封趙二守書)>에서 이렇게 통렬하게 지적한다: "관리의 탐욕과 혹정이 천재(天災)보다도 심하다"

3. 문인들이 남긴 핏빛기억

당시 남경 국자감 제주(祭酒)로 있던 왕유정(王維楨)이 지진때 일가족 83명과 함께 동시에 사망한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제지진문(祭地震文)>의 남은 유고에는 "천주절, 지유절(天柱折, 地維絶)"이라는 절필이 남아 있었다. 감숙출신의 관리 조시춘(趙時春)이 <조준곡문집(趙浚谷文集)>에는 "황진폐일월(黃塵蔽日月), 만뢰작귀곡(萬籟作鬼哭)"(누런 먼지가 해와 달을 가리고, 온갖 소리는 귀신의 울음소리가 된다). 그는 이렇게 고원(固原)에서 서안까지의 연도에서 본 "백리무취연(百里無炊煙, 백리에 걸쳐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참상을 기록했다.

산서의 <영하현지(榮河縣誌)>에는 익명의 시를 싣고 있는데, 충격적이다: "야반건곤탕(夜半乾坤蕩), 천가동혈면(天家同穴眠), 신취하처멱(晨炊何處覓), 백골체한연(白骨砌寒煙)" 이들 문자는 문학창작일 뿐아니라, 진귀한 지진연구사료가 된다. 지광(地光), 지성(地聲)등 전조현상을 기록했다.

4. 역사회고

황하중류문명을 단층식으로 쇠퇴하게 만든 재난은 심각한 재난방지유산을 남겼다.

  1. 지진이후 재건하는 과정에서, 위남지구는 "목골니장(木骨泥墻)"의 항진구조를 갖게 된다.
  2. 민간에 "지동예경가요(地動預警歌謠)"가 퍼진다: "정수혼(井水渾), 축불안(蓄不安), 야반근방지번신(夜半謹防地飜身)"(우물물이 흐려지고, 가축이 불안해하면,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라)
  3. 최초의 지진전조를 시스템적으로 기록한 <지진기(地震記)>가 세상에 나온다.

현대지진학자들은 비각자료를 통해, 화현지진으로 지표가 4미터나 어긋났다는 것을 발견했고, 분위열곡대(汾渭裂谷帶)에 관건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2010년 옥수(玉樹)지진의 구조때 채택한 "경사장체지탱법(傾斜墻體支撑法)"은 바로 명나라때 지진지구건축에 대한 연구에서 유래했다.

결론

우리가 서안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의 <지진비(地震碑)> 앞에서 "가정삼십사년십이월임인야(嘉靖三十四年十二月壬寅夜), 지대진(地大震)"이라고 새겨진 흔적을 만져보면, 이 4세기반전의 재난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남긴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류는 보잘 것없는 존재이면서, 지혜를 가진 생명이다. 역사에 새겨진 피눈물의 기억은 생명을 지키는 영원한 빛으로 되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