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 부서진 헌정꿈

중은우시 2014. 2. 9. 21:19

글: 김만루(金滿樓)

 

신해년에 혁명당(革命黨) 사람들은 일심동체가 아니었다. 그중 손중산 일파와 송교인 일파는 이념에서 엄중한 이견이 있었다. 일찌기 동맹회 시절에 황흥(黃興)과 손중산(孫中山)간에 미래 국기(國旗)를 다투는 사건이 있었다. 송교인은 손중산이 "평소에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사람을 대하지 않으며, 일처리는 거의 독재적이고 발호적이어서 사람을 난감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한 바 있다. 손중산의 타협을 하지 않는 혁명정신에 대하여도 송교인은 좋게 말하지 않았다. 1908년 그는 일본측 인사와의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손일선(孫逸仙, 쑨얏센, 즉 손중산)과 같은 야심가가 지도자가 되면, 중국혁명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찌되었건 불가능하다. 나는 믿는다. 진정한 큰 지도자가 나타나기 전에, 정치에 관련한 책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1910년 12월, 송교인은 일본친구 곶호진좌수(串戶眞左樹)와 얘기할 때 다시 한번 말한다: "손일선은 이미 시대에 낙후한 인물이다. 혁명운동을 지도하기에 부족하다."

 

무창의거후, 송교인은 내각제와 대통령제, 천도등의 문제에서 손중산과 비교적 큰 의견차이를 보인다. 국민당 경선기간동안 그가 발표한 연설에서 손중산의 신해혁명에 대한 공헌을 언급한 경우는 드물었다. 손중산이 관심을 가진 철도게획에 대하여, 송교인은 완곡하게 말했다: "손선생은 내지에 대한 경력이 아직 적어서, 반드시 경험을 겪어야 요령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러해 이후, 신해혁명이후 계속 손중산의 곁을 따르던 대계도는 옛날에 혁명급진파였다. 그는 <삼민주의철학의 기초>라는 책에서 송교인을 공격하며 이렇게 말했다: "혁명성과 주의를 버린 일군의 정치세력집단을 기초로 하여, 반혁명긔 관료와 타협하여 단기간내에 정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다. 공정하게 비판하자면, 혁명당의 첫번째 죄인은 실로 도원어부(桃源漁夫)이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정치적인 사후청산에 유사한 일은 많은 정도로 국민당이 정권을 잡은 후, 송교인에 대한 시각과 결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대계도와 마찬가지로, 국민당 주류사학자는 송교인의 의회정치, 평화항쟁에 대하여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송교인이 암살당한 후, 손중산의 태도는 180도 변화를 나타낸다. 1년전에 원세개에 대하여 숭상하다가 원세개에는 약이 없다고 하면서 당내의 이견을 무시하고 "2차혁명"을 발동시킬 것을 고집했다. 혁명당인의 투쟁은 다시 칼과 총을 드는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다만, 아주 아쉬운 점은 "2차혁명"이 금방 실패로 끝났다는 점이다. 여러 혁명당인은 부득이 해외로 망명하고, 그후 민국정치에서 주변화되고 만다. 이에 대하여, 당덕강(唐德剛)은 트루먼이 한국전쟁을 평한 말로 개괄한다: "2차혁명"은 실제로 "천시, 지리, 인화의 그 어느 하나도 좋지 않은게 없던 전쟁이다."

 

대퇴조이후, 비로소 누가 맨몸으로 수영하는지를 알게 된다. "2차혁명"은 기실 신해혁명의 계속이자 종결이었다. 슬픈 점이라면,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번 혁명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고, 지지하지 않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상해총상회는 통전을 보내어 '2차혁명'을 고취하는 것에 반대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신해지역(辛亥之役)이후, 질서가 점차 자리잡아가고 인심이 점차 안정되고 있다." "송교인암살사건은 법정에서 심팡되고, 차관,선거는 의회에서 결정되고, 스스로의 법률을 범위로 하면 된다. 어찌 혈기를 내걸어 승부를 걸겠는가. 상인은 장사밖에 모르고 정치에 영합하지 않는다. 만일 파괴만 있고 건설이 없다면 어지러운 국면이 초래될 것이고, 황당한 일이 끝이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혁명과 동란을 반대하는 정서에 대하여 외국인들도 어느 정도 감지했다. 영국 주중공사관은 영국외교대신 그레이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운동은 중국의 여하한 중요한 여론단체의 지지를 받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운동의 전과정에서.....비록 대부분의 노동군중은 여전히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상업과 무역에 관련한 개인과 기업은 중앙정부의 승리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강렬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2차혁명"이 실패한 후, <동방잡지>의 주편 두아천(杜亞泉)은 이렇게 말한다: "신해지역은 한양, 남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격렬한 전쟁은 없었다. 민국이 성립된 후, 무릇 혁명에 관련되었던 자들은 모조리 공을 내세워 두터운 보답을 바랐다."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는 당이 있는 것만 알고 국가가 있는 것을 몰랐고, 심지어 당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일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자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원로 동맹회원 양수명은 10년후의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밖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는 아주 분명하다. 바로 무인세력의 국면이다....이런 무인세력을 조장한 원인을 얘기하자면, 혁명선배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어찌되었건, 2차혁명과 같은 그런 수단을 쓰지 말아야 했다. 2차혁명은 실로 무력으로 정쟁을 한 시작이었다. 그 이후, 무릇 정치활동을 하면 항상 무인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다.....무인의 권력은 이때부터 한걸음 한걸음 성장하고, 현재는 최대한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한 점이라면, "2차혁명"은 많은 정도로 원세개를 크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신해혁명후, 원세개는 비록 대총통이지만, 그는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재미사학가 당덕강이 말한 것처럼, "당시의 전국각성은 기본적으로 현지의 군대우두머리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중앙에 납부하여야할 각종 지방의 세수를 모조리 핑계를 대고 납부하지 않았다. 원씨의 중앙정부는 그들에게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공문을 내릴 수도 없고, 무력을 쓸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명령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었고, 그저 채무를 일으켜서 운영했다." 혁명당인들이 반원세개를 내걸고 거병했을 때, 북양군이 즉시 대거 남하하고,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자, 원세개는 원래 남방혁명당인들이 통제하던 강서, 강소, 호남, 광동의 4개성을 일거에 차지하고, 나머지 각성들 예를 들어, 절강, 복건, 산서, 섬서등지에서도 금약한선(禁若寒蟬)으로 원세개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원세개가 통치한 4년은 민국기간동안 유일하게 진정 통일된 4년이었다. 다만, 중국인들이 크게 기대를 걸었던 원세개는 절대로 신파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공화민주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었고, 그것을 별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외국인인 베이커의 관찰에 따르면, "원세개의 정치경험은 단지 황제제도의 방법 뿐이다. 그는 아마도 공화주의에 대하여 약간의 모호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공화의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클 조단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 덩크슛을 넣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그의 습관은 이미 틀이 형성되어 있고, 돌연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습관은 황제제도이지 공화제는 아니다. 만일 원세개의 내심이 공화제를 향했더라면 역사의 진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그의 내심이 공화로 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찌기 신해년 11월, 원세개는 솔직하게 영국 타임즈 주북경특파원에게 말했다: "공화제도의 의미는 그저 불안이다. 산만한 민주, 다툼과 분열. 그 결과는 혼란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고생하고, 앞으로 중국을 몇십년간 평화롭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원세개는 그렇게 믿을 이유가 있었다. 신중국의 정치인물은 환상속의 몽상가가 아니었고, 권력에 흥미를 나타내는 야심가였다. 그 환상과 중국인민의 현실생활과 뿌리깊은 신앙은 절대로 직접적인 어떤 관계를 발생시킬 수 없었다. 타밈즈 기자는 이를 통하여 단정한다. 설사 원세개가 장래 공화정부를 인정한다고 맹세하더라도, 대의제도의 원칙에 충실하겠다고 맹세하더라도, 일처리방식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송교인이 창도한 의회정치, 헌정민주가 도대체 얼마나 큰 효과를 나타낼 것인지, 중국인들도 상당히 조심스럽과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원세개가 건립한 것은 권위정치이다. 설사 송교인이 죽지 않고 순조롭게 내각을 구성했다고 하더라도, 민국연간의 내각과 총리는 전체적으로 봐서 송교인이 취임한 이후 이상적으로 운영하기 힘들었다. 사실상, 송교인이 중시한 국회는 그 성적이 역시 실망스러웠다. 당시 양계초는 국회를 이렇게 비판한다: "이십일이 지나도록 의장을 뽑지도 못하고, 백일이 지나도록 하나의 법도 만들지 못했다. 법정정족수의 부족은 매일 들린다. 휴회때 좌석을 비우고 도망치는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개회하더라도 시골아주머니가 이웃사람을 욕하는 것같고, 개구쟁이가 학교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같다.....국가대계는 백불급일(百不及一)하고, 세비만 육천에 이른다고 한다." 10년후, '조곤이 뇌물을 주고 의원을 매수하여 총통에 당선된다'. 이때의 의원들이 바로 이때의 국회의원이다.

 

당시 다른 중요한 정치인물도 대부분 아무런 원칙이나 법률개념이 없었다. 부총통 여원홍은 바로 그중 "화희니(和稀泥)"의 대표이다. 정쟁이 가장 격렬한 5월중순, 여원홍은 통전을 보내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말한다: "갈 사람은 이미 갔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 같은 국민이고, 특히 모두 공화를 공고히 하고 대국을 유지해야 한다. 차라리 송군(송교인)을 전국을 위하여 순국시킬 지언정, 전국을 송군을 위하여 순국시켜서는 안된다......일단 참극이 벌어진다고 보면, 옥석구분이 될 것이다." 이 견해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손원타협에서 '이차혁명'까지>이라는 글에서, 원위시(袁偉時)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와 법치의 위협은 두 방면에서 온다. 한편으로 법을 지키지 않는 집정자에게서 오고, 다른 한편으로 법을 지키지 않는 반대파에서 온다. 권력은 원래 자체확장의 충동이 있다. 만일 상응한 제도로 속박, 감독 및 견제하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망설임없이 공민의 권리와 기타 공공기관의 권력을 침해할 것이다. 민주라고 부르는 여하한 제도도 반대파가 경쟁, 감독, 견제의 직능을 이행하지 못하면, 반드시 독재정치로 변신할 것이다. 다원은 민주, 자유의 내재적인 요구이다. 마찬가지로, 반대파도 반드시 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또 다른 독재가 나타난다. 민국초기, 특별히 고명한 의사 즉 반대파가 필요했다. 불행한 것은 당시의 반대파인 국민당은 손중산의 영도하에 또 다른 샛길로 나갔다. 그들은 민주, 법치를 가지고 독재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폭력을 바로잡으려 했다. 정치문화에서 독재자폭군과 동류합오(同流合汚)하게 된다. 암살을 포함한 불법적인 무장수단으로 불법 내지 의견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같은 편의 사람을 상대했다.

 

사공(思公) 선생도 <누가 송교인을 암살했는가>라는 장문에서 가슴아파하며 말했다. 송교인의 죽음은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고, 반대로 국가에 더 많은 고난을 가져왔다. 이는 정말 크나큰 비애이다. 많은 뜻있는 지사들이 일찌기 자신을 잊고 분투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상, 주의, 신앙을 위해 분투했다. 다만, 왕왕 얻어낸 약간의 진보와 성공은 곧이어 더욱 큰 좌절과 실패로 대체된다. 어떤 때는 심지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상이 실제 대표하는 것은 심성을 휘어잡는 저주의 말이 된다." "송교인의 천진한 헌정사상은 비록 진귀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당시의 정치환경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원세개정부는 주로 전청나라관료를 위주로 하고 있고, 현대정치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여전히 구제국왕조의 색채를 띄고 있었다. 통치자는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중산등 혁명당인이 더욱 흥미를 지닌 것은 무장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쌍방은 모두 성의가 없었다....누가 송교인을 죽였는지는 아주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송교인과 같은 정치인물은 당시의 중국환경하에서, 거의 생존공간이 없었다. 가장 먼저 희생물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송교인은 고독하다. 그는 시대의 앞으로 멀리 나갔다. 그리고 젊은 생명을 그가 떠받드는 헌정꿈을 위해 바쳤다. 그의 이상주의는 당시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의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불꽃은 여전히 역사에 빛나고, 산하에 빛난다. 뜨거운 불꽃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것같다. 송교인의 이후 혁명이 다시 일어나고, 국가는 분열하고, 군벌혼전이 벌어진다...독재는 강화되고, 국가에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송교인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로 인하여 잃어버린 기회는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