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자지(李子遲)
'문인무행'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위문제 조비(曹丕)이다. 그 뜻은 문인은 대부분 품행이 좋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조비 자신은 바로 '문인무행'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황권을 찬탈하여 한왕조를 없애고, 위왕조를 세웠다; 친동생을 질투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송나라의 대과학자 심괄(1031-1095)는 지금의 절강성 항주 사람으로 송인종 가우8년(1063)년에 진사가 되어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관직이 삼사사(三司使), 사천감(司天監),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등에 이르렀다. 그는 근면성실하고 열심히 글을 읽었으며, 박학다식했다. 다만 이익에 밝고 간교하며 마음이 좁고 질투심이 많아서 그 당시 같이 조정에서 관리로 있던 소식(소동파)을 모함한다. 대문호 소식(1037-1101)은 사천 미산 사람으로 가우2년(1057)에 진사가 되었으며 일찌기 한림학사와 전국 십여곳의 지주를 지냈다. 이로 인하여 '오대시안(烏臺詩案)'이 발발한다. 이렇게 하여 심괄은 역사상 가장 '무행'한 문인의 하나가 되었다.
심괄과 소식은 모두 중국역사상 가장 대단한 문인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중 한 명(심괄)은 백과전서식의 과학거장으로, 지리학자, 지질학자, 기상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화학자, 의학자, 농학자, 수리전문가, 병기전문가, 군사전문가, 석유발견자 및 명명자이기도 하며, 위대한 저작인 <몽계필담>을 남긴다. 영국학자인 니담(Needam, 중국명 이약슬(李約瑟))은 '중국과학사상의 좌표', '중국과학사상의 이정표'라고 불렀다. 다른 한명(소식)은 역사상 보기 드문 문예방면의 천재인 일대문호로 산문(당송팔대가의 1명, 북송의 구양수와 나란히 이름을 떨침), 시(고대 일류, 북송의 황정견과 나란히 이름을 떨침), 사(고대호방파의 대표, 신기질과 나란히 이름을 떨침), 서예(북송사대가의 1명), 회화(북송일류, '호주학파'를 개창함)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수준의 성취를 거둔다. 그들 두 사람을 이처럼 우수하니, 서로를 아끼고, 평화공존하는 것이 당연하다. 소식과 구양수, 황정견, 왕선, 소철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정견이 달랐던 왕안석과도 관계가 이들처럼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유일한 원인은 바로 필자의 생각에 심괄이라는 사람의 품행이 실로 너무 나빴기 때문일 것이다.
심괄은 소식보다 6살이 많았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것은 6년이 늦었다. 다만 두 사람은 인연이 있다. 일찌기 동료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1065년 소식이 사관(史館)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심괄은 첫해애 소문관(昭文館)에 발령을 받아 일했다. 북송은 당나라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여, 사관, 소문관, 집현원(集賢院)을 삼관(三館)이라 하고 통상적으로 숭문관(崇文館)이라 불렀다.
짧은 동료로서의 경력이후, 소식은 1966년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2년여를 머문다. 그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심괄과 다른 정치의 길을 걷게 된다. 송신종 희녕2년(1069년) 왕안석이 재상에 임명되고,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한다. 심괄은 왕안석의 신임과 중용을 받아, 전국재정을 관리하는 최고장관인 삼사사등 여러 중요직무를 맡는다. 소식은 왕안석과 의견이 달라, 그는 돌아가신 부친 소순, 보수당의 영수인 사마광등과 함께 저명한 반대파를 구성한다.
황상의 신임으로 왕안석의 개혁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1071년, 반대파의 대표인 소식은 항주통판으로 좌천된다. 당시 소식은 이미 문학방면에서는 아주 유명했다. 황제의 조모인 조태후(曹太后)도 그의 글을 아주 좋아했다. 심괄은 '중앙독찰'로 항주로 가서 절강의 농전수리건설을 감사한다. 떠나기 전에 송신종은 심괄에게 말한다: "소동파가 항주에 있다. 네가 그를 만나면 친절하게 접대해야 한다."
항주에 도착하자, 비록 정견은 달랐지만, 소식은 그래도 심괄을 옛동료, 좋은 친구로 대했다. 나이가 많은 심괄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소식과 옛날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신작을 베끼기도 했다. 그러나 경성에 돌아온 후, 그는 즉시 부전(附箋)의 방식으로, 조정을 비방한다고 여겨지는 싯구에 상세히 '주석'을 달아서 이들 싯구가 어떤 악독한 마음으로 썼고, 개혁을 반대하고, 성상을 풍자하는지 등등의 내용으로 황상에게 올린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심괄과 소식은 일찌기 동료였고, 친구였다. 적수나 정적은 아니었다. 왜 그를 모함했을까? 여추우(余秋雨)는 <동파돌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대체로 황제가 심괄의 앞에서 소동파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괄은 마음 속으로 묵묵히 비교를 해보았을 것이고, 소동파의 문학적 지위가 자신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가 왕안석과 소동파의 정견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왕안석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다만 왕안석은 어쨌든 인품을 중시하는 문화대사이다. 심괄을 중시했지만 최종적으로 그는 가까이 하기 힘든 소인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질투심도 있고, 정견이 다른 점도 있고, 관료사회에서 승진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이런 몇 가지가 심괄의 동기였을 것이다. 심괄의 이성과 무실정신은 정치생활에서 소실되어 버렸다.
얼마후, 소식은 시문중에서 '조정을 우롱하고' '신정츨 비방하고' '군신의 의리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하옥된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예를 들어, 소동파가 회수(檜樹)를 노래한 두 구절이 있는데: "근도구천무곡처(根到九泉無曲處), 세간유유칩룡지(世間唯有蟄龍知)". 여기에 대하여 심괄은 '황제는 비룡재천인데, 소식은 거꾸로 구천에서 칩룡을 찾는다. 신하답지 못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중국문자옥상 유명한 '도대(어사대)시안'이다. 소식의 100여수의 시사가 관련이 되고, 30여명의 친구들이 연루된다. 심지어 재상 사마광까지 포함된다.
당연히 심괄은 소식을 하옥시킨 주모자는 아니다. 주모자는 당연히 왕안석의 수하인 이정(李定), 서단(舒亶), 하정신(何正臣), 이의(李宜)등 4명이다. 그들이 문제삼은 것은 소식이 1079년에 쓴 <호주사상표(湖州謝上表)>에서 쓴 문구 "폐하지기우불적시(陛下知其遇不適時), 난이추배신진(難以追陪新進); 찰기노불생사(察其老不生事), 혹능목양소민(或能牧養小民)"이다. 이것은 분명히 그들을 풍자한 것인데, 그들은 이것이 황제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왕안석조차도 나중에 심괄에 대한 생각을 바꿀 정도이다. 왕안석은 송신종에게 "심괄은 소인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심괄은 소식에게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왕안석에게도 그랬다. 왕안석이 재상의 지위에 있었고, 황제가 그의 변법을 지지하고 있을 때는 심괄이 그에게 잘보이고자 했고, 그를 찬미했다. 그리고 승진하여 잘나갔다; 그러나 왕안석이 재상에서 파면된 후, 심괄은 즉시 말을 갈아탄다. 그리고 신법을 비난하며 왕안석과 선을 긋는다. 그리고 새로이 재상에 오른 오충(吳充)에게 글을 올려, 신법의 폐단을 통열하게 비난한다. 오충도 심괄이 사람됨을 멸시했다. 그래서 왕안석을 비난한 고발장을 신종황제에게 그대로 올린다. 신종은 보자마자, '이는 낙정하석(落井下石)이 아닌가? 어찌 양면삼도(兩面三刀), 조진모초(朝秦暮楚)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때부터 심괄을 냉대하고 그를 선주지주로 내보내 경성에서 쫓아낸다.
결과적으로 소식은 감옥에 130일간 갇혀 있으면서 혹형을 당한다. "밤새도록 욕을 하여 차마 듣고 있기 힘들 정도이다"; 왕안석, 장방평, 오충, 조태후등이 그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여 결국 죽음은 면하고 유배를 간다. 호북 황주의 단련부사로 보내어진다. 그후 그의 작품주제와 풍격은 크게 바뀐다. 사상은 유학에서 불학으로 바뀌었으며, 오히려 많은 걸작을 써낸다.
원우연간, 소식은 항주에서 재직했다. 심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러번 소식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매번 공손했고,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소식은 이미 뼛속에서부터 그를 멸시하였다.
한 명은 과학계의 태두로 재주는 뛰어나나 명성이 엉망이고, 한명은 문학계의 거두로 재주도 뛰어나고명성도 높다. 한 명은 과학의 위인이나 도덕의 소인이고, 한 명은 문학의 대가로 후세에 좋은 명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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