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여불위(呂不韋)는 왜 음독자살해야 했을까?

중은우시 2021. 5. 1. 17:47

글: 최찬성공(璀璨星空)

 

자고이래로 공신으로서 자신의 목을 잘 보전해서 선종(善終)한 자는 아주 적었다. 거기에는 윗사람이 각박하고 은혜를 갚을 줄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신하가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스스로 죽을 길을 연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모든 책임을 윗사람에게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중국역사기록에서 공신을 처음 죽인 사람은 진시황이 아니다. 월왕 구천이다. 여기에는 구천이 각박하고 은혜를 모르는 점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월나라의 복국에큰 공을 세운 문종(文種)과 범려(范蠡)가 모두 초(楚)나라 사람이며, 초나라로부터 월나라를 강화시켜 오나라를 약화시키려는 사명을 띄고 있던 사람들이다. 오나라가 멸망하자, 이 두 명의 인재들이 다음에 해야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암중으로 초나라를 도와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구천이 문종을 죽이고, 범려를 쫓아냈다는 것만 가지고 구천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구천의 입장에서, 그는 확실히 문종을 죽이고, 범려를 쫓아낼 이유가 없다. 다만 월나라의 왕으로서 그는 이 두 사람에게 그렇게할 천가지 이유가 있다.

 

같은 이치로, 중국의 최초황제인 진시황은 사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확실히 여불위를 죽여야할 이유가 없다. 다만 황제의 각도에서 보자면 여불위는 죽여야 한다.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왕은 그가 변란를 일으킬까 우려하여, 문언후(즉, 여불위)에게 글을 내려 말하기를, "그대가 진(진나라, 진시황)에 무슨 공이 있기에, 진은 그대를 하남의 땅을 봉지로 내리고, 십만호의 식읍을 주었는가. 그대가 진과 얼마나 가까워서, 그대를 중보(仲父) 불렀는가. 그대와 가족은 촉으로 옮겨가라!" 여불위는 스스로 생각하니 점점 무서워지고, 주살될 것이 겁났다. 그리하여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

 

이 기록에서 핵심단어는 "진왕은 그가 변란를 일으킬까 우려하여(秦王恐其爲變)"이다. 이는 확실히 사적인 범주가 아니다. 국가안위에 관련되는 일이다. 설사 여불위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진시황 영정의 입장에서는 진나라의 안정에 악영향을 미칠 불량한 싹은 미리 잘라버리는 것이 옳다. 그래서 사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영정의 조치는 각박하고 은혜를 모르는 것이지만, 국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영정이 한 일은 틀리지 않고, 오히려 아주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왜 '변란이 생길 것을 우려하였"을까. 그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왜 진시황은 반드시 여불위를 죽여야 했을까?

 

진시황이 여불위에게 쓴 편지는 비록 겨우 30자에 불과하지만, 수준이 아주 높다. 그는 공,사 두 측면에서 진나라는 전혀 여불위를 홀대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오히려 여불위가 스스로 만족할 줄 몰랐다고 말한다.

 

공적인 각도:

 

"그대가 진(진나라, 진시황)에 무슨 공이 있기에, 진은 그대를 하남의 땅을 봉지로 내리고, 십만호의 식읍을 주었는가."

 

공이 있으면 상을 받아야 한다. 이는 국가의 일이다. 그렇다면 여불위는 진나라의 통일대업에 어떤 공적이 있었는가. 

 

정치적 공로를 살펴보면...없다. 전쟁의 공을 살펴봐도...없다. <사기.여불위열전>을 보면, 여불위의 공적은 오직 진장양왕 자초(이인)을 쫓겨나 있던 왕자에서 진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엄격하게 보자면, 여불위가 자초를 진왕으로 만든 것은 사적인 은혜의 범주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것은 자초이지, 영정은 아니다. 다만 진장양왕이 즉위한 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언후에 봉하며, 하남에 식읍 십만호를 내린다. 이는 전형적인 사적인 은혜를 갚기 위해 공적인 자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정이 서신에서 여불위에게 '그대가 진에 무슨 공이 있느랴'라고 한 것은 전혀 위화감이 없다. 확실히 여불위는 진나라에 대하여는 아무런 공적이 없다.

 

사적인 각도

 

"그대가 진과 얼마나 가까워서, 그대를 중보(仲父) 불렀는가. "

 

여불위는 비록 국사 방면에서 진나라에 아무런 공적이 없지만, 사적인 은혜로 보면 진시황 일가에 큰 공적이 있다. 만일 여불위가 자초를 진왕으로 올려주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영정 진시황은 아마도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은혜는 사적인 은혜이다. 여불위와 진나라왕실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다. 즉 여불위와 진왕실은 아무런 친척관계도 없다. 그래서 영정이 서신에서 말한 "그대가 진과 얼마나 가까워서, 그대를 중보(仲父) 불렀는가"는 설마 정말 그 진짜같기도 하고 가짜같기도 한 영정이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것을 가리킨단 말인가?

 

그래서 진시황 일가에 사적인 은혜가 있는 여불위에게 있어서, 그가 진나라에서 얻어간 것은 실로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여불위가 상국(相國)의 정치적 지위에 만족하고 편안하게 말년을 보냈다면, 아마도 진시황은 그가 선종하도록 놔두었을 것이다. 다만, 여불위는 이때 3가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첫째, 노애(嫪毐)를 끌어들이다.

 

기실 이 사건을 개시한 것은 여불위가 아니다. 여불위도 어쩔 수 없긴 하였다.

 

진장양왕이 죽은 후, 조희(趙姬)는 적막함을 참지 못해서, 자주 옛 애인을 궁으로 불러서 회포를 풀었다. 그 과정은 자연히 말로 할 수가 없다. 조희가 부르면 여불위로서는 가고 싶지 않아도 가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여불위는 노애를 자기 대신 소개해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노애는 재주가 뛰어나서, 조희를 크게 만족시켰고, 노애와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낳은 것이다. 결국 그 일이 발각되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긴 하지만.

 

노애를 바친 인물로서 여불위는 자연히 죄를 벗어나기 어렵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죄책을 추궁할 때, 대신들은 이렇게 말한다: 

 

"왕께서 상국을 주살하고자 했는데, 그가 선왕을 받든 공이 크고, 빈객과 변사들중 그를 위해 말하는 자들이 많아서, 왕은 차마 법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신하들이 진왕 영정에게 여불위를 죽이지 말도록 말하는 이유는 여전히 사적인 은혜범주이다. '선왕을 받든 공이 크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양왕은 겨우 3년간 재위했고, 이 3년간, 여불위는 진나라에서 행정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아무런 실적을 내지 못했다. 모든 것은 자초를 도와 왕위를 승계하게 만든 것이다.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 진시황이 여불위에게 나라에 아무런 공을 세운 것이 없다는 말이 정확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진시황은 여전히 사적인 은혜를 고려하여 여불위의 목숨을 한번 살려준 것이다.

 

둘째, 문객(門客)을 끌어모으다.

 

여불위가 두번째로 반드시 죽어야할 이유는 널리 문객을 모집했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각국은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예를 들어 전국사공자는 바로 그중 대표적 인물이다. 여불위도 그것을 따라한 것이다.

 

그러나, 여불위는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놓쳤다. 그것은 바로 진나라의 체제가 다른 관동육국의 체제와 달랐다는 것이다. 진나라의 지향은 육국을 없애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행정체제상으로 이미 권력집중제로 발전했다. 이는 진나라에서도 인재를 모아야 하지만, 이들이 봉사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진왕 영정이 아직 어렸다. 다만 이미 천하를 삼키려는 야망이 있었고, 천하의 모든 인재를 진나라로 끌어모아서 쓰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만일 여불위가 몇몇의 문객만을 모았다면 영정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전국시대의 유행중 하나이니까. 그러나 여불위는 전국사공자처럼 널리 문객을 모집했다. 이는 영정의 금기를 건드린 것이다.

 

셋째, 사신을 만나다.

 

여불위가 국상에서 면직된 후, 자신의 봉지로 갔다. 만일 여불위가 문을 걸어잠그고 손님을 만나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봉지에서 제후로 있었다면, 아마도 말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불위는 여전히 자신을 진나라의 상국이라 여겼고, 열국의 사신들을 접견했다. 이는 또한 영정의 금기를 건드린 것이다.

 

가장 관건은 열국의 사신들이 여불위를 만나려는 목적이 그저 그를 살펴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불위를 자신의 나라로 불러서 관직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만일 여불위가 간다면, 진나라의 비밀은 그대로 공개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을 불러서 관직에 앉히고, 심지어 승상에 앉히는 것은 전국시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것도 대상을 가려야 한다. 영정처럼 천하를 삼키려는 군주가 어찌 진나라의 내정에 밝은 전임상국이 다른 나라에 가서 관직을 맡도록 허락하겠는가. 이는 죽으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국, 진시황은 마음 속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직접 여불위에게 서신을 쓴다. 서신에서 공사 양면에서 여불위를 질책한다. 그 핵심은 바로 너 여불위는 공신(公臣)도 아니고, 친족도 아니면서 10만호의 식읍을 받고, 중보로까지 불렸는데, 그것은 단지 너의 우리 가족에 대한 공로때문일 뿐이다. 그런데도 너는 감사함을 모르고 오히려 진나라에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너를 촉으로 유배보내는 것이다.

 

여불위도 영정이 자신을 수습하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영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겁났다. 그래서 음독자살한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수급과 가족은 화를 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영정이 여불위를 질책하고, 여불위가 벌을 받은 것을 보면, 영정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이미 군왕의 풍모를 드러내고, 공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불위가 자신의 가족에 사적인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기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그럼 여불위는? 명확하게 시대의 조류를 타지 못했다. 여전히 전국시대의 개념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사상과 정치적 민감성은 그의 사업상의 민감성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불위를 상업적으로 성공한 투기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정치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