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전(謝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공19대전에 내부에서 열람되는 문건에서, 시진핑과 그의 지낭(智囊)들은 중국에서 '정관지치'를 실현할 계획을 내놓았다. 중공의 풍촉잔년(風燭殘年)인 때, 성당(盛唐)의 미몽(美夢)을 꾸다니 정말 황당무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5년간, 중남해의 과두들은 롤러코스트를 탄 것같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트럼프의 강유병제(剛柔幷濟)의 강력한 힘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작년 미국이 인류역사상 최대의 정치체제도전을 겪은 후, 중공음 마치 강심제라고 맞은 것처럼 다시 살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게 된 것같다. 이에 상응하여 5년전의 '정관지치'가 돌연 그다지 멀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고,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같다. 그러나 중남해는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린 것이다.
중공이 구상하는 '정관지치'의 핵심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앙의 권력집중이다. 하이테크의 최신수단을 이용하여, 더욱 엄밀하게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다. 중공은 민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하한 형태의 반대역량도 엄격히 진압하고, 민중을 체제하의 순민(順民)으로 순화시키고자 한다. 십수억명을 권력집중의 전차 위에 묶어서 소위 '민족부흥'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확실히 중공은 '정관지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다. 힘을 다해서 '신축지치'를 이루고자 하지만, 기실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축지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트럼프의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간 매튜 포팅어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글을 발표했다.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또한 미국인들에게 중공이 6년간 감추어왔던 시진핑의 말도 공개했다. 포팅어가 인용한 시진핑의 강연은 시진핑이 2013년 1월 5일 중공중앙당교의 개강식에서 중공의 신규선임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들에게 한 비밀강연이다. 강연은 6년간 기밀로 취급되어 오다가 2019년 3월에야 중공의 <구시>잡지에 발표되었다. 시진핑은 여전히 '공산주의의 원대한 이상'을 견지하고, 그들은 '최고의 이상과 최종의 목표는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심으로 공산주의를 진정 숭배하는 사람이 왜 당태종을 그렇게 치켜세울까? 그가 보는 것은 당태종의 어떤 치국이념일까?
정관지치는 당나라초기, 당태종 이세민의 재위기간에 나타난 치세국면을 가리킨다. 정치가 청명하고, 경제가 부흥하며, 문화가 번영한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때의 연호가 '정관(627-649)'이었으므로 역사에서 '정관지치'라 부른다. 정관지치는 뒤이어 오는 '개원성세(開元盛世)'의 기초를 이루고 중국전통사회를 최전성기로 끌어올렸다.
정관의 연호는 <역(易).계사하(繫辭下)>에 나온다: "천지지도(天地之道), 정관자야(貞觀者也)". '정도시인(正道示人, 올바른 도를 사람에게 보여주다)'이라는 의미이다. 중공이 중국에서 추진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공산주의의 사악한 이념이다. 그것은 전인류가 버린 것이다. 공산당 통치의 죄악은 현재 전세계에서 청산되고 있다. 중공고위층과 그 지낭들은 그럼에도 자신을 정관과 연결시키고자 하니, 정말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당태종은 도량이 넓었고, 안목이 원대했으며, 덕행이 숭고했다. 그래서 위대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당태종의 인덕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귀천을 따지지 않은데 있다. 그는 중생들을 잘 대해주고, 사방에 덕이 미치도록 하는 큰 흉금과 앙앙대국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성당지치가 나타난 원인이다. 당태종이 등극한 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요역은 1년간 면제해준다. 궁녀 3천명도 풀어준다. 정관3년, 당태종은 사형판결을 받은 범죄인들을 심사하다가 사형수 중에 유공(劉恭)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태어나면서부터 글자모양의 무늬가 있어서, 스스로 장래 제왕이 될 거라고 말해왔다. 그리하여 사형의 벌을 받은 것이다. 당태종은 목에 있는 글자모양의 무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것이고 특별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슨 징조도 아니라고 보았다. 만일 하늘의 뜻이 그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게 하는 것이라면 당태종이 그를 죽일 수도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당태종은 그를 석방시킨다. 중공이 반대인사, 민주인사, 신앙인사, 홍콩인, 신장인을 대하는 방식, 시진핑의 화상에 먹을 뿌린 여자아이에 대하여, 시밍저의 정보를 누설한 사람에게도 모두 엄벌했다. 여기에 어디 당태종의 인정의 모습이 있단 말인가?
정관지치때의 중국은 강역이 넓었고, 판도가 사상유례없이 컸다. 당태종은 열심히 다스려서 정치적으로 서역에 대한 관할을 강화했고, 외교적으로 아시아와의 왕래를 강화했으며, 민족관계에서는 소수민족을 '애지여일(愛之如一)'했다. 중공의 치하에, 시장, 신장, 내몽골의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파괴 그리고 문화압제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어디에서 장관지치와 조그만치라도 닮은 점이 있단 말인가.
당태종이 즉위한 후, 열심히 다스려서 정치적으로 옛날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잘 기용했고, 간언하는 말을 잘 들었으며, 관리들을 잘 정돈했다. 그리하여 수나라말기의 어지러웠던 국면을 안정시킨다. 지금의 중공은 오히려 중국동란의 근원이다. 정치적으로 반대파를 박해하는데, 이는 자해행위이다. 중공은 권력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친한 사람을 기용하고, 관료기구를 키웠다. 70년간 8천만의 중국인이 죽임을 당했다. 어찌 정관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정관지치의 정치특징은 분권행정이다. 당태종은 삼성육부제를 채택하여, 군주전제체제의 권력고도집중, 중앙집권의 폐단을 막았다. 정관때의 삼성은 직권이 구분되어 현재 정치의 특징인 '분권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중서성(재상)은 명령을 내리고, 문하성은 명령을 심사하고 부서하며, 상서성이 비로소 명령을 집행했다. 중공의 독재체제는 심지어 1천년전의 당나라만도 못하다. 한편으로 고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다른 한편으로 정령이 중남해를 벗어나지 못한다. 행정효율은 저하되고, 권력남용은 횡행한다.
정관지치는 간언을 잘 받아들였고, 언로를 널리 개방했다. 그리하여 청명한 정치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중공치하에서 언론의 입을 막고, 언론자유를 박탈하며, 반대인사를 모조리 없애버렸다. 당태종은 사람을 잘 쓰고 ,간언을 잘 받아주었다. 그것이 정관지치의 주요원인이다. 또한 정관지치의 중요특징이다. 중공이 시행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쫓겨나고, 나쁜 사람이 잘나가며, 모든 '망의중앙(妄議中央)'하는 자들은 가벼우면 처벌을 받고, 무거우면 목숨을 잃는다.
정관시기는 중국역사상 기본적으로 부정부패가 없던 시기이다. 이는 당태종의 가장 칭송할만한 업적이다. 중공의 부정부패는 중공자신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크고 작은 호랑이들은 잡으면 잡을수록 더 많아진다. 결국은 호랑이잡기를 그만두어야 했다. 왜냐하면 다 잡으면 전체 관료체제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관시기에 진정으로 왕자범법여민동죄(王子犯法與民同罪) 왕자가 죄를 범해도 일반백성과 같이 처벌받았다. 당태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가법률은 제왕일가의 법이 아니다. 천하가 모두 같이 지켜야 하는 법률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법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법률이 만들어지면, 당태종이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앞장서서 법을 지켰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정관3년, 전국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이 29명이다. 이는 집권사회법제의 최고표준 '형조(刑措)'에 이른 것이다. 형벌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공치하에서 법률은 근본적으로 휴지조각이다. 중공은 법률로 인민을 통치하고 압제한다. 근본적으로 법 아래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기본관념은 없다.
정관시기, 당나라의 경제는 발달하여, 고도로 개방되었다. 길 위에서, 바다 위에서의 비단길무역이 성행했다. 세계에 유명한 '비단길'은 동서방물질문명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바로 당나라때 최고의 사용가치를 보인다. 중공이 이를 본받아 시행한 일대일로는 지금 이미 자금이 고갈되어, 목숨이 간당간당한다. 그리고 연선 각국이 거액의 채무를 지고, 중공은 살기를 숨기고 있어서, 각국기 속속 포기하고 반대하게 되었다.
정관지치는 문화방면에서, 학술을 장려하고, 문인들이 여러 경전과 사적을 정리하도록 조직했다. 장안에는 국자감, 문학관, 홍문관을 두어 저명한 유학자들이 학관(學官)을 맡아, 생원이 만명을 넘겼다. 당나라는 당시의 유학중심이다. 신라, 토번, 일본에서 온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국제유학생을 받아들이는 각도에서 보자면, 미국이 더욱 당나라와 닮았다. 중공이 유학생을 해외에 유학보낼 때, 스파이와 도둑을 섞어보내는 경우가 많다. 지금 미국에 유학생을 보낼 문마저 닫혀버렸다. 그럼에도 어찌 성당과 비교한단 말인가.
당태종의 치국지도에는 '식위인천(食爲人天), 농위정본(農爲政本)'이 있다. 즉 먹는 것이 백성에게 하늘이고,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다라는 것이다. "창고가 넉넉헤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염치를 안다" 당태종의 치국계획에는 국고의 양식에 9년치를 보관해서, 수해와 가뭄을 대비하게 했다. 중공치하에 중국의 양식은 자급자족도 못하고 고도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조금만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식량가격이 급등하고, 백성들은 해를 입는다.
당태종의 치국대계는 힘껏 호화사치와 방탕한 나쁜 분위기를 없애고, 사람들로 하여금 농사와 방직에 근면하게 종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사회의 풍속을 소박하고 돈후하게 하려 했다. 이렇게 사람들마다 인의의 마음을 가지고, 영원히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는 당태종이 풍속을 가다듬고 천하를 장악한 근본이다. 중공은 앞장서서 부패로 나라를 다스린다. 부패로 관리를 매수하고 통치를 강화한다. 중공은 도덕을 파괴하여, 도덕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산에 안심하고 종사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모두 하룻밤에 졸부가 되기를 꿈꾼다. 금전과 물질숭배가 만연한다. 성당시기의 민심이 안정된 것은 인정과 교화에 있다. 당태종은 군왕이 만일 인의와 성실로 모범을 보여 천하를 이끈다면, 백성들은 바람이 지나면 풀들이 드러눕는 것처럼 따르고 실행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중공이 실행하는 것은 폭정과 기만이다. 백성들도 그것을 배워서 따라한다. 전사회가 서로를 소기고, 전체 국가가 사기꾼의 나라로 되어 버렸다.
당금 중국사회를 살펴보면, 조그만치도 정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아마도 고층건물, 술자리와 연회, 허황된 번화함과 표면의 사치를 생각할 것이다. 중국은 최근 들어 많은 복고풍이 유행했다. 예를 들어, 당나라복장을 입는다거나, 당나라때 풍만한 여인의 조류를 따른다거나. 이들 어린 여자들이 입는 화려한 당나라의복은 통통해서 보기에 귀엽기는 하지만, 하나가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한가? 그것은 바로 정신의 내함이다. 당나라때 부녀의 옹용대도, 부태, 이런 기질이 현대의 통통하고 다이어트하지 않은 여자가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하여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의 한 대학 피아노과 교수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현재 아무도 서방의 고전음악을 작곡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협주곡, 교항곡, 가극등등. 쇼팽,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등의 창작했던 그런 작품들을. 그는 있다고 했다. 현대도 있다고 했다. 다만 많지 않을 뿐이라고. 현대에는 누가 작곡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17세기 18세기와 똑같이 만들어도 그것을 '고전음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화의 마지막에 우리는 공통으로 인정했다. 현대인들은 그런 감정이 없다. 그런 심경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쓰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누군가 써냈다고 하더라도, 모방해낸 것이다. 사람들이 들어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중공의 지도자 예를 들어 시진핑같은 사람은 중국의 전통에 대하여, 실용주의적인 방식으로 마음대로 끄집어내서 쓴다. 그들은 아마도 풍수를 믿고, 용맥을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공간에 더욱 고급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히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시대를 따라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항상 역행한다. 중공멸망을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계속 엑셀만 밟고 있다. '정관지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장려해야할 일이다. 다만 중공의 고위층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세민과 같은 덕행, 원견과 박력이 없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할 것이다. 중공의 관료는 삼무(三無)라 할 수 있다. 복덕(福德)이 없고, 박력(魄力)이 없고, 능력(能耐)이 없다. 시대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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