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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소동파)

소동파는 보수파인데 왜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을까?

by 중은우시 2013. 11. 13.

글: 정만군(程萬軍)

 

역사적으로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은 비교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다만, 북송에서, 소동파는 예외이다. 그는 공인된 보수파이다. 단 이 보수파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평판이 개혁파보다도 좋다. 이것은 왜 그런가?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소동파는 북송개혁시대를 맞이했다. 개혁의 총설계사는 바로 그의 사형이다. 같은 구양수(歐陽修) 문하에서 당시 재산을 맡고 있던 왕안석(王安石)이다. 동문이 관직에 있고, 그것도 그 동문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라면, 이때 겨우 7품에 불과한 대리평사를 맡고 있던 소동파에게 있어서, 일단 동문의 개혁에 동조하여 같은 당이 되기만 하면, 아주 빛나는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익과 감정에서 출발하여, 많은 사람들은 소식(소동파)이 당연히 신당 일파에 가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성격이 강직한 소식에 있어서 이익과 감정이 정견(政見)을 대체할 수 없다. 사회위기가 이미 시작된 북송 중기에 개혁문제에서 왕안석은 급진적이었고, 소동파는 보수적이었다.

 

출발점에서 보면, '부를 재분배한다'와 '군대를 숙정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왕안석의 '희녕변법(熙寧變法)'은 분명 진보적이었다. 객관적으로 토호의 농민에 대한 압박을 감경시키고, 생산력을 늘이고 '군민일체'의 작용이 있다. 만일 성공했다면, 북송은 부국강병을 이루었을 것이고, 여진인들이 북송을 멸망할 수 있었을지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왕안석의 변법은 경(經)은 좋은 경이다. 다만 왜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는가?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개혁자는 누구의 이익을 대표하는가. 둘째, 구체적인 집행과 집행인의 동기.

 

무엇이 개혁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익재분배이다. 변법에 반대하는 소동파는 확실히 울부 지주토호의 이익을 대표한다. 다만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왕안석 변법자들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북송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지우불적시(知其遇不適時), 난이추배신진(難以追陪新進); 찰기노불생사(察其老不生事), 혹능수양소민(或能收養小民)". 소동파가 좌천된 후에 쓴 이 글은 그와 왕안석간의 근본적인 의견차이를 보여준다.

 

개혁을 이용하여, 개혁의 기치를 걸고, 자신의 지위를 끌어올리고, 자신의 사익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소동파와 왕안석같의 의견차이의 주요원인이다. 용인부당으로 개혁은 관료사회 소인이 강취호탈(强取豪奪)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왕안석 변법이 가장 욕을 얻어먹는 급소였다.

 

그리고 왕안석과 소동파는 누가 더 많은 농민의 근본이익을 생각하는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개혁의 용인 및 그것이 가져온 이화(異化)에서 보면 최소한 소동파는 정신이 깨어있었다. 왕안석은 당국자미(當局者迷)였다. 신당의 소인배들의 반복무상, 진화타겁(趁火打劫)은 이미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사람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소동파는 왕안석보다 정확했고 멀리 보았다. 신당이 날로 흥성할 때, 당수인 왕안석은 재상으로 한때 잘 나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추세를 따르는 소인들이 모여들었다. 왕안석은 잘 몰랐다. 그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신법에 대하여 애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권력귀족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중 여혜경(呂惠卿)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왕안석이 오른팔로 생각했던 인물은 중요한 순간에 왕안석을 배신한다.

 

여혜경은 복건 사람이고, 기회를 보고 줄을 서는데 능했다. 왕안석은 그를 중시하여 그의 은사가 되고, 그를 하급현관에서 재보(宰輔)의 관직으로까지 발탁해준다. 은사의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 때, 여혜경은 "호법선신(護法善神)"이었다. 다만, 왕안석이 재상에서 파면되자, 여혜경은 창끝을 거꾸로 돌린다. 신법동료이건 원로구당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조리 배척하고 타격한다. 동시에 가까운 사람만 기용하고, 자신의 친동생을 중용하여, 신법을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대거 재물을 끌어모은다.

 

왕안석은 여혜경을 가장 신임할만한 조수라고 보았다. 그러나 소동파는 여혜경을 좋게 보지 않았다. 여혜경을 평가할 때, 소동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어지기(始於知己), 공위기군(共爲欺君), 희즉마족이상환(喜則摩足以相歡), 노즉반목이상서(怒則反目以相噬)"(처음에는 지기로 함께 임금을 속였다. 기쁠 때는 발을 문지르며 서로 기뻐하고, 화가나면 반복하며 서로 씹었다). 바로 그 말대로였다. 뼛속으로 왕안석도 노재(奴才)를 좋아했다. 그러나 소동파는 노재와 인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북송중기, 번영하던 문관제도가 '광고삼대재자(曠古三大才子)'를 세상에 나오게 한다. 개혁가 왕안석, 대학자 사마광, 대문호 소동파. '희녕변법'을 둘러싸고, 그들의 정견은 같지 않았다. 심지어 정적이 된다. 다만 역사의 3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느 한 명에게도 '반면인물'이라는 레테르를 붙이지 않았다.

 

이것은 '광고삼대재자'의 정치적 품격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다. 또한 소동파가 비록 보수파이지만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지 않은 원인이다. 개혁문제에서, 그는 비록 일부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였지만, 개인이익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경우에 '개혁변이'와 '민생'을 가지고 문제를 고려했다. 여하한 개혁도 이익재분배이다. 그렇다면 수익보는 자도 있고, 손해보는 자도 있다. 공정한 개혁은 공정한 법률과 같다. 각 계층의 합법적 권익을 고려하여, 이를 통하여 전체 인민의 창조력을 장려하고, 성과를 공유하고 이익을 공정하게 얻는 것을 돌봐야 한다.

 

이제 당신은 보수파 소동파가 '시대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혜경과 같은 류의 개혁가와 비교하자면 그의 정치적 품격은 확실히 더욱 나은 편이다. 우수한 정치적 품격을 지닌 정치가면 '천항대임(天降大任)'을 맡고, 창생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