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운차월(留雲借月)
소동파는 장원(狀元)을 했었는가? 이 제목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일은 없다고 얘기할 것이다. 소동파는 장원에서 살짝 비켜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소동파는 장원을 했었다고도 얘기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소동파는 1037년에 사천 미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소순(蘇洵)이고, 동생은 소철(蘇轍)이다. 모두 '당송팔대가'에 속한다. 한 집안에서 이렇게 많은 인재가 나타난 것도 정말 드문 일이다. 그리하여, "미산은 삼소를 낳고는 초목이 모두 시들어버렸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소동파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였고, 책이란 책은 모두 읽었으며,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독서와 공부에 힘썼다. 소년때 수십만자의 <<한서>>를 한자도 빠트리지 않고 다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3번이나 <<한서>>를 베껴 썼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소동파가 황주에 유배갔을 때, 친구인 주재상이 내방하였는데, 주재상으로 하여금 그를 시험하게 하였다. 주재상은 <<한서>>에서 임의로 한 권을 골라서, 아무 곳이나 첫 글자를 불렀다. 그러면, 소동파는 바로 전체 문장의 글자를 외워서 말했다. 어느 한 곳 멈추거나 틀리는 곳이 없었다. 주재상은 여러 권을 바꾸어가며 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우2년(1057년) 정월, 20세가 된 소동파는 동생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려 변경으로 갔다. 시험제목은 <<형상충후지지론(刑償忠厚之至論)>>이었다. 시험관인 매요신(梅堯臣)은 답안지 하나를 읽다보니, 전체 문장이 "인(仁)"으로 돌아가게 적었으며, "입법은 엄해야 하고,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관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혀 맹자의 기풍이 있었다. 그는 아주 좋게 보고, 즉시 주시험관인 구양수(歐陽修)에게 추천했다. 구양수도 읽은 후에 아주 칭찬했고, 이 글을 1등으로 하려고 하였다. 다만, 글이 자기의 제자인 증공(曾鞏)의 글인 것같았다. 제자를 뽑았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2등으로 했다. 2등으로 한 또 다른 원인은 바로 문장안에서 쓴 전고(典故) 때문이었는데, 거기에는 "요임금 때 고요가 신하로 있었는데, 범죄자를 죽이고자 하였다. 호도가 말하기를 '죽이는게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요는 '용서하는데도 세가지 사유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사람들은 고요의 집법이 엄한 것을 두려워하고, 요임금의 형벌이 관대한 것을 좋아했다" 시험관들은 아무도 이 글의 출처를 몰랐다. 만일 1등으로 뽑았다가는 이에 대하여 확인을 구하면 곤란할 것을 우려했다. 매요신은 그래도 이를 1등으로 뽑자고 우겼다. 글 내용이 좋으면 되지 출처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한강(韓絳)등이 구양수의 편을 들어 그를 설득하여 결국 그 시험답안을 2등으로 하였다. 답안지의 작성자이름을 나중에 확인한 후에 그 글이 소동파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소동파가 예부복시에 참가했는데, 다시 "춘추대의"를 가지고 1등을 했다. 3월 송인종의 전시에서 소동파형제는 함께 진사급제를 한다.
과거에 합격한 소동파는 구양수를 찾아가서 감사인사를 드렸다. 구양수가 소동파에게, "너의 답안지에 얘기한 요임금과 고요의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소동파는 "<<삼국지. 최염전>>의 공융의 주석중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구양수가 그 책을 찾아봤는데, 거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소동파에게 물어보니 소동파가 웃으며 대답했다: "공융이 이전에서 <<위씨춘추>>를 인용할 때, 원수가 패한 후에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희의 처자를 자기의 아들 조비에게 하사한 일에 대하여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아뢰기를, 주무왕이 주왕을 벌할 때, 주왕의 비인 달기를 주공에게 내렸다라고 하였다. 조조가 공융에게 출처를 묻자, 공융은 '저는 요즘의 일을 거지고 옛날의 상황을 추측해본 것이고,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문생(소동파 자신을 지칭)이 요임금과 고요의 일을 쓴 것은 바로 공융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양수는 그 말을 듣고 감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이 자는 글을 잘 읽을 뿐아니라, 글을 잘 활용하는 구나. 나중에 문장이 천하를 독보할 것이로다" "소동파의 글을 읽으니 식은 땀이 난다. 좋다. 좋다. 노부가 길을 비켜주어야 겠고, 그가 이름을 날리도록 해줘야 겠다. 좋아. 좋아." "삽십년후에 세상사람들은 나는 모를 것이다" 구양수는 당시 문단의 맹주였는데, 그의 누구에 대한 평가는 그의 성패영욕을 가름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소동파는 구양수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는 것은 당연했다.
1060년, 소동파형제는 다시 제과시(制科試)에 응한다. 시험관은 답안지를 읽어본 후에 "문의가 찬연"하다는 것을 들어 소동파를 "삼등(三等)" (참가자중에 최고등수)으로 뽑는다.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 제과시에서 삼등으로 뽑힌 경우는 오육(吳育)과 소동파 단 두 사람 뿐이다. 소철은 '사등(四等)'에 뽑힌다. 인종은 조회가 끝난 후, 아주 기뻐서 고황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짐이 오늘 다음 대의 두 재상을 구했다" 그러나, 이 말을 부도수표가 되고 말았다. 실현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소동파는 평생 권신들들로부터 시기와 박해를 받게 된다.
소동파가 과거에 응시한 경위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아마도 궁금할 것이다. 위의 내용 어디에 소동파가 장원했다는 말이 있는가? 주의할 점은 북송때, 전시에서 1등, 2등, 3등을 모두 장원이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남송이후에는 1등을 장원,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로 부르는 것이 제도로 굳어졌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1갑 3명은 진사급제를 받는데, 소동파가 장원이라고 할 수 있을 뿐아니라, 그의 동생인 소철도 장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소동파는 장원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론을 이렇게 내리기는 이르다. 많은 사람들은 소동파가 전시에서 제2등을 했다고 알고 있다. 사실이 그러한가? 사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우2년 정유(1057년)의 과거에서 진사에 오른 자는 388명이었다. 그중 제1등 3명은 차례로 다음과 같다. 장원은 장형(章衡)으로 자가 자평(子平)이다. 건주 포성현 사람이다. 감승, 호주통판이 되며 보문각특제, 집현전학사 정주지부를 지냈다. 방안은 두변(竇卞)으로 자는 언법(彦法)이다. 조주 원구현 사람이며 두강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대리평사, 여주통판을 받았고, 벼슬은 천장각특제, 소문관판사, 장작감에 이른다. 탐화는 나개(羅慨)로 대리평사, 주통판을 받는다. 둔전원외랑을 지낸다.
그런데, 재주가 남다른 소동파는 실제로는 진사을과(제2등)일 뿐이었다. 인종황제의 안목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처럼 보면 소동파는 장원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는 장원의 재주는 충분하다.
그리고, 소동파가 급제한 그해의 과거는 역사상 가장 출중한 과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때 진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인재가 많다. 그 중에 몇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면, 증공(曾鞏), 증포(曾布), 증모(曾牟), 증부(曾阜)의 사형제, 정호(程顥), 장재(張載), 여혜경(呂惠卿), 장지기(蔣之奇)...모두 후세에 혁혁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 당시 이들은 모두 2,3십대의 청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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