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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온(劉伯溫): 장량, 제갈량에 비견되는 그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글: 흑색군(黑色君) 민간전통이야기에서 유백온은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지자(智者)이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창립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그후 공성신퇴(功成身退)하여 귀은전원(歸隱田園)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시기를 받아 주원장 혹은 호유용(胡惟庸)에게 독살당한다. 역사상 유백온은 정말 그렇게 신기하였을까? 왜 귀은한 후에 선종하기 힘들었을까? 유백온은 주원장의 눈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유백온은 언제 관직에 나왔을까? 주원장의 부모가 아직 건재하고, 주원장 본인이 아직 지주를 위해 소를 키우고 있을 때, 유백온은 이미 지방관리를 지낸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에서 4,5년간 있은 후, 현(縣)에서는 더 이상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보고, 또한 동료들과의 관계도.. 2023. 7. 8.
중국의 로켓군(火箭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글: 신두각(新頭殼) 로켓군은 중국이 자랑스러워하는 군종(軍種)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 로켓군의 여러 고위장군들이 "조사받기 위해 끌려갔다(帶走調査)"는 소식이 흘러나와다. 이와 관련하여 로켓군이라는 가장 신비한 부대의 내부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시진핑의 로켓군에 대한 숙청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등에 관하여 분석해보기로 한다. 1. 미국에 군사정보를 넘겨준 혐의를 받는 로켓군사령관이 체포되다. 보도에 따르면, 금년(2023년) 6월 28일, 중국해군사령부의 전 중령참모 야오청(姚誠)은 트위터에 중국로켓군 현임사령관 리위차오(李玉超)가 6월 26일 오전 사무실에서 끌려갔다고 폭로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리위차오의 아들이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데, 중국의 군사정보를 팔아먹은 혐.. 2023. 7. 8.
OPPO의 반도체칩설계자회사 ZEKU(哲庫)의 마지막 회의록 글: 재경대강당(財經大講堂) 2023년 5월 12일, OPPO는 산하의 반도체칩설계회사 저쿠과기(ZEKU)의 사업을 폐쇄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하여 OPPO의 설명에 따르면, 글로벌경제, 핸드폰시장의 불확정성에 직면하여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회사는 ZEKU의 사업을 접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이는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우리는 관련업무를 적절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조하겠다." 5월 14일 저녁에 인터넷에 ZEKU의 감원회의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에는 ZEKU의 CEO 류진, ZUKU의 COO 주샹주등 4명의 경영진이 참석했고, 회의에서 회사해산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경영진 여러명은 오열하거나 눈물을 보였다. ZEKU의 CEO 류쥔은 ZEK.. 2023. 7. 8.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팔로군(八路軍)" 명칭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글: 맹검홍(孟儉紅) 항전초기 홍군(紅軍)을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대하여는 여러 글과 책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다만, 여전히 약간의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예를 들어, 팔로군 번호의 유래라든지, 산하의 3개사(師)의 번호는 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등등. 그리고 개편된지 1달도 되지 않아 왜 팔로군은 다시 제십팔집단군(第十八集團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중공은 왜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는지.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팔로군 번호를 둘러싸고 어떤 다툼과 알력이 있었는지. 중공은 또 어떤 상황하에서는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팔로군"은 원래 '월군(粤軍)'의 번호였.. 2023. 7. 7.
중화민국의 12개 직할시(直轄市) 글: 민초사운(民初思韻) "직할(直轄)"은 고대에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는 송(宋)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북송은 "로(路)"를 성급(省級)행정단위로 삼았다. 23로(路)를 설치하는 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북경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국민정부는 '헌법'에서 여러번 '직할시'를 언급한다. 그러나, 제11장의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있고, 직할시와 지방(서장)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후 공문서에서는 "원할시(院轄市)"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직할시는 직접 사용되지 않는다. 1921년 7월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서 경도시(京都市)는 내무부가 직접 감독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직접 감독하는.. 2023. 7. 6.
아편전쟁때 청군의 황당무계한 전술들.... 글: 한언쇄어(閑言碎語) 역사상의 오늘 1840년 7월 5일은 영국전함이 주산(舟山) 정해(定海)를 포격하여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개전된 날이다. 아편전쟁이전에 천조(天朝)로 자처하며 고보자봉(故步自封)하던 대청제국은 이미 시대에 낙후되어 있었다. 문화와 사상도 그러했고, 무기와 군사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아편전쟁의 전모를 살펴보면, 청정부의 여러가지 대응책을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무계하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얘기해보기로 한다. 아편전쟁때 청군은 어떤 웃지못할 전술전략을 펼쳤을까? 여인의 마통(馬桶)과 과각포(裹脚布) 영국인들이 광주로 쳐들어 올 때, 전선의 장수는 여인의 마통(요강)과 과각포(전족발싸개)를 내건다. 그들이 보기에 "오예(汚穢, 더러운 물건)"로 서양인들의 "요법(妖法)" 즉 서양인들의 .. 2023. 7. 5.
김일제(金日磾): 한무제는 임종때 왜 흉노왕자인 그를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삼았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왕자로서 한나라에서 아주 잘 지냈다. 심지어 보정대신까지 지냈는데, 그 근본원인은 한무제(漢武帝)의 신임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비록 흉노왕자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무제의 곁에서 함께 자랐다. 흉노인이라는 신분외에 한무제에 있어서는 총신(寵臣)으로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게다다 한무제의 임종전에 한나라에는 복잡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래서 결국, 김일제가 보정대신이 되어, 한무제가 죽은 후, 한소제(漢昭帝)시대의 '사대천왕(四大天王)'중 한명이 된다. 당연히 이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한무제시대와 관련된 여러가지 역사적 원인이 있다. 이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단하게 김일제가 어떻게 하여.. 2023. 7. 4.
"책응(策應)"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글: 운향객(雲鄕客) 전 전인대상무위원장 리잔슈(栗戰書)는 작년 9월 러시아의 초청을 받아 방문했을 때, 러시아 국가두마 5대 당대표단과 회견할 때, 이런 발언을 한 바 있다: "러시아의 절실한 이익 및 일부 중대관계있는 문제에서, 중국측은 이해와 지지를 표시하고,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한다. 현재의 우크라이나문제처럼, 미국과 NATO가 직접 러시아의 문앞까지 밀고 들어오면, 러시아의 국가안전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하에서, 러시아는 마땅히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치를 취하고, 중국은 이해를 표시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면에서 '책응'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본인을 포함하여)은 "책응"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전쟁은 이미 개시된지 반년이 지났는데, 무슨 실질적.. 2023. 7. 3.
중국고대의 남색 유리(藍玻璃) 글: 석림(席琳) 중국인들은 자기(瓷器)를 발명했다. 이는 진흙으로 만든 것이고, 중용의 도에 적합하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유리를 발명하지 못했다. 유리는 서방인들이 발명한 것이고, 모래로 만들었으며, 투명하다. 비록 역사상 여러번 중국에 전래되었지만, 중국의 토양에서 유리라는 투명한 물건은 "견광사(見光死, 빛을 만나면 죽는다는 것으로 생명력이 취약하거나 저항력이 약한 것을 가리킴)"에 속한다. 그래서 제조기술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곤 했고, 완전하게 전승되어 내려오지 못했다. 유리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770-기원전221)에 중국에서 이미 PbO-SiO2(산화납-이산화규소)유리로 만든 벽(璧), 주(珠)등의 유리공예품이 나타난다. 한(漢)나라때는 희귀한 H2SiF6.. 2023.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