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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후닝(王滬寧): "중간인"의 정치인생

by 중은우시 2018. 8. 16.

글: 주효휘(周曉輝)


<밀고자001:파블리크 모로조프의 신화>를 쓴 전소련작가 유리 드로즈니코프는 <바늘위의 천사>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에서 얘기하는 것은 후르시쵸프시기 한 신문 편집부의 이야기이다. 등장하는 인물은 편집장, 기자에서 운전기사, 타자수, KGB, 의학전문가로부터 최고지도자까지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묵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경청한다는 묵계이다. 간단한 마르크스주의는 벽에 쓴 표어이지,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모두 피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소설에서 쓴  <프라우다>는 오직 한 가지 원칙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독자가 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나라는 모든 게 정상이다'라는 것이다." 철로사고, 항공사고와 생산과정의 불행한 사건은 일체 비밀에 부쳐진다. 심지어 날씨에 관한 소식도 비밀이다. 그리고 알게 되는 것은 미래 3일간의 날씨인데, 그것도 항상 유쾌한 맑은 날씨라는 것이다.


책에서 이런 인상깊은 대화가 있다. 노기자 라브보르트는 젊은 사진기자에게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각종 가짜영웅을 만들어내고 각종 전인민이 좋아할 사건을 상상해 낸 것을 자랑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거짓말은 순수하다. 조그만치의 진상도 섞여 있지 않다." 젊은 기자가 다시 묻는다: "당신은 자신의 재능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자 대답은 이러했다: "아니다. 우경의 사상은 내가 왼손으로 쓰고, 좌경의 사상은 내가 오른손으로 쓴다. 나는 완전히 중간인이다."


만일 책에 나오는 '소련'을 '중국'으로 바꾸어 보면, 아무도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현재 중국의 아래위는 아무도 진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믿지 않는다. 다만,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경청하는 묵계는 중국대지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중국의 관료사회와 매체에서는 라브보르트같은 인물이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 '문제가 터진' 것으로 알려진 문화선전을 담당하는 중공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왕후닝과 같은 경우이다. 어떤 소식에 따르면, 미중무역전과 최고지도자에 대한 선전이 부적절하여, 골치아프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속죄양으로 버려질 것같다.


왕후닝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이것은 모두 그가 이전에 선택한 필연적인 결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번의 선택과정에서 일찌감치 중국공산당이라는 검은 진흙탕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동시에, 자신의 양심을 필았다. 그를 속죄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부정확하다. 그저 이번 당내투쟁에서 그가 잘못 걸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크게 잃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해외매체는 이렇게 공개한 바 있다. 1955년에 태어난 왕후닝은 중학교때 문혁을 맞는다. 그는 집안에 숨어서 책을 보고, 이렇게 하여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는 능력을 배양한다. 상해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1978년 복단대학 국제정치과의 연구생으로 들어간다. 그는 마르크스정치학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 졸업후에는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복단대학에서 17년간 있었다.


왕후닝에 대하여, 복단대학의 교수 학생들은 대체로 세 가지로 평가한다: "일잘하고 재능있고, 한번에 열줄을 읽는다." 다른 사람은 2,3일이 걸려 읽을 책을 그는 하루에 세권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별명은 "살아있는 정치학사전"이다. 나이 겨우 29살때 부교수로 파격승진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일찌기 복단대학에 있을 때, 왕후닝은 권력자를 위해서 일하고, 고위층에 건의하는 모사(謀士)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이런 생각은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혹은 일종의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왕후닝은 1988년에서 1989년까지 미국에서 방문학자를 지낸 후, 미국정치체제를 비판하는 <미국은 미국을 반대한다>는 책을 낸다. 그외에 그는 자주 <문회보>등 신문잡지에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글을 투고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중국이 전력을 개혁에 투입하려면, 중앙집권을 실시해야 하고, "개명전제(開明專制)"를 실행해야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왕후닝이 무협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김용의 소설은 사람들에게 교묘한 구상이나 대담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무협소설의 영웅주의는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이상주의와 약간의 영웅주의 정서를 가진 왕후닝은 운명의 안배하에 정치이론과 저작이 당시 상해시위서기로 있던 장쩌민과 상해시위 선전부장으로 있던 쩡칭홍의 인정을 받는다. 어느 해의 신년다과회에서, 쩡칭홍은 특별히 복단대학으로 가서 왕후닝을 만난다. 그와 정치체제등에 대하여 2시간여의 토론을 가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쩌민도 왕후닝이 쓴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쩌민의 장남 장몐헝은 왕후닝이 미국에서 알게된 친구이다.


역시 복단에 있을 때, 왕후닝은 중공13대, 14대의 중요이론문헌을 초안하는데 참가한다. 그후에 1993년 그는 복단대학 변론팀의 고문 신분으로 '국대대학변론대회'에 참가하여 이름을 떨친다.


장쩌민, 쩡칭홍이 북경으로 가서 국가최고권력을 장악한 후, 그들에게 인정받던 왕후닝도 장쩌민의 발탁하에 1995년 중앙정책연구실의 정치조 조장이 된다. 1998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 되고, 이때부터 "국가주석특별조리"의 신분으로 장쩌민의 외국방문등 외사활동에 따라다닌다. 그리하여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두뇌가 된다.


2002년 후진타오가 취임한 후, 왕후닝은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하고, 중앙위원이 된다. 2007년에는 중앙서기처 서기에 당선되어 국가지도자의 반열에 오른다. 2012년 중앙정치국위원이 된다. 2017년에는 권력의 최고봉인 정치국 7명 상임위원중 1명이 된다. 이데올로기와 문화선전을 담당한다.


왕후닝은 관료사회에서 20여년을 보냈다. 3명의 국가지도자를 모시면서 승승장구했다. 원인은 그가 모든 지도자를 위하여 이론과 사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쩌민의 "삼개대표",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그리고 시진핑의 "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 이런 능력은 중공당내에서 확실히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이처럼 공허하고, 화려하나 실질은 없으며, 그저 듣기좋은 말만 넘쳐나고, 스스로 모순되는 이론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매 지도자의 '간판'이 되는데는 영향이 없다.


단순히 이 방면에서 보면, 왕후닝의 옛날의 이상과 정서 심지어 양심은 이미 중공의 관료사회에 철저히 동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피동적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동화되어 갔다. 최종적으로 라브보르트식의 인물이 된 것이다. 왼손으로 우경사상을 쓰고, 오른손으로 좌경사상을 쓰며, 순수한 거짓말을 만들어내서 대중을 속이고, 스스로를 '중간인'이라고 여기는 특정한 고위층에 빌붙지 않은 왕후닝은 자신의 '정치인'으로서의 이상에서 갈수록 멀어졌다.


옛날 그가 <정치의 인생>을 쓸 때 이렇게 쓴 바 있다: "누가 정치인인가? 바로 죽음의 앞에서도 변하지 앟는 신념, 동서를 관통하는 학문,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인격, 높은 곳에서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안목, 불요불굴의 의지, 해납백천의 도량, 대세를 장악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미 중공에 동화되어 변해버린 왕후닝은 이런 '정치인'이 아닐 뿐아니라, 그의 곁에도 이런 '정치인'은 없다. 그의 소위 정치이상은 일찌감치 깨져버린 것이다.


일부 보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왕후닝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학자로 봐주기를 원했다고. 그러나 중공이라는 간장독안에서, 계속하여 순수한 거짓말을 만들어낸 그는 기실 진정한 학자로서의 독립적인 기개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아니라(왜냐하면 중공은 그런 기개있는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권력자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계책을 내놓고, 사상적으로 대중을 마비시키고, 여론을 통제하니, 역사상 오명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찌기 이상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확실히 비극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