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무덕9년 육월초나흘(626년 7월 2일), 이세민(李世民)은 "현무문지변(玄武門之變)"을 일으켜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황태자에 책봉된다.팔월초아흐레,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퇴위하고, 이세민이 황제로 등극하며,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친다. 비록 역사상,이세민은 대기회굉(大氣恢宏)의 군주이지만, 그는 즉위후 6명의 개국공신들을 죽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 후군집(侯君集)
후군집은 어려서 이세민을 따랐다. 무덕9년(626년), 후군집은 현무문지변에 참가하고, 장손무기(長孫无忌)등 5명과 함께 논공행상에서 1등을 차지한다. 정관4년(630년) 후군집은 병부상서가 된다. 정관9년(635년) 이정(李靖)이 토곡혼(吐谷渾)을 평정한다. 정관12년(638년), 이부상서가 된다.
그러나, 당태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지만, 후군집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금은보화를 탐하다가 하옥된다. 이후 석방되기는 했지만, 마음 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정관17년(643년), 후군집은 장량(張亮)과 모반을 꾀한다. 장량이 밀고했지만, 당태종은 방증이 없다면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얼마 후, 후군집은 태자 이승건(李承乾)의 모반에 가담한 것으로 고발되고 결국 처형당한다. 당태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와 결별했고, 능연각(凌煙閣)의 그의 초상은 남겨두도록 명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후군집이 죽은 것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 장량(張亮)
후군집과 마찬가지로, 장량도 "능연각24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당연히 장량은 후군집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수나라말기, 장량은 와강기의(瓦崗起義)에 참가하고, 서세적(徐世勣, 나중의 이적)의 휘하에서 일한다. 당나라에 귀순한 후, 진왕부(秦王府, 진왕은 당시 이세민)의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된다. 당태종이 즉위한 후, 장량은 신임을 크게 받았다. 이부상서 후군집의 모반을 밀고하여 형부상서에 오르고, 일찌기 창해도행군대총관을 맡아 고구려원정에도 참가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량은 말년에 술사(術士)를 맹신하여, 다른 뜻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양자 오백명을 거둔다. 정관20년(646년), 장량은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당해 서시(西市)에서 처형당한다.
3. 나예(羅藝)
역사상 나예는 성격이 교활하며 말을 이리저리 뒤집고 인의롭지 못한 인물이지만, 전투에서는 용감하고 무술과 활쏘기에 능했다. 수나라말기, 나예는 전공을 많이 세워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이 되어 탁군(涿郡)에 주둔한다. 당나라 무덕2년(619년) 시월, 조정은 이(李)씨성을 하사하고, 연군왕(燕郡王)에 봉해준다. 이에 대하여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나예가 정세를 분석한 후 당나라에 귀순하고, 당나라의 통일전쟁을 지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무형중에 당나라의 하북지역에서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본다.
정관원년(627년) 정월, 나예는 밀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병력을 이끌고 입조한다. 당태종은 이부상서 장손무기, 우무후대장군(右武侯大將軍) 위지경덕(尉遲敬德)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게 한다. 나예는 패배하여 도망쳤고, 영주(寧州) 변경의 오씨역참(烏氏驛站)까지 도망갔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그는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최후가 좋지 못했다.
4. 유계(劉洎)
유계는 처음에 소선(蕭銑)의 황문시랑(黃門侍郞)이었다. 당나라에 귀순한 후, 남강주도독부장사(南康州都督府長史)가 된다. 이세민이 즉위한 후, 유계는 중용받아 당나라의 재상에 오른다. 정관18년(644년) 유계는 시중(侍中)으로 승진한다. 정관19년(645년), 당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 유계에게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겸 검교민부상서(檢校民部尙書)를 겸직하게 하여, 황태자 이치(李治)가 정주(定州)에 유수(留守)하면서 감국(監國)하는 것을 보좌하게 했다.
같은 해 구월, 저수량(褚遂良)의 무고로 당태종은 유계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에 대하여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유계의 죽음은 고대의 저명한 억울한 사건중 하나로 보고 있다. 당고종(唐高宗) 이치가 즉위한 후, 유계의 아들 유홍업(劉弘業)은 저수량이 유계를 무고하였다고 사소를 올린다. 그리고 무측천(武則天)이 조정을 장악한 후, 유계의 사건은 번복되고 명예를 회복하며, 관직과 작위가 복원된다.
5. 이효상(李孝常)
이효상은 수나라의 대장 이원통(李圓通)의 아들이고, 당고조 이연의 친척동생이다. 당국공 이연이 장안을 공격할 때, 이효상은 영풍창(永豊倉)을 바쳤고,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된다. 무덕원년(618년), 상주국(上柱國), 의안군왕(義安郡王)에 봉해지고, 이주도독(利州都督)이 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당나라는 이효상이라는 종실을 후대해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효상의 공로만 가지고는 그가 상주국, 의안군왕에 봉해지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이효상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관원년 십이월(628년), 이효상은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유덕유(劉德裕), 통군(統軍) 원홍선(元弘善),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장손안업(長孫安業), 활주도독(滑州都督) 두재간(杜才干)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다가 일이 들통나서 이세민에게 처형당한다.
6. 이군선(李君羨)
문학과 영화드라마작품의 영향으로 이군선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이군선은 처음에 와강채(瓦崗寨) 이밀(李密)의 부하였다. 나중에 부하를 이끌고 이연에 귀순한다. 그후 이군선은 여러 전공을 세워 우무후중랑장이 되고, 무련현공(武連縣公)에 봉해진다.
그러나, 정관22년(648년), '여주무왕유천하(女主武王有天下)'라는 유언비어로 인하여 좌천된다. 그후 어사가 그에게 죄명을 뒤집어 씌워 탄핵당한다. 결국 이세민은 '기군압민(欺君壓民, 군주를 속이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의 죄명으로 그를 처형한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이군선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의 최후는 동정받을 만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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