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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유백온(劉伯溫): 장량, 제갈량에 비견되는 그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by 중은우시 2023. 7. 8.

글: 흑색군(黑色君)

민간전통이야기에서 유백온은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지자(智者)이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창립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그후 공성신퇴(功成身退)하여 귀은전원(歸隱田園)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시기를 받아 주원장 혹은 호유용(胡惟庸)에게 독살당한다.

 

역사상 유백온은 정말 그렇게 신기하였을까? 왜 귀은한 후에 선종하기 힘들었을까?

 

유백온은 주원장의 눈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유백온은 언제 관직에 나왔을까? 주원장의 부모가 아직 건재하고, 주원장 본인이 아직 지주를 위해 소를 키우고 있을 때, 유백온은 이미 지방관리를 지낸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에서 4,5년간 있은 후, 현(縣)에서는 더 이상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보고, 또한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유백온은 사직을 선택한다.

 

고향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원나라 강절행성(江浙行省)의 유학부제거(儒學副提擧)의 직을 맡는다. 이 자리에서 한동안 있다가, 그는 보고라인을 넘어 감찰어사(監察御史)를 탄핵하다가, 자신의 상사에게 여러번 질타를 받고, 결국 사직하게 된다. 유백온이 두번째로 사직할 때쯤 그보다 17살이 어린 주원장은 부모가 둘 다 사망하고 나서 황각사(皇覺寺)로 들어가 화상(和尙)이 된다.

 

그후 10년간, 반원세력이 속속 등장한다. 천하는 점점 난세로 빠진다. 유백온은 그러나 고향에서 명사로 괜찮은 생활을 보낸다. 1352년, 서수휘(徐壽輝)의 반란군의 항주(杭州)를 점령한 후, 이곳의 원나라관리들을 죽여버리고, 창고의 물자를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빈민들을 대거 군인으로 모집한다. 항주에서 여러 해동안 살고 있던 유백온은 가족들을 데리고 미리 도망쳤다. 겁난을 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평화로운 생활은 이로써 끝나게 된다. 그는 조정의 임명을 받아 5품짜리 강절행성 원수부도사(元帥府都事)가 되어, '반란군토벌'업무를 시작한다. 그의 주요 토벌대상은 절강동부지역에 있는 방국진(方國珍)의 반란군이었다.

 

유백온은 그 직위에서 몇년간 지내지만, 그다지 뛰어난 활약은 보여주지 못한다. 반면에, 방국진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나중에 마음이 조급해진 원나라조정은 방국진을 초안(招安, 회유)하여 역량을 집중하여 더욱 세력이 큰 서수휘, 주원장의 반란군을 상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적이 평범했던 유백온은 조정의 초무(招撫)결정에 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려 반대의견을 피력한다. 원나라조정은 분노하여, 유백온의 관직을 5품에서 7품으로 강등시켜버린다. 그리고 그의 군사에 참여할 권한을 박탈한다. 유백온은 화가 나서 다시 한번 사직한다. 이번 사직으로 인하여 그는 2년후인 1360년 다시 세상에 나와 주원장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후, 유백온은 주원장의 여러 수군참모(隨軍參謀)중 한명이 된다. 그 기간동안의 행적에 관련하여 신비주의적인 전설을 제외한다면, 두 가지 점이 있다:

 

하나는 진우량(陳友諒)의 군대가 주원장을 공격해올 때, 유백온은 확실한 주전파로 주원장을 따라다니면서 근 3년간 일선에서의 전투에 참가한다; 그리고 주원장에게 전략적인 건의를 몇 가지 한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의 유백온은 구체적인 사적이나 모략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가 주원장 정권의 창립에 기여한 공헌은 문신의 우두머리인 이선장(李善長)에 미치지 못할 뿐아니라, 주원장을 위하여 장기적인 전략계획을 제시한 주승(朱升)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등극의식을 준비하거나, 남경성을 수리하거나, <대명률>을 제정하거나, 과거제를 회복시키는 등 제도건설분야에서는 유백온이 큰 역할을 한다. 그보다 먼저 주원장집단에 가담한 개국공신들과 비교하자면, 유백온은 전조(前朝, 즉 원나라)의 진사이고, 원나라에서 여러차례 관직을 지냈으니, 전장제도에 대하여 더욱 정통했을 것이다. 

 

1370년, 천하의 대세가 결정되면서, 주원장은 공신들에 대하여 대거 관직과 작위를 내린다. 이 봉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복종했고, 기본적으로 공평했다. 이것을 보면 유백온이 명나라의 창립에 세운 공훈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공작(公爵)은 여섯 명이다. 문신 이선장의 서열이 가장 높았고, 전공이 가장 큰 무장 서달(徐達)은 봉호수가 가장 많았다. 유백온이 받은 것은 "성의백(誠意伯)"이다. 6명의 공작, 28명의 백작 다음이고, 봉록도 아주 적었다. 이를 보면 최소한 절대다수의 사람들 마음 속에 유백온의 공헌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나라에서 농민군을 토벌하는 성적도 볼품이 없고, 주원장측에서도 전공이 보통이며, 제도건설분야의 공로가 약간 있는 유백온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신기묘산(神機妙算)의 "반선(半仙)"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까?

 

주원장이 직접 유백온을 치켜세워주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원장은 회서(淮西)지구에서 거병했고, 핵심인물은 봉양(鳳陽)주변지역출신의 회서고향사람들을 위주로 한다고. 그들은 "회서훈귀(淮西勛貴)"로 불린다. 주원장집단이 계속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권력분배문제가 당면과제가 된다. 회서훈귀는 이미 황권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러, 반드시 제거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이선장은 주원장의 문신들 중 우두머리로서, 주원장의 집단에서 실제로 소하(蕭何)와 장량(張良)의 이중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는 회서집단의 공인된 영수였다. 이선장은 지위도 높고 권력도 컸다. 그가 대표하는 상권(相權)은 주원장에 대해 큰 위협이 되었다. 그의 역량을 견제하기 위하여, 주원장은 인위적으로 회서집단에 대항할 수 있는 문관들을 키워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부분 유백온의 고향사람들이고, 역사상 "절동집단(浙東集團)"으로 불린다.

 

정치적인 균형을 위하여, 주원장은 유백온을 회서집단에 대항하는 기수로 내세운다. 그리하여 직접 그의 신기묘산을 치켜게운다. 유백온은 원나라의 진사출신이고, 주원장보다 한세대 윗사람이다. 주원장집단에서는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태사령(太史令)의 직위를 맡는데, 한편으로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책임지고, 다른 한편으로 천상(天象)을 관찰하고 해설하는 것을 책임졌다. 

 

주원장이 유백온에게 기대한 것은 개략 전진(前秦)의 왕맹(王猛), 북위(北魏)의 최호(崔浩)같은 역할이었다: 혹리(酷吏) 겸 능리(能吏). 지혜가 충만한 권모가의 자태로 황제의 권력강화목표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지저분한 일들을 해내는 것을 포함한다. 고대의 왕조정치하에서, 친족, 고향사람에 의존하여 천하를 얻은 후에, 군주는 수단을 쓰고 권모술수를 써서, 황권에 위협이 되지 않은 조정신하를 통해 황족, 공신을 약화시키는 일은 통상적이다.

 

이런 역할을 해내는 것은 당연히 난이도가 높고, 리스크도 크다. 한편으로 그들이 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공신귀족집단에 죄를 짓는 일이다. 이런 일은 잘 하면 재보지재(宰輔之材)라는 말을 듣지만, 잘못하면 '영행(佞幸, 간신)'이 되어, 철저히 타도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황제는 수시로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 혹은 그들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여기면 사마살려(卸磨殺驢)하게 된다. 왕맹은 다행히 일찍 죽는 바람에 명성을 지킬 수 있었지만, 최호는 북위의 전3대군주의 창업과 제도건립을 도운 후 친인척이 모조리 주살당한다. 

 

홍무원년, 유백온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관리들의 감찰을 책임진다. 이선장의 심복 이빈(李彬)은 비교적 심한 부정부패로 체포된다. 법률에 따르면 참형에 처해져야 했다. 이선장은 유백온을 찾아가 여러번 사정한다. 그리고, 당시는 천하에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사형집행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유백온은 주원장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이선장의 요청을 거절하고, 이빈을 참형에 처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유백온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들었다.

 

가뭄이 계속되자, 이선장은 그 기회를 노려 유백온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 신명의 분노를 산 것이라고 탄핵한다. 이선장의 무리도 속속 탄핵행렬에 가담한다. 주원장은 유백온을 지지하고 싶지 않았고, 이선장과 그의 무리들의 탄핵에 따라 상징적으로 유백온을 질책하면서, 실제행동으로 "지저분한 일은 네가 해라. 좋은 사람역할은 내가 하겠다"는 기본논리를 그대로 집행한다. 이는 유백온으로 하여금 실망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이선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회서집단이 자신에게 이를 갈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주원장은 그 혼자서 이선장집단의 압력을 감당하게 만든 것이다. 처가 사망하여 후사를 처리해야한다는 핑계를 잡아, 유백온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잠시 관료사회를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유백온은 점점 반은퇴상태로 접어든다. 다만,주원장의 회서훈귀를 약화시키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는 유백온과 개인적인 관계가 가까운 양헌(楊憲)을 선택하여 이선장집단에 대항하게 한다. 그는 정보기관에서 성장한 관리이고, 전통사대부인 유백온에 비하여, 양헌은 전통적인 혹리와 능리의 이미지에 더욱 부합했다.

 

호유용에게 보복을 당하다.

 

역사에는 양헌의 구체적인 사인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죄를 저질러 주원장에게 주살되었다고만 되어 있다. 정보계통출신의 양헌은 일처리에서 너무 칼날을 드러내고, 성격도 조급했다. 심지어 직접 주원장에게 달려가서 "이선장은 큰 재목이 아닙니다. 재상을 맡을만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설마 주원장은 이선장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선장의 권력을 점점 약화시킬 수 있는 능리 겸 혹리였다. 그처럼 대권을 쥐어주자마자 경박하게 행동하며, 중임을 감당할 수 없는 영신(佞臣)은 아니었다.

 

사실은 증명한다. 양헌의 정치지혜는 유백온과 크게 차이가 났다. 유백온은 이선장의 심복인 이빈을 참살한 후 적시에 몸을 빼서 물러나, 단기간내에 자신의 평안을 보전했지만, 양헌은 중서성좌승(中書省左丞)을 맡은지 1달도 되지 않아, 이선장에게 탄핵당한다. "방자하게 간사한 일을 저지른다(放肆爲奸事)"는 것이었다. 양헌에게 크게 실망한 주원장은 이선장이 탄핵하자 그를 처형해버린다.

 

이렇게 되자, 양헌의 죽음, 유백온의 퇴진으로 주원장이 이선장에 대항하기 위해 키운 '절동집단'은 조정내에서 기본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주원장과 이선장간에는 그후 새로운 권력균형이 이루어진다: 이선장이 2선으로 물러나고, 그의 적계인 호유용과 이전에 당쟁에서 중립을 지킨 왕광양(汪廣洋)이 각각 좌우승상(左右丞相)을 맡는다. 유백온은 이때 고로환향(告老還鄕), 귀은전원을 선택한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만 바람은 그냥 놔두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이때 회서집단의 우두머리인 호유용은 유백온이 이빈을 죽이고, 이선장을 면박준 구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유백온이 귀은한 후 2년이 지나 왕광양이 좌천당한다. 호유용은 조정내의 적수가 모조리 사라졌다. 그는 복수를 해서 원한을 풀 기회를 맞은 것이다. 호유용의 지적으로 금방 유백온의 봉록을 빼앗기고, 또한 유백온은 남경성으로 달려와 사죄해야 했다.

 

나이 육순을 넘긴 유백온은 경사에 남아있게 된다. 병약하고 나이든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한탄을 담은 싯구를 남긴다. 1375년초, 유백온은 풍한에 걸려 몸이 날이갈수록 나빠지게 된다. 주원장은 호유용에게 어의를 데리고 가서 진맥하고 약처방을 내리라고 명한다. 다만, 유백온의 몸은 갈수록 나빠졌고, 주원장도 그의 병세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죽을 날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유백온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얼마 후 병사한다.

 

유백온의 임종전의 증상을 보면, 그는 간암 혹은 간질환으로 죽은 것이다. 호유용과 어의가 함께 유백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약방은 어의가 내주었고, 약재는 유백온집안의 사람들이 어의의 약방에 따라 구한 것이다. 십여일이 지나자, 유백온은 자신의 뱃속에 돌맹이같은 것이 있다고 느껴져 아주 고통스러워한다. 이는 확실히 간경화 증상이다. 그후 유백온은 병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주원장에게 어의의 약방은 소용이 없고, 병세가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말한다. 유백온의 뜻은 호유용을 극도로 불신한다는 것이다. 호유용이 어의와 결탁하여 약방에 손을 쓴 것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유용이 유백온을 독살하였다는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호유용은 한편으로 어의를 조종하여 독약을 넣을 능력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황제를 독살할 능력도 있다. 그가 이미 이선으로 은퇴하여, 병약해진 노신을 굳지 독살하려 할 이유가 없다. 당시의 화학수준으로 독약의 속도를 제어하여, 이미 기초병을 가진 유백온이 병든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몇달 후에야 죽게할 정도의 능력은 안된다고 봐야 한다.

 

나중에 누군가 유백온을 독살한 책임을 주원장에게 돌렸다. 이건 기이한 일이다. 당시 양헌이 죽은지 여러 해가 지났고, 왕광양도 호유용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으며, 주원장과 회서집단간의 대결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는데, 회서집단을 상대하던 병약한 은퇴노신을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고 할 것이다.

 

병사한지 여러해 후에 정치도구가 되다.

 

유백온의 자술과 그의 일관된 신체상황을 보면, 그의 죽음은 간병이 발작한 결과이다. 원나라때 관료를 지낼 때 유백온은 성격이 강렬하고 성급했다. 그리하여, 동료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말년에는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고, 주원장과 일찌기 죄를 범한 회서훈귀집단과의 사이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다보니 병세가 악화되는 것이 당연했다. 유백온이 죽은지 5년후,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원장에게 말한 호유용이 그에게 독약을 쓴 것으로 의심된다는 추측을 가지고 주원장은 회서집단을 처리하는 도구로 삼는다. 이는 호유용의 죄증중 하나가 된다. 그러다보니 유백온의 사인은 점점 왜곡되어 원래의 면모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후 주원장은 호유용사건을 일으키고, 회서집단을 전멸시킨다. 문관계통에서 이선장, 호유용 및 그들의 일당은 모두 죄악이 큰 죄신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지기 회서훈귀에 대항하고 이선장에 정면으로 부딛쳤던 유백온은 점점 개국문신의 대표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명나라때는 시정문학이 발달하여, 유백온 본인도 민간이야기에서 점점 신격화되고, 역사상 '반선'의 이미지로 등장하게 된다. 

 

주원장이 회서집단에 대항하기 위해 골랐던 3명의 문신 중에서, 오직 유백온만이 주원장의 기대를 달성할 수 있었고, 선종할 수 있었으며, 후세에 좋은 명성을 남긴다. 그와 비교하면, 성격이 조급하고 경박했던 양헌과 항상 화희니(和稀泥, 두리뭉실하게 원리원칙없이 수습하는 사람)역할을 하던 왕광양은 모두 신패명렬하고 비명에 죽었다. 그러나 유백온의 수준은 민간전설에서처럼 그렇게 높지 않다. 일찌기 원나라에서 일하면서도 방국진을 토벌하는데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고, 주원장에 귀순한 후에도 실제 전공과 전략성과는 별 것이 없었다. 반대로 제도건설분야에서는 성취를 이루었다. 결국, 역사상 유백온은 상당히 총명한 사람이다. 다만 그의 공헌을 제갈량과 같은 명신들과 비교하는 것은 너무나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백온의 이미지가 신격화된 것은 한편으로 명태조가 문관계통을 너무나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명나라의 시정문화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때문에, 총명하고 진퇴를 알았던 문신은 점점 후세인들의 마음 속에 '반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