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홍빈(侯虹斌)
인과응보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너무나 속된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이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여후가 개를 무서워하며, 진시황이 참언을 무서워하고, 왕망이 묘금도(卯金刀)를 부서워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사람들을 너무 많이 해친 것과 관련이 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불교가 아직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책에서는 시시때때로 몇 건의 '인과응보'의 설니홍조(雪泥鴻爪)가 있다. 이를 보면 착한 일을 하면 착한 보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보답을 받는다는 바램은 신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여후가 벌인 나쁜 짓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척부인을 인체(人彘)로 만든 일이다. 그녀는 척부인을 인체로 만들기 전에 하나의 더욱 중요한 일을 한다. 그것은 척부인의 아들 조왕 유여의를 불러온 것이다. 조상(趙相) 주창(周昌)이 극력 보호하여, 어렵게 유여의를 불러왔지만, 한혜제는 모친이 동생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데려가서 함께 먹고 함께 잤다. 단지 어느 하루 아침 한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면서 조왕을 깨우지 않았는데 ,돌아와보니, 나이어린 조왕은 이미 여후가 보낸 사람에게 독살되어 있었다.
조왕을 독살하고, 척부인을 처치한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정치인이 잠재적인 정치적 위협을 제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그저 개인적인 원한을 푼 것으로 보인다. 하물며, 이처럼 드러내놓고 처리하고, 전혀 감추지 않으면서 선황의 서자를 제거하는 행위는 너죽고 나살기식의 후궁내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일이다.
또 한가지 구체적인 사는 제왕 유비(劉肥)이다. 한번은 태후가 연회를 베풀었는데, 제왕이 한혜제보다 5살이 많았다. 한혜제는 윗자리를 제왕에게 양보해서 앉게 했고, 집안의 예와 같았다. 태후는 대노한다. 사람을 시켜 독주를 두 잔 준비하여 제왕의 앞에 놓고 제왕으로 하여금 마시게 한다. 제왕은 무슨 일인지 모르고 술잔을 들어 마시려 했다. 한혜제도 다른 한잔을 들어서 같이 태후의 장수를 빌며 건배를 하려 했다. ㅌ후는 급히 한혜제의 술잔을 빼앗는다. 제왕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술취한 척하고는 도망친다. 나중에 독주라는 것을 알고 제왕은 적지 않게 놀란다. 그의 한 모사가 그에게 권했다: 너는 너의 군 하나를 태후의 친 딸인 노원공주에게 바쳐라. 태후가 분명 좋아할 것이다. 제왕은 급히 성양군을 노원공주에게 바친다. 그리고 이 동부이모의 여동생을 제왕태후(자신보다 1배분 높은 직위)로 모신다. 태후는 과연 아주 기뻐하며 제왕을 보내준다.
여후가 사람을 보내어 연왕의 아들을 죽여서, 연왕의 후사가 없게 만든 일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여후의 이런 행동은 필자가 보기로 교양이 없는 행동이다. 교양이 없는 것은 그녀가 시골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았고, 머리에 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방도 깡패이다. 그러나 그녀와 비교하자면 최소한 이치를 따지는 깡패였다. 문명인에 더욱 가까운 사람은 한문제이다. 왜냐하면 흉노, 민월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한 회남왕 유장(劉長)을 촉군으로 귀양보내었는데, 유장은 단식으로 죽는다.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쓸까봐 두려워했다. 만일 여후가 서자를 죽인 것을 권모술수라고 한다면, 한문제를 보라: 그는 아마도 유장에 대하여 껍질을 벗기고 뼈를 부술 정도로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유장이 죽자, 세상사람들은 한문제는 인후, 효제한다고 여기고, 유장은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다. 만일 권모술수를 얘기하자면 이것이야말로 권모술수이다.
조왕 유여의가 죽은 후, 여후는 회양왕 유우(劉友)를 조왕으로 삼는다. 새로운 조왕 유우는 여후의 신임을 받아서 여씨여인을 부인으로 취한다. 비극이 여기서 발생한다. 유우는 여씨여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희첩을 좋아했다. 이 여씨여인은 질투심에 여후에게 말한다. 유우가 여씨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한다고. 나중에 여씨를 주살해버리겠다고 말했다고. 여후는 대노하여, 유우를 경성으로 부른다. 유우가 오자 태후는 그를 집안에 가둬버리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먹을 거리를 주는 자는 모조리 붙잡아 넣는다. 그리하여 유우는 굶어죽는다. 여후는 일반 백성의 예로 그를 장안의 민가에 묻어버린다.
이어서, 어후는 양왕 유회(劉恢)를 조왕으로 삼는다. 새로운 조왕도 역시 여산(呂産)의 딸을 부인으로 취한다. 비극은 또 여기서 발생한다. 이 여씨여인은 권세가 너무 컸다. 유회에게는 사랑하는 비가 있었는데, 여씨는 그녀를 독살한다. 유회는 슬픔에 빠져서 자살해버린다. 여후가 이를 듣고는 대노한다. 그가 자살하였으므로 그의 후손이 조왕을 잇지 못하게 한다. 가련한 유회는 조왕이 된 지 4개월만에 죽고 만다. 이것은 전임 조왕들의 복제판이었다.
대왕 유항(劉恒)도 하마터면 조왕으로 뽑혀갈 뻔했다. 다행히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대(代)라는 변방을 굳이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여후도 그를 조왕으로 보내지 않는다. 나중에 대왕 유항은 황제에 오른다.
삼대 조왕이 모조리 죽었다. 그후에 조왕은 여록(呂祿)이 된다. 여록은 스스로 조왕으로 가겠다고 한다. 모두 알다시피, 여록이 조왕에 봉해진 다음 해에 여후가 죽고, 여씨는 멸족된다. 그는 네번째로 죽은 조왕이다.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조왕에 얽힌 저주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후는 어떻게 죽었는데, 원래 그녀가 패상(覇上)으로 가서 제사를 지낼 때, 창구(蒼狗)를 한 마리 만나고, 여후의 겨드랑이에 찰상(擦傷)을 입히고 돌연 사라진다. <사기>에서는 "거고후액(據高后掖)"이라 하였고, <한서>에서는 "극고후액(撠高后掖)"이라 하였다. 신을 믿지 않던 왕충(王充)은 <논형.사위편>에서 아예 "그녀의 왼쪽 겨드랑이를 물었다"라고 적었다. 세 사람의 말은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그 뜻은 분명하다. 즉 개에게 물리거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당시 점을 치는 사람은 이 개가 조왕 유여의라고 하였다. 도대체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결국 여후는 액상(腋傷)으로 죽는다. 상황으로 보면 나는 여후가 광견병으로 죽었다고 생각된다.
여후를 연구하는 글은 많은데, 여후의 죽음을 연구하는 글은 아주 적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어떤 논문에서 '광견병'이라는 답안을 내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추측한다. 전제통치시대의 당당한 태후가 이렇게 체면상하는 방식으로 죽었다고 한다면 너무 곤란한 일이다. 원혼이 복수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귀신론에 빠져 유물주의 교육에 어긋나므로 여기서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기실 그렇게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인과응보라는 것은 그저 의음이다. 상식은 이렇다. 호인부장명(好人不長命), 화해유천년(禍害遺千年). 천만명을 억울하게 죽여도 반드시 응보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문 개에게 죽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위자할 수 없는 현실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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