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중일보
1913년 3월 20일 밤, 후닝(滬寧)기차역은 평소처럼 사람들로 붐볐고, 인파는 끊이지 않았다. 기차가 내는 기적소리와 함께, 송교인은 배웅나온 황흥, 우우임 그리고 요중개등과 손을 흔들어 작별하고, 검표소로 들어갔다. 바로 이 때,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검표소에서 돌연 세 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송교인이 핏물 속으로 쓰러진 것이다. 기차역은 졸지에 혼란에 빠지고, 여행객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암살범도 그 틈을 타서 사라져서 행방이 묘연해진다.
송교인은 자가 둔초(遁初)이고 호는 어부(漁父)이다. 호남 도원사람으로, 1905년 일본에서 동맹회에 참가하고, 1910년에서 1911년 <민립보>의 주필을 지낸다. 신해혁명후,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여하여 남경임시정부 법제원 원장을 맡는다. 5월에는 북경으로 가서 농림총장이 된다.
송교인암살소식이 퍼져나가자 전국에서는 큰 파란이 일어난다. 각 대형신문매체는 앞다투어 이 가슴아픈 의외의 소식을 전했다. 원세개는 명령을 반포하여: "전 농림부장 송교인은 국사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공화국을 만드는데 그 공이 아주 크다.우리 국밍은 같이 깊이 비통해한다."
군중과 여론의 압박하에, 원세개는 강소도독 정덕전에게 전보를 보낸다: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기한내에 사건을 해결하여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하라."
사건의 조사업무로 바쁜 와중에, 정부의 어용신문은 국민당 내부에서 다툰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인심이 흉흉했다. 당연히,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찌기 남경임시정부를 성립시킬 때, 송교인은 정부의 체제원인으로 손중산과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손중산은 남경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송교인이 손중산에게 책임내각제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송교인이 총리를 맡아, 실제 내정,외교를 장악하고, 손중산은 총통을 맡아 형식상의 국가원수가 되는 것이었다. 손중산이 반대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손중산이 주장한 총통제가 시국에는 더욱 부합했다.
국민당이 창건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중산은 당무를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겠다는 심정으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철로를 고찰했다. 송교인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 손중산은 여전히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강소도독 정덕전, 민정장 응덕굉(應德閎)은 전보를 보내어 전성의 각급관리들에게 전력을 다하여 흉수를 붙잡아 기한내에 사건을 해결할 것을 독려했다. 황흥과 진기미(陳其美)는 공공조계의 총순에 서신을 보내어, 현상금 만위안을 걸었다. 그러나 시종 유력한 단서를 잡지 못한다.
3월 23일, 영국조계의 순포방에 예상외의 사람이 온다. 순포는 그가 부근일대에서 유명한 골동품상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이 골동품상은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진술로 인하여 송교인 암살사건이 점차 드러나게 될 줄은. 당시 그는 순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십일전에 나는 문원방의 응기승(應夔丞)의 집에서 골동품을 팔았는데, 그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에게 언제 어디서 이 사람을 암살해달라고 하면서 일이 성사되면 나에게 1천원의 보수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저 장사만 할 줄 알지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어서, 그 일을 맡지 않았다. 당시 나는 사진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는데, 오늘 내가 신문에서 보니 송선생의 사진이 바로 응기승이 나에게 암살하라고 한 그 사람이었다. 나는 믿는다. 만일 응기승을 찾아가면 흉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응기승은 원래 상해의 깡패, 방회두목이었다. 또한 혁명당의 일원이기도 했다. 호군도독부 첩보과 과장도 지낸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 다시 옛날의 사업으로 돌아가서, 홍방(紅幇)을 '국민공진회'로 개명한다.
후베이로 잉춘방 228호, 한 여자가 마침 차탁 옆의 남자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다. 돌연, 대문을 걷어차며 문 밖에 조계의 순포가 나타난다. 여자는 대경실색한다. 남자는 그 광경을 보고는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순포가 담장위에서 붙잡아 수갑을 채운다. 이 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응기승이었다.
응기승은 송교인암살사건에서 직접 수행한 자는 아니다. 응기승이 제공한 단서에 따라, 순포는 다시 문원방(文元坊)을 조사한다. 한 순포는 돌연 익숙한 모습의 인물이 문원방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한쪽 발을 막 문원방으로 내딛였을 때, 돌연 나타난 순포에게 붙잡힌다. 남자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를 체포한 순포도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는 바로 상해를 돌아다니는 망명객 무사영(武士英)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의문은 응기승이 왜 송교인을 살해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송교인이 처한 역사적 환경부터 얘기해야 한다.
신축조약을 체결한 후, 청나라조정은 식민통치와 인민착취의 도구로 바뀐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발발과 혁명형세의 발전으로 서양인들도 새로운 대리인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한다. 그들은 원세개를 주목한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원세개와 손중산의 차이는 바로 전자는 음모가이고 후자는 이상가라는데 있다.
당시 손중산은 원세개에 대하여 완전히 신임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번에 손중산은 송교인편에 선다. 손중산은 비록 원세개에게 임시대총통을 양보했지만, 양보하기 전에 <임시약법>을 통과시켜, 총통제를 내각제로 고쳐 놓았다. 법률의 형식으로 원세개가 장래 독재를 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내각제는 의회를 기초로 형성되는 것이다. 내각의 수뇌는 의회에서 선거를 통하여 탄생한다. 의원중 다수를 점한 정당 혹은 정당연맹의 영수가 맡게 되는 것이다. 국가원수는 그저 명목상 국가를 대표한다. 실제권력은 없다. 국가의 실제권력은 내각에 있고, 내각이 의회에 책임을 진다.
독재통치를 생각하고 있는 원세개로서는 책임내각제라는 것이 발목을 잡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독재의 길을 닦는데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책임내각제를 없애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다.
국민당은 1912년말에서 1913년초의 국회대선에서 승리를 거둔다. 국민당인은 이로 인하여 자신만만해진다. 송교인이 내각총리를 맡아 원세개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한다. 정식으로 국회가 개회하기 전에 송교인은 양자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도처에서 연설을 하는데, 원세개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의 헌정사상을 천명했다. 책임내각을 건립하기 위하여,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론몰이를 한 것이다. 언론에서도 이를 대거 다루어 세상을 뒤흔든다.
원세개는 송교인과 국민당이 그에 대한 위협이라고 깊이 느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송교인에게 양복과 교통은행 50만위안의 어음 한 장을 보내어 그에게 마음대로 쓰라고 한다. 다만 송교인은 북경을 떠나 남하하기 전에 조병균(趙秉鈞)으로 하여금 원세개에게 돌려주게 한다. 그리고 서신을 남겨 감사인사를 한다: "체포지증(绨袍之贈), 감명폐부(感銘肺腑), 장자지사(長者之賜), 인하감사(仁何敢辭), 단혜증오십만원(惠贈五十萬元), 실부감수(實不敢受)". 그후 송교인은 예전처럼 널리 자신의 정치주장을 선전하고, 자신은 독재세력과 세불양립이라는 태도를 표명한다.
1913년 3월 20일, 송교인은 상해에서 출발하여 북경으로 가려고 한다. 배웅한 사람은 황흥, 요중개, 우우임등이다. 그날 저녁 10시경, 기차가 역에 들어온다. 송교인의 일행 몇 사람은 서로 얘기를 하면서 검표처로 걸어갔다. 바로 이 때, 돌연 총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송교인은 손으로 배를 붙잡고 핏물 속으로 쓰러졌다.
송교인은 신속히 철로의원으로 보내어졌으나, 치료를 하지 못하여 죽고 만다.
송교인 암살사건이 발생한 것은 바로 국민당과 원세개의 사이의 갈등이 날로 격화되던 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건의 배경과 내막에 여러가지 추측을 하게 된다. 동시에 이 두 정치역량은 풍구낭첨(風口浪尖)으로 몰려간다.
1913년 3월 25일 오후, 프랑스순포방의 남총순은 사람을 이끌고 응기승의 집으로 가서 제2차수색을 실시한다. 여러 건의 공문과 증거를 수색해내는데, 봉조(封條)가 붙어 있는 가죽가방 하나를 찾아낸다. 그리고 다섯발짜리 권총도 한 자루 찾는다. 순포방은 사건발생당일 기차역에서 주은 2개의 총탄을 권총에 들어 있는 총탄과 비교해보고 ,양자가 동일모델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응기승의 집에서 수색해온 문건을 뒤져보다가 이 사건을 책임진 정덕전은 대경실색하게 된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송교인 암살의 배후자는 바로 이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홍술조(洪述祖)이다. 홍술조는 사람들이 "홍살배(洪殺胚)"라고 부른다. 다시 내무부 비서를 맡고 있었고, 실제로 원세개의 직접 지휘를 밭는 밀탐(密探)의 두목이었다. 그는 혁명당인에 대한 감시와 대응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설마 홍술조라는 이 내무부비서가 공공연히 국민당의 당수를 암살했을 것인가? 송교인암살사건은 더욱 깊고, 더욱 은밀한 내막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날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정덕전은 응기승의 집에서 찾아낸 문건을 뒤적이다가 돌연 하나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 이름은 조병균이다. 그는 내무부부관을 지낸 후, 당시 민국내각총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꼽을 만한 풍운아이다. 이런 인물이 나타나자, 정덕전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조병균과 송교인은 동료로서의 우의가 있다. 송교인이 여러번 북경에 갈 때, 원세개측의 인물중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바로 조병균이었다. 심지어 송교인은 매번 북경에 갈 때마다 조병균의 집에서 머물곤 했다. 그러나, 권력쟁탈앞에서는 조병균도 부득이 살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덕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돌연 날카로운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장일린(張一麐)으로 원세개의 기요비서였다. 그는 이미 정덕전에게 처음 전화를 걸어온 것이 아니다. 전화를 건 이유을 알고는 정덕전이 등에 식은 땀을 흘린다: 순포방에서 송교인암살사건에 중앙정부가 관련된 증거를 찾아내서 즉시 사람을 시켜 북경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전화에서는 특별히 한 마디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식으로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손중산과 황흥의 강력한 요구하에, 정덕전은 부득이 압수한 문건을 세상에 공개한다. 원본은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던 수면에 폭탄을 던진 꼴이었다. 신문계에서는 졸지에 큰 파란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속속 추측한다. 원세개가 송교인사건과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에 있구나.
사건은 이때부터 급전직하한다. 원세개는 어쩔 수 없이 무대 위로 끌려나온다. 당시 민의는 들끓었다. 원세개는 부득이 완화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경조윤(京兆尹) 왕치형(王治馨)에게 암시를 주어, 북경에서 거행되는 송교인추도대회에서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말해주게 한다.
이 왕치형은 멍청한 자이다. 그는 추도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응기승이 북경에 온 후에 조병균 총리에게 스스로 나서서 송선생을 암살하겠다고 나섰다. 총리도 총통에게 보고를 하였으나, 총리는 정치적 견해는 비록 다르지만, 암살은 절대로 써서는 안되는 수단이라고 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송교인사건과 총통, 총리는 무관하다. 이는 완전히 응기승과 홍술조가 기획한 것이다.
왕치형의 이 말은 욕개미창(欲蓋彌彰)의 효과를 나타낸다. 도둑이 제발저린 것으로 이해될 만했다. 그래서 원세개와 조병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사자들이 하나하나 기이하게 죽으면서 더욱 안개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무사영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 후, 1913년 4월 24일 옥중에서 급사한다. 외부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응기승의 일당이 살인멸구한 것이라고 한다. 독약을 만두에 넣어서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응기승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13년 7월, '이차혁명'이 발발한다. 응기승은 병마황란의 시대에 감옥의 죄수들과 함께 탈옥을 하여 청도의 조계지역으로 숨어들어간다.
1913년 손중산등 혁명당인은 원세개를 토벌하는 '2차혁명'을 일으킨다. 그러나 준비없이 나서다보니 실력부족에 국민당의 군사지도자 황흥이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법률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차혁명'은 좌절된다.
그후, 황흥, 손중산등은 속속 해외로 도피하고 원세개는 수개월후 자신이 오랫동안 노려오던 중화민국의 정식 대총통에 오른다.
원세개가 "이차혁명'을 진압한 후, 응기승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공공연히 "청평반원옥(請平反寃獄,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아달라는 청원)"을 보내고, 요란하게 드러내놓고 북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원세개에게 당초에 한 "훼송수훈(毁宋酬勳)"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원세개가 만일 그에게 훈위(勳位)를 수여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송교인암살의 주범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원세개는 머리가 아팠다.
응기승은 북경에서 상당한 기간을 머물다가 1914년 1월 원세개가 돌연 그를 천진으로 보낸다. 북경에서 떠난 기차에서 응기승은 느긋하게 창밖에 비치는 겨울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두 명의 사람이 기차칸으로 들어오고, 기차칸 내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금방 평정을 회복한다....
응기승의 사망소식이 나오자, 천진 <대공보>는 즉시 그 소식을 전하면서 평론을 추가한다. 평론에서는 전혀 감춰주지 않고 말했다: "응기승이 공공연히 전보를 보내어 공로에 보답을 요구하고, 곧바로 요란하게 떠들면서 북경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사건의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송교인암살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쉽게 추측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창끝을 원세개에게 직접 겨누었다. 그러나 사건은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1914년 2월 27일 새벽, 천진 하북구 인수리의 조병균의 사저에서는 가슴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리드니, "도독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간다. 이때의 조병균은 나이 겨우 51세였다.
송교안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원세개는 이목을 감추기 위하여, 조병균을 직예도독으로 보낸다. 조병균이 죽기 전에 여러번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를 만난다. 대외적으로 보도하기로는 국체(國體)의 건을 연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런 순간에 조병균이 죽었다는 것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조병균의 죽음은 원세개가 송교인암살의 죽머이라는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직접증거를 없앤 것이다.
말을 함부로 한 경조윤 왕치형은 원세개로부터 송교인추도회에서 '여기에 은삼백냥을 묻지 않았다'는 식의 변명을 한 것으로 미움을 샀고, 민국3년 6월, 그는 겨우 500위안을 부정부패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마지막으로는 북경측의 직접연락인 홍술조이다. 홍술조는 청도에 잠시 피해 있었다. 원세개가 죽자, 그는 다시 나와서 활동한다. 그러나 상해에서 소송이 걸렸고, 막 처리를 끝내고 떠나려 할 때, 송교인의 당시 15살된 아들 송진려등에게 순포방 입구에서 붙잡힌다. 그리하여 법원에 보내어지고, 송교인암살후 도주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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