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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의 분석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풍학영(馮學榮) 

 

1913년 3월 20일, 송교인이 상해에서 암살당한다. 3월 22일, 송교인은 수술을 받았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하여 사망한다.

 

이 암살사건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원세개설, 다른 하나는 진기미설.

 

필자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상해 각계매체의 이사건 수사 및 재판에 대한 보도로부터 시작하여, 본사건을 재검토하고, 엄정하고, 타당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포전인옥(抛塼引玉)하고자 하니, 여러분들의 많은 가르침을 바란다.

 

먼저 본사건 수사와 재판의 핵심과정과 내용을 보기로 하자.

 

송교인이 암살된 후, 국민당사람은 "왕아법(王阿法)"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데리고 상해공공조계 순포방으로 신고를 했다. 이어서 순포방을 도와 송교인암살사건의 지시자인 응기승(應夔丞)을 체포하는데 협조한다. 당시 재판은 공개되었으므로 기자는 아래의 재판기록을 기록했다.

 

".....전날 저녁, 국민당의 모군(某君)이 골동서화를 판매하는 하남사람 왕아법을 데리고 와서 (상해공공조계 순포방)의 복총순(卜總巡)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1주일전 서화를 판매하러 소서문(小西門) 밖의 응계형(應桂馨, 응기승)의 집에 갔는데, 응계형이 사진 한 장을 내놓고 말하기를 사진 속의 사람을 처리해야 하는데, 만일 처리해주면, 1천위안을 보수로 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사진을 돌려주었다.......친히 오십호서탐을 이끌고..... 영춘방 이기(李妓)의 집으로 가서 응기승을 체포했고, 데리고 와서 구금시켰다....패극(佩克) 변호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너는 응기승의 집에 두번 갔다고 했는데, 너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사진 속의 사람을 처리해야한다고 한 것은 첫번째 갔을 때인가, 아니면 두번째 갔을 때인가? 왕아법은 두번째라고 말한다....(응기승)은 다시 왕아법에게 힐문하여 말한다. 네가 두번째 내 집에 왔을 때, 무슨 말을 했는가? 왕아법이 답하여 말하기를, 두번째 당신의 집에 갔을 때, 당신은 집에 없었다. 만나지 못했다....응기승은 재판부에 소리쳐서 말했다: 금방 순포방 변호사가 물었을 때는 두번째 우리 집에 갔을 때 내가 사진을 보여주고 이 자를 처리하라고 했다고 하더니, 지금은 그가 두번째 우리 집에 왔을 때 만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진술을 재판부에서는 주의해주기 바란다...."

 

이상의 자료는 소력자, 양천리, 섭초창, 주종량, 서혈아가 편찬한 사료 <송어부> (제1집, 1913년, 민립보관 초판발행)에 나온다.

 

왕아법의 증언은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점이 있다. 다만 말실수이거나 기자의 착오일 수 있다. 왕아법이 국민당으로 가서 신고를 한 것은 반드시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다. 국민당은 당시에 사회에 현상금을 걸고 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상금이 아주 컸다.

 

혈안의 지시자인 응기승을 붙잡은 후, 순포방은 다시 인원을 이끌고 응기승의 집으로 가서, 본 사건의 직접흉수인 무사영(武士英)을 체포하여 사건을 마무리한다. 이에 대하여, <송어부>의 이 사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응기승이 붙잡히자, 곧 그의 집을 수색했다. 내방자는 모조리 붙잡았다....키가 작고 새 옷을 입은 자가 한 명 있었는데....과연 선생을 암살한 흉수였다. 그래서 체포한다. 이 흉수의 성은 무이고 이름은 사영이다....무사영은 체포된 후 하나하나 진술하고 감추지 않았으며, 스스로 서명한다...."

 

무사영이 체포된 후, 초심진술을 남긴다. <중화민보>에서는 사건의 조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후속보도를 했다:

 

".....29일 중화민보 기재. 상해공공순포방의 총순 복라사(卜羅斯)군은 흉범 무사영으로부터 사건에 관련된 진씨성의 인물과 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기차역으로 갔다는 진술을 받아낸다. 진씨성의 인물은 바로 진옥생으로 이미 잡았다. 그외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오내문(吳乃文)이고, 다른 하나는 장한표(張漢彪)이다. 그리고 다시 흉범 무사영을 힐문하여, 또 다른 풍악군(馮岳君)이라는 자를 찾아낸다. 역시 응기승이 암살을 지시하고 공모한 사람이다. 이 세몀은 모두 사건에서 중요범죄인이므로 멀리 도망치도록 두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복총순은 전날 관아(公)의 관헌원에게 서신을 보내어 오내문, 장한표, 풍악군의 세 범인을 체포하도록 영장을 급히 내려 반드시 체포하여 신문해라고 요청한다. 어제 관헌원의 허가를 받아서 그대로 처리하였다...."

 

이상의 자료는 <중화민보> 3월 29일자에 있다. 소력자, 양천리, 섭초창, 주종량, 서혈아가 편찬한 <송어부> (제1집, 1913년, 민립보관초판발행)에 나온다.

 

중화민보의 이 보도를 보면: 무사영은 확실히 다음과 같은 암살지시자를 진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응기승(응계형), 오내문, 장한표, 풍악군(일명 馮玉山)

 

우리는 다시 <민립보>의 1913년 3월 26일자 보도를 보자:

 

".....26일 오후 5시, 프랑스 순포방은 흉범 무사영을 데리고 프랑스 공당으로 가서 이부영사 섭헌원과 영국조계 회심원 관형지 및 성내 심판청 왕경유와 함께 심리를 진행했다. 흉범 무사영은 자칭 오복명, 산서인이며 귀주의 모 학당에서 공부했다고 하였다....암살 하루전날(19일), 진씨성을 가진 사람이 나에게 공진회에 가입하라고 권했다. 진씨는 오육일전에 찻집에서 알게 된 사람이다. 당시 진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재 우리는 한 사람을 처리해야 한다. 이 자는 중국의 장래와 관계가 있다. 이 자는 무정부당이고 우리는 4억동포를 대신하여 해악을 제거해야 한다. 나는 진씨가 말하는 사람이 중국에 해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의연하게 응락했다. 이날 진씨와 함께 차를 마셨고, 저녁에는 진씨와 함께 육야여관으로 간다. 방 하나를 빌렸다. 암살 당일(20일), 나는 진씨와 삼마로 반재에서 야식을 먹고, 술도 먹어서 반쯤 취해 있었다. 진씨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나에게 그의 성이 송씨이며 오늘 저녁에 기차를 탄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오늘이 일을 처리하기 좋다고 한다. 말을 마치고 권총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때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명은 000이고 다른 한명은 000이다. 같이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플랫폼에 들어가는 표 3장을 샀다. 1명은 표를 사지 않고 밖에서 망을 보았다. 표를 사고나니 이미 송이 도착한 것이 보였다. 진씨는 나에게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자가 송모이다. 나중에 송모가 객청에서 나와서 반쯤 걸어갔을 때 나는 총을 쏘아서 쓰러뜨렸다. 그후에 문앞까지 도망친다.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린 후 한 발을 쏳았다. 그리고 문밖으로 도망쳐서 황포차를 탄다. 응계형을 집으로 가서, 문을 들어섰더니 이미 진씨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진씨는 항상 나에게 말했다: 좋다. 우리는 이미 4억동포를 위하여 해약을 제거했다. 그리고 처음 공진회에 들어갔을 때 응계형을 한번 만났다. 암살후에 또 응계형을 만난다. 응계형은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앞으로 방법을 강구해서 나를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권총은 암살후, 이미 진씨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이르러 관아에서 암살을 마치고 무슨 보수를 받은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는데, 무는 답변하기를 : 없다. 당시 나에게 일천위안을 약속했는데, 나는 겨우 삼십위안을 받았다 운운..."

 

이상의 자료는 <민립보> 3월 26일자에서 나왔다. 소력자, 양천리, 섭초창, 주종량, 서혈아가 편찬한 <송어부> (제1집, 1913년, 민립보관초판발행)에 나온다.

 

이 재판기록에서 무사영은 그의 암살과정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했다.

 

3월 27일, <민립보>는 추가로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무사영이 체포될 때, 이미 응계형이 지시했다는 것을 진술했다: 나는 낮에도 이런 일을 할 줄은 몰랐다...."

 

다시 후속 심문에서, 무사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응기승에게 속았다." (<송어부> 제1집)

 

응기승은 누구인가? 사료 <어부선생피해후십일기> 장절 <흉도추적기>에는 응기승의 배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응계형, 자 기승, 나이 49세, 절강 영파 사람. 상해 프랑스조계 서가회로 20호에 거주함. 이 자는 자신의 분수를 지키지 않고, 예전에 유명한 깡패인 범고두를 비호했었던 자가 바로 이 자이다. 광복될 때 호군도독부에서 그를 간첩과 과장으로 이용한 바 있고, 기미책으로 남경총통부의 서무원이 되기도 했다. 공금을 남용하여 쫓겨난다. 남북통일후, 북경으로 가서 총통부에 운동하여 장강정탐과장이 된다....나중에 진군(진기미)가 손중산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 자는 믿을 수 없다고 하여, 하관병참으로 보낸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응기승, 원래 혁명당에서 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중에 암중으로 북양정부에 투신하여 북양정부사람이 되었다. 또한 진기미는 그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고, 그를 중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응기승은 이 사건의 최고지시자가 아니다. 더 높은 지시자가 있었다. 그는 북양정부 비서 홍술조이다. 우리는 응기승과 홍술조간의 송교인암살에 관한 비밀전보가 어떻게 확보되었는지를 보자. 이하는 사료 <송어부>의 기록이다:

 

"정도독은 원래 26일 영국프랑스 순포방의 포두 및 국민당의 중요인과 함게 전보국에 가서 이 사건의 긴요한 비밀전보 보관본을 열맘했고, 곧이어 서명날인하여, 전보국에 보존하게 했다. 26일 오후, 영국총순 복라사군과 진영사(진기미)등 여러 명이 모두 전보국으로 가서 처리했다...응계형의 집안에서 얻은 증거는 아주 많았다. 가장 긴요한 것은 암살사건 발견의 전신이다. 이 사건의 전보는 응기승과 홍술기(홍술조)의 사이의 것이다. 그러므로 홍술기는 이 사건의 중요범인이다..... 그 자는 흉악하고 음험하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응기승은 사전에 홍술조와 전보를 주고 받았다. 사후에 진기미와 순포방에서 이들 전보를 확보한다. 우리는 확보된 일부 중요전보를 보자. 그것은 <민립보. 1913년 4월 27일판에 실렸다. <민립보>는 그때 공중에 이들 전보를 공개한다:

 

3월 14일, 응기승은 홍술조에게 전보를 보낸다(寒電): "양산비괴(梁山匪魁, 송교인을 가리킴)는 다시 사방으로 다니며 교란하고 있다. 위험이 실로 심함. 이미 긴급명령을 발하여 방법을 강구하여 소탕체포하라고 하였음. 보고를 올려주기 바람. 지시를 기다림. 기(夔)."

 

3월 18일, 홍술조는 응기승에게 전보로 회신한다: "천밀(川密). 한전(寒電)은 말한대로 처리하라. 헛말을 한 것이면 꺼리는 자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음(蔭)."

 

(3월 20일, 송교인이 암살당항)

 

3월 21일, 응기승은 홍술조에게 전보를 보냄: "북경 춘수후통(椿樹胡同) 홍음지군감(洪蔭芝君鑒), 천밀, 전보는 잘 받아보았음. 비괴(송교인)은 이미 없앴음. 우리 군은 사망이 한 명도 없음. 위안이 됨. 보고해주기 바람. 기."

 

이 전보는 아주 명확히 말해준다: 북양정부의 국무비서 홍술조가 응기승에게 송교인을 모살하도록 시킨 것이라는 점을.

 

그렇다면, 홀술조는 왜 송교인을 모살하려 했을까? 이에 대하여, 사료 <송어부>가 수록한 <흉수추적기(凶手醜跡記)>에서는 이렇게 추정하다: 홍술조는 그의 상사인 조병균(趙秉鈞), 원세개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한 것이다.

 

".....(홍술조)가 이번에 돈을 가지고 남으로 온 것은 국회환영권을 해산시키기 위함이어서 살기가 일어났다. 우리 송선생이 그 표적이 되었다. 우리의 양필을 해친 것은 홍술조의 마음 속에 이를 빌어 그의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다..."

 

이상의 모든 자료를 종합하면, 이하의 이야기버전이 아마도 지금까지 비교적 타당한 판본일 것으로 생각된다:

 

1. 응기승은 진기미의 사람이다. 다만 암중으로 북양정부 비서 홍술조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2. 응기승은 홀술조가 송교인을 모살하려고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응기승은 주도적으로 홍술조에게 송교인을 암살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목적은 풍성한 보수를 바란 것이다;

 

3. 홍술조의 동의를 받은 후, 응기승은 진옥생등 부하를 보내고, 무사영에게 지시하여 송교인을 암살했다;

 

4. 사건발생후, 국민당인은 신고인 왕아법과 함께 순포방으로 가서 신고하고, 적시에 응기승, 무사영을 체포할 수 있었다.

 

5. 진기미 일행은 응기승과 홍술조의 전보를 찾아냈고, 법정에 증거로 제출했다. 홀술조는 북양정부의 비서이므로, 이 사건의 험의자는 직접 북양정부의 최고수뇌 원세개에게 향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사건밠행후, 진기미는 어떻게 하여 응기승이 막후지시자라는 것을 알았을까? 과연 왕아법의 신고에 따라서 알게 된 것일까? 확실하지 않다. 이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왕아법은 아마도 만들어낸 인물일 것이다. 진기미는 본 사건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뿐아니라, 직접적으로 본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 다만,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일부 간접적인 단서는 있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하거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진기미도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 필자는 아주 엄격한 각도에서, 사건의 각 관련당사자들에 대하여 성격규정을 해보기로 한다:

 

1. 원세개: 혐의가 있음. 다만 확실한 증거는 없음.

2. 조병균: 혐의가 있음. 다만 확실한 증거는 없음.

3. 홍술조: 확정됨, 송교인을 모살한 주범.

4. 응기승: 확정됨, 송교인을 모살한 공범

5. 무사영: 응기승, 진옥생의 지시를 받아 암살을 저지름.

6. 진기미: 혐의가 있음. 다만 확실한 증거는 없음

 

즉, 현재 찾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로 보자면, 필자는 단지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홀술조가 응기승을 시켜 송교인을 암살했다. 1919년, 홍술조는 북양정부에 의하여 체포되고 사형이 집행된다. 이 처리도 타당하다.

 

원세개, 진기미에 대하여는 모두 간접증거의 기초 위에서, 추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비록 추론에 합리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결국 추론일 뿐이고,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이 필자의 송교인암살사건에 대한 엄격한 분석결론이다. 이것은 임시적인 결론이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이렇게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잠정적으로는 비교적 타당한 방식이다. 당연히 필자도 신뢰할만한 사료를 가지고 추리한 것이다. 본문은 판결문이 아니다. 필자는 본문이 포전인옥하여, 여러 고수들이 바로잡아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