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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후닝)

왕후닝의 권세가 더욱 약화되었다

by 중은우시 2022. 8. 28.

글: 악산(岳山)

 

베이다이허회의후, 20대의 인사배치를 놓고 힘겨루기가 펼쳐지고 있다. 중공의 '대뇌'로 불리는 중앙정책연구실에 인사변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왕후닝의 권세가 더욱 약화되었다는 신호로 보인다.

 

왕후닝의 제자가 중앙정책연구실을 떠났다.

 

8월 25일, 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겸 비서장 린샹리(林尙立)가 류웨이(劉偉)의 자리를 물려받아 중국인민대학 교장(부부장급), 당위부서기를 맡았다. 린샹리는 원래 부부장급이었으므로 동급으로 이동하면서 중앙정책연구실을 떠난 것이다.

 

린샹리에게는 주목을 끄는 신분이 있다. 그는 '삼대귀사(三代鬼師)'로 불리는 현임 중국정치국상위 왕후닝의 제자인 것이다.

 

린샹리는 1963년 11월 푸젠에서 태어났다. 그는 푸젠 민허우(閩侯)사람이다. 1988년 상하이 푸단대학 국제정치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그 해에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1997년에는 교수로 승진한다. 1998년에는 푸단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푸단대학 부교장을 역임했고, 2017년 7월 중앙정책연구실 비서장이 된다. 2020년 11월에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겸 비서장이 된다.

 

푸단대학에 있을 때, 왕후닝과 린샹리는 사제, 동료간이었다. 두 사람의 학술연구방향은 정치학이다. 린샹리는 왕후닝을 따라 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온 후, 한때 왕후닝의 '후계자'라는 말을 들었다.

 

금년 8월, 베이다이허회의후, 만일 중공고위층간에 타협과 거래가 이루어졌다면 린샹리의 이동도 그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인사변동은 왕후닝의 권세에 대한 지표가 되고, 그의 정치적 기반이 이미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공 '대뇌'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왕후닝은 푸단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동안, '6.4'사태를 맞는다. 그는 한때 프랑스로 3개월간 피신해 있었다. 왕후닝은 한때 학생운동에 반대하는 문건에 서명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장쩌민, 쩡칭홍의 눈에 든다. 1995년 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갔고,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3대를 겪는다.

 

중앙정책연구실은 중공의 소위 최고싱크탱크이다. 왕후닝은 1998년 4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 되었고, 2002년부터 2020년 10월가지 계속하여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맡았다. 이 기간동안, 왕후닝은 중공의 '정치화장사'로 장쩌민을 위하여 '삼개대표론'을 만들어내고, 후진타오를 위하여 '과학적발전관'을 만들어냈으며, 시진핑이 취임한 후에는 왕후닝이 다시 시진핑을 '중국몽' '시진핑사상' '시핵심'을 포장했다. 그러나 기실 시진핑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왕후닝은 크게 발탁된다. 어용문인의 신분으로 19대에는 정치국상위라는 중공최고위층에 오르기까지 한다.

 

만일 중앙정책연구실을 '중공의 대뇌'라고 부른다면, 왕후닝은 중공이라는 몇대 당수의 '대뇌'였다. 시진핑은 중공19대이후 내외정책을 급격히 좌경화하여, 형세가 급격히 나빠지는데, 왕후닝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용모에서 사람됨이 드러난다. 왕후닝은 내심이 음암(陰暗)하다. 볼 줄 아는 사람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매체인 Hugh Hewitt는 <워싱턴포스트>에 이런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왕후닝은 이데올로기에서 시진핑에게 '남다른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중앙정책연구실의 지위에 변화가 생긴 듯하다.

 

2020년 10월, 정치국상위를 맡은지 이미 3년이 된 왕후닝은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의 자리를 그를 여러 해동안 따른 장진췐(江金權)에게 넘겨준다. 비록 장진췐은 왕후닝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중공당수의 정치사상을 포장하면서 승진했지만, 장진췐은 지금까지도 중공중앙후보위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중공내부의 승진관례를 보면, 1959년 9월생인 장진췐(63세)은 아마도 20대에 직접 중앙위원으로 승진할 수는 있지만, 정치국에 들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왕후닝이 2002년 10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맡고, 같은 해 중공16대때 중앙위원이 되고, 2012년 중공18대때 정식으로 정치국에 진입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장진췐이 최고의사결정층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이는 시진핑이 더 이상 중앙정책연구실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지도자의 연설문을 초안하거나 중요한 문건을 기초하는 비서역할만 하게 될 뿐일 것이다.

 

중앙정책연구실은 19대를 전후하여 지금까지, 고위층에서 빠지는 사람은 있어도 새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2014년 중앙선전부 부부장 겸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던 왕샤오후이(王曉輝)는 2018년 1월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으로 승진하고, 2020년에는 정식으로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사임했다. 2022년 4월에는 쓰촨으로 갔다.

 

2017년 6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8년간이나 맡고 있던 판셩저우(潘盛洲) 역시 중앙정책연구실을 떠나 중앙기율검사위 주홍콩마카오판공실 기검조장으로 옮겨간다.

 

2017년 3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으로 승진한 장지(張季)는 2018년 3월 이미 전국정협 사회및법제위원회 부주임으로 옮겨갔다.

 

린샹리까지 떠난 후, 현재 중앙정책연구실의 부주임은 텐페이얜(田培炎) 단 한명이 남았을 뿐이다. 왕후닝의 본거지에 사람이 거의 남지 않은 것이다.

 

왕후닝은 이미 이용가치가 사라졌는가?

 

6월에 정식으로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의 신분이 공개된 리슈레이(李書磊)는 시진핑이 중앙당교 교장을 맡고 있을 때, 부교장이었다. 그는 시진핑의 심복 지낭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시진핑의 당내중요연설문은 리슈레이가 대부분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임 정치국위원, 중앙선전부 부장인 황쿤밍(黃坤明)은 20대에 은퇴할 것이며, 그 직위는 아마도 리슈레이가 승계할 것이며, 리슈레이는 순조롭게 정치국에 진입할 것이라고 본다.

 

말이 나온 김에 추가로 언급하자면,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직을 떠난 왕샤오후이는 원래 왕후닝이 중공20대때 중앙선전부 부장으로 배양했던 인물인데, 리슈레이에 밀린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리슈레이가 왕후닝을 대체하여 시진핑의 막후색심지낭역할을 이미 하고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미국매체는 시진핑의 최초임기때 시진핑은 매체에서 사진 1장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왕후닝의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 이 역할이 이미 조용히 리슈레이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최근 시진핑의 국내시찰때 지방정부가 더욱 북한화된 시진핑칭송을 하는 것도 아마 리슈레이의 지령일 것이다.

 

리슈레이가 문화선전대권을 장악하면서, 만일 장진췐이 중공20대에 정치국에 진입하지 못하면, 이는 중앙정책연구실의 중공 '대뇌'라는 기능을 이미 중앙선전부가 대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당연히 중앙선전부가 무슨 짓을 하든, 중공은 실로 강노지말(强弩之末)로 마음이 있어도 힘이 없고, 그다지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거의 반달 가까이 되는 베이다이허 비밀회의가 끝난 후, 7명의 정치국상위중 다른 사람들은 속속 얼굴을 드러내는데, 왕후닝은 지금까지 종적이 보이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왕후닝이 '20대' 문건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기실 그는 그런 일밖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왕후닝이 막후에서 낸 아이디어덕분에, 최근 몇년간 중국은 내외적으로 곤경에 빠졌다. 시진핑에 있어서 아이디어가 소진된 왕후닝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 중공20대에 유임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왕후닝의 정치적 본거지가 와해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그 신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