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후닝)

왕후닝(王滬寧): 사상 가장 약한 상무서기(常務書記)

중은우시 2018. 3. 7. 18:24

글: 최사방(崔士方)


3월 4일의 중국의 제13기 전인대주석단회의에서 10명의 주석단 상무주석을 선출했다. 차례로 리잔수(栗戰書), 천시(陳希), 왕천(王晨), 차오젠밍(曹建明), 장춘셴(張春賢)등이다. 두번째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서기처 상무서기인 왕후닝이 아니라, 중앙조직부 부장인 천시였다. 이는 왕후낭이 관례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조직, 인사를 관장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현상이다.


이전의 3기주석단에서 두번째로 이름을 올린 상무주석은 관례에 따라 조직,선전을 관장하는 중앙서기저 상무서기가 맡아왔다. 전인대의 인사교체는 중국공산당이 내정하고, 구체적인 고,중,하급 인선은 중앙조직부와 인사부에서 하고 중편판은 편제를 만든다. 여기에 국무원과 정협의 인사배치, 및 여러 외국매체에 대한 대외선전업무를 맡는다. 이렇게 큰 일을 해야 하므로 당연히 지위가 더 높은 상무서기가 단순한 중앙조직부부장보다는 맡는데 적절하다.


다만, 이번에 돌연 천시에게 맡게 한 것은 이미 맡은 업무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월남공산당의 중앙조직부 부장 범명정(范明政)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왕후닝이 접견을 하지 않고, 중기위서기 자오러지가 접대했다. 이것도 왕후닝이 조직대권을 잡지 못했다는 하나의 신호이다.


중공 중앙서기처 상무서기는 중공당내의 부총서기에 상당한다. 당건(黨建), 조직인사, 선전등을 책임진다. 그 실권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시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해진다.


최근의 다섯 상무서기를 되돌아보면, 후진타오, 쩡칭홍, 시진핑, 류윈산, 왕후닝이 있다. 후진타오, 쩡칭홍, 시진핑의 3명은 직권이 비슷하다. 다만 후진타오는 '약한 후계자'였다. 서기처에는 장완넨, 뤄간과 쩡칭홍등 대단한 인물들이 있어서 그의 지시를 완전히 그의 지시를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진핑은 비록 강웅이지만, '후계자'의 지위에 있을 때는 도광양회했다. 오로지 인맥이 넓은 쩡칭홍은 장쩌민을 등에 업고 권세를 다해서 일시에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류윈산에 이르러, 국가부주석의 직위는 리웬차오가 가져간다. 그리고 시진핑은 중앙조직부와 중앙선전부에 각각 두 명의 심복 천시와 황쿤밍(黃坤明)을 상무부부장으로 심는다. 그리고 중앙조직부의 고위층은 대거 인물을 교체한다. 이렇게 되니, 류윈산은 중앙조직부에 대하여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이들 암중으로 이미 시씨로 성을 바꾼 '아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는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만 중앙선전계통은 류윈산의 뿌리가 깊었고, 그와 가까운 인물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황쿤밍이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앙선전부는 기본적으로 류윈산이 장악했다.


왕후닝은 19대에 '상위'에 들어간다. 그래서 최대의 다크호스가 되었다. 그런데, 수중의 권력은 류윈산보다도 두 단계 줄어들었다. 먼저 중앙당교교장의 직위도 천시가 가져간다. 국가부주석의 자리도 그에게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고 왕치산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만일 조직인사권마저도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왕후닝이 손안에 장악한 것은 겨우 선전계통과 당건 두 가지 뿐이다.


문제는 중앙선전부 부장 황쿤밍이 대표적인 '절강신군'이다. 중앙서기처의 다른 몇몇 서기도 왕후닝과 관계가 깊지 않다; 중판주임 딩쉐샹(丁薛祥)은 시진핑의 대비서이다, 정법위서기 궈성쿤(郭聲琨)도 시진핑이 직접 관할한다. 중기위 부서기 양샤오두(楊曉渡)는 자오러지의 사람이다. 통전부 부장 여우췐(尤權)은 신임 정협주석 왕양의 사람이다. 당건이라는 분야도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는 구호하에 왕후닝에게 그다지 발언권이 없게 될 것이다.


왕후닝이 장악한 것은 이데올로기분야 외에 이미 명확하게 접수한 군단(群團, 공회, 공청단, 부련등 업무)공작과 잠시 아직도 책임지고 있는 중앙정쳔실이다. 아마도 남은게 거의 없을 것같다.


이렇게 보면, 왕후닝은 최근 25년이래 가장 약소한 상무서기라는게 반드시 허언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