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홍빈(侯虹斌)
1
섬서(陝西) 함양(咸陽) 진도구(秦都區) 교점향(窖占鄕) 부근, 한고조 유방의 능묘인 장릉(長陵)이 있다. 장릉의 동쪽에 200여미터 떨어져서, 여후의 합장릉이 있다. 한나라때 제왕능묘를 살펴보면, 한나라 장릉의 건설은 한나라 제왕능묘중에서 가장 특별하다. 그 능원내에는 한고조 유방과 황후 여치의 두 개의 능총이 있고, 두 개의 능총의 분구(墳丘)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다. 이 현상은 서한왕조 이후의 제왕능묘의 건설에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규격도 여후의 높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사람들의 여후에 대한 개관정론(蓋棺定論)이라고. 여후는 제왕에 근접한 정치적 영예와 후장의 규격을 가졌다. 사서로 보면,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는 모두 여왕을 '본기(本記)'에 배치한다. 이것은 그녀의 임조칭제, 황제권한행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린다:
"효혜황제(孝惠皇帝), 고후(高后) 시기에 백성들은 전국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군신은 모두 휴식하며 무위(無爲)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혜제는 수공(垂拱)하고, 고후가 여주칭제(女主稱帝)하니, 정불출방호(政不出房戶)하여 천하가 편안하였다. 형벌은 거의 쓰지 않고, 죄인은 드물었다. 백성은 농사일을 열심히 하고 의식이 풍족했다."(<사기. 여태후본기>. <한서.고후기>는 기본적으로 이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다)
즉, 혜제와 여후의 무위로 천하는 아주 평안하고, 백성들은 잘 살았다는 말이다.
여후, 역사에서는 고후라 부른다. 서한 개국황제 유방의 정실부인으로 이름은 치(雉)이고, 자는 아후(娥姁)이다. 그녀는 중국역사에 기재된 첫번째 황후이고 황태후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첫째로 임조칭제한 여인이다(전국시대 전나라 선태후는 제후왕태후였지, 통일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아니었다). 남성이 절대적으로 주도하던 정치분야에 강력하게 개입한 여성으로서 그녀의 이미지는 아주 복잡하다.
필자는 한 마디로 그녀를 개괄할 수는 없다. 첫째, 역사의 기록에서도 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둘째, 현존하는 기록에서, 인물의 성격은 심각한 급변이 발생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는 알 수없다. 이처럼 역전의 인생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녀의 천성이 충분히 발로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심신에 큰 타격을 받은 후에 돌연 깨어난 것인지.
여치에 대하여 TV드라마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어떤 때는 심궁원부(深宮怨婦)로 그녀는 남편 유방이 어느 궁전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는지 몰랐고, 그녀는 그저 미성년의 아들과 딸을 끌어안고 처연해 하며 분노하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떤 때는 위엄있는 여군주로 군신이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그녀의 피로에 지친 목소리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때는 깊은 궁궐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소리없이 일대효웅 한신, 팽월을 모조리 죽이고 멸족시키며, 또한 아름다운 척희를 '인체(人彘)'로 만들어 화장실에 버렸다...당연히 세월이 거꾸로 흐른다면, 당시 젊은 아가씨로 어린 여자아이가 등에 대나무광주리를 지고, 밭을 오가며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호미질을 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작은 술집에 숨어서 술을 마시면서 다른 여인들과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여후에 관하여, 단지 토끼가 늑대로 변신한 이야기만이 아니고, 사회대혁명의 과정에서 여인의 역할과 포지셔닝의 문제만이 아니고, 그것은 봉건시대 정체제고의 확정, 변화, 변혁과 전복, 구조조정의 과정과 관련이 있다. 만일, 여치의 남편 유방이 중국 2천년 정치제도와 국면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면, 여치 본인의 공헌은 바로 이 제도를 깨트리려고 시도한 것이다. 제도가 방어의 과정에서 더욱 공고하고 강화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녀는 중국의 저제왕조에 외척에 대한 2천년의 두려움을 주었고, 중국전통하에 여인혐오증이 핑계를 찾게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한 여성의 역습사이다. 그녀가 한제국 초기의 평온한 국면을 유지하고, 사가의 칭찬을 듣든 말든, 그녀가 흉악하고 독랄하여 후세인들이 꺼리든 말든, 심층적인 근원은 모두 그녀가 하층출신의 시골아가씨였다는 것때문이다.
2.
여치의 출신은 개략 농촌의 향신(鄕紳) 가정이라는 계층일 것이다. 그녀의 부친 여공(呂公)은 원수를 피해서, 패현으로 와 정착한다. 패현의 당시 현령이 그의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패현의 돈있고 이름있고 관직있는 사람들이 속속 이 현령의 중요한 손님을 찾아온다. 소하는 당시에 주관관리였고, 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자, 아이디어를 내서, 하전(賀錢0이 천전(千錢)이 되지 않으면 당하(堂下)에 앉혔다. 이를 보면 당시 여공은 명망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같다.
이어서 이 연회에서 여공은 유방을 마음에 들어한다. 보잘것없는 정장(亭長)이지만, 허풍을 덜어 하건으로 1만전을 적고 한푼도 내놓지 않는 무뢰한이었다. 그에게 밥한끼를 그저 먹였을 뿐아니라, 술도 공짜로 먹였고, 딸 여치까지도 그에게 주기로 약속한다. 여온(呂媼)은 아주 화를 낸다: "너는 항상 자신의 이 딸은 앞으로 크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녀를 귀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패현의 현령이 너와 관계가 그렇게 좋은데, 그녀를 취하고자 하는데도 너는 응하지 않더니, 이제 어찌하여 함부로 그녀를 유계(劉季)라는 작자에게 시집보내려 하는가?" 그러나 여공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여치를 시집노낸다.
유방은 당시 정장이었다. 정장은 시골관직이다. 진,한시기에 시골에는 매 10리마다 1정을 둔다. 만일 현재의 급별로 따진다면, 동사무소 소장에 해당할 것이다. 여공은 공직이 없었지만, 그는 패현현령(진,한때, 현이 만호이상을 가지면 '현령'이라고 했고, 만호가 되지 않으면 '현장'이라고 했다)의 친구이다. 현령은 일찌기 여치에게 구혼한 바 있다. 즉, 여공은 현장을 거절하고, 스스로 동사무소소장에게 보낸 것이다. 유방이 여치보다 15살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혼인은 연령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맞지 않는다. 이 혼인에 대하여 처음에 여치와 유방간에는 애정이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유방이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집안을 돌보는 남자였다면 아마도 부부간의 애정이 조금은 더 좋아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그렇지 않았다. "연중리무소불압모(延中吏無所不狎侮)"는 그가 관청의 관리들을 모두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다; "세주(貰酒), 시음취와(時飮醉臥)"는 자주 술을 외상으로 마시고, 취해서 들어누워 잤다는 말이다. 게다가 유방의 부친도 항상 그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는 '무뢰배'라고 질책했다. 유방이 촌민들 가운데 어떤 이미지였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방이 이때 조씨(曹氏)라는 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생아인 유비(劉肥)도 있었다. 여치의 첫째 딸인 노원공주보다도 나이가 많다. 조씨와 유방의 관게는 여치보다 앞선다. 40여세의 남자가 처를 취하지 않으며, 자식을 낳고도 결혼하지 않다니, 이는 무엇때문인가? 유방에게 식구를 먹여살릴 재주가 없고, 사람이 믿을만하지 못하며 여색 밝히고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집안환경이 괜찮은 여치가 이런 자에게 시집을 가다니, 여치로서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국고대사회에, 혼인에서는 "부모지명(父母之命), 매작지언(媒妁之言)"에 따라야 한다. 혼인은 일반적으로 가족이익의 연합이고, 혹은 공동으로 집안식구를 먹여살리고, 자녀를 기르며, 후손을 잇기 위한 필요때문이다. 애정은 그중에 중요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금기이다. 이는 바로 <유림외사>에서 벌건 대낮에 처의 손을 잡고 산으로 놀러가서 술을 마시는 두소경(杜少卿)을 사람들이 멸시한 이유이다. 그리고 <홍루몽>에서 가모(賈母)가 남자가 삼처사첩을 두는 것은 개의치 않으면서 남녀간의 애정에 대하여는 질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실 이런 관념은 중국특산이 아니다. 전세계가 다 마찬가지이다. 기나긴 역사의 단계에서, 혼인과 애정은 관계가 없었다. 미국학자인 메릴린 옐롬(Maylin Yalom)의 <아내의 역사>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16세기까지, 점차 어떤 사람은 혼인에서 애정의 위치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18세기 중후반, 구미지구의 중산계층은 애정을 기초로 하는 것이 주류가 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상류사회가정에서 아내나 남편을 선택할 때 재산, 혈통과 지위를 더욱 고려했고, 애정은 가장 중요한 위치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이 방면에서 서방세계보다 반박자 늦었다. 애정이라는 것은 고대 혼인에서 거의 무시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사회학자인 페이샤오통(費孝通)은 <향토사회>의 "가족"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갓집(大戶人家), 선비집안(書香門第)에서만이 아니라, 남녀간에는 내외의 격리가 있었다. 향촌에서, 부부간의 감정이 냉막한 것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골부부는 대부분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각자 바쁘다. 얘기나 하고 있을 틈이 없다. 문을 나서면 각자 자기 할 일을 한다. 일을 마치면, 남자는 보통 집안에 있으면서 사내대장부가 마누라를 지키고 있으면 싹수가 없는 것이다. 일이 있어도 바깥에 나가고, 일이 없어도 바깥에 나간다. 차관, 연포(煙鋪), 심지어 길거리 골목이 남자들이 감정적으로 안위를 찾는 시간보내는 장소이다. ....시골에서 말이 있고 웃음이 있고 정이 있고 뜻이 맞는 것은 같은 성과 같은 연령대의 집단에서이다. 남자는 남자와 함께, 여자는 여자와 함께, 이이들은 또 아이들과 함게, 업무와 생육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성별과 연령대간에 큰 거리가 있다."
당시의 사회구조와 두 사람의 혼인상황을 보면, 여치와 유방의 관계는 이와 아주 유사하다.
남성이 절대적으로 주도적 지위를 점한 세계에서, 여성의 가치는 완전히 부친, 남편과 아들에 의존한다. 그녀와 남성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직접적으로 그녀의 존재에서의 합법성을 결정한다. 한 가지 묘사는 아주 생동감있다. 당시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 여치는 일찌기 두 아들을 데리고 밭에서 보리밭을 매고 있었다. 그녀는 길가던 노인에게 식사대접을 했는데, 그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다." 여치는 자연히 기뻤다. 그에게 아들 유영(劉盈)을 봐달라고 한다. 노인은 말한다: "원래 부인이 귀한 것은 이 아들때문이었구려." 그녀는 그에게 딸을 봐달라고 하자 역시 모두 귀인이라고 한다. 노인이 떠난 후, 여치는 이 일을 유방에게 얘기한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그 노인이 아직 멀리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바로 쫓아간다. 노인은 유방을 보고, "금방 부인과 아들 딸을 보았는데, 관상이 당신을 닮았구려, 당신의 관상은 귀하기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말은 아마도 유방이 등극한 후에 그의 신세내력을 선전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여치가 나중에 귀하게 되는 것은 첫째는 황제남편때문이고, 둘째는 황제아들때문이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치가 유영을 낳은 후 2년만에, 유방은 거병하여 진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후에 여치와 아들 딸은 생활에서 사라진다.
3.
유방이 등극하기 전에, 우리가 보는 여치는 여전히 하나의 부호이고 하나의 목두인(木頭人)이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이다. 그녀는 이때 그저 유방의 하나의 부용(附庸)이다. 그녀의 지위는 실제로 유방의 곁에 있는 아무나 장병 하나보다 못하다. 여치는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지는 전쟁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유방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그녀가 기꺼이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였는지는 몰라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일 평화로운 시대에 여치와 유방이 결혼했다면, 아마도 그냥 이렇게 평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이 반란을 일으키고, 거병을 하면서 이때부터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었다. 이런 담담하고 애정이 별로 없던 관계도 신속히 왜곡된다. 유방이 여러 해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도 하나의 예이다. 유방의 생활에서 여치는 최소한 유방을 위하여 몇 가지 중요한 희생을 한다:
첫째, 아들과 딸을 키웠다.
둘째, 양친을 모셨다.
셋째, 유방이 도망다니는 동안, 패현에서 여치를 붙잡아 감옥에 넣었고, 그녀에게 아주 못되게 대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때리고 어떻게 능욕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는 당시에 한 옥졸을 분노하게 만든다: 임오(任敖). 임오는 유방과 관계가 좋았고, 유방의 처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자, 옥리를 때려서 부상입힌다. 이 사람은 여치의 은인이다. 여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임오는 어사대부에 오른다.
4. 유방이 3년간 반진전투에 참가하고, 다시 항우와 싸우며 팽성까지 공격해 들어간다: 이때 유방의 부친, 처, 자녀는 모두 팽성에 있었다. 다만 유방은 가족을 맞이하려 가지 않는다. 그래서 항우는 여치, 여태공을 붙잡았고, 자녀는 요행히 도망쳤다. 여치와 태공은 항우의 군영에서 28개월동안 인질로 붙잡혀 있는다.
이들 공로 혹은 고생은 여치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태자태부 숙손통마저도 이렇게 말한다: "여후는 폐하와 고생을같이 했습니다.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만일 여치의 존재감을 그저 그녀가 유방이 버리지 않은 조강지처라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치는 비록 여인이지만, 그녀는 두 오빠가 있었다. 여택(呂澤)과 여석(呂釋)은 모두 유방의 반란에 참가한다. 그리고 여택은 대장이다. 소위 혼인은 두 가문의 이익을 하나의 전차에 묶어두는 것이다. 비록 시골의 작은 집안기리이지만, 한 쪽이 잘되면 다 잘되고, 한쪽이 망하면 같이 망하는 것이다.
여택의 사적에 대한 기록은 아주 적다. 그러나 <사기>의 <공신표>에는 그의 공로가 적혀 있다: "여후의 오빠로 처음에 객(客)으로 쫓았고, 한나라에 들어 후(侯)에 오른다. 삼진을 평정할 때, 병력을 이끌고 먼저 탕에 들어간다. 한왕이 팽성의 포위를 풀 때, 그를 따른다. 다시 병력을 일으켜 한고조가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보좌하여 공으로 후의 작위를 받는다." 이를 보면, 여택은 여러번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앞의 <항우본기>에도 언급하고 있다: "그 때, 여태후의 오빠인 주여후는 한나라의 병력을 이끌고 하읍에 주둔했다. 한왕을 쫓으며, 그의 사졸을 약간 거두었다." 당시 여택은 병력을 이끌고 하읍을 수비했으며 유방이외의 독립된 군대를 거느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여택은 원래 군공집단의 중요한 대표인물이다. 여씨인물의 상황에 대하여는 그저 약간의 단서만 찾을 수 있다. <공신표>에는 동무후 곽몽이 "도무왕(즉, 여택)의 속하로, 진나라군대를 강리에서 격파하고, 양웅군을 곡우에서 격파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택은 병력을 이끈 장수이며, 여택의 부하로 표시된 사람은 그 외에도 정복, 고봉(<한서>에는 충달이라 함), 주진, 풍무택, 주신, 여영등이 있다. 그중 정복의 봉지는 7,8천호에 달한다. 그의 공로는 번쾌, 역이기, 등, 관보다 위이다. 다만 <공신표>외에는 그저 여기저기 단편적인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현상에 대하여 사학계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여씨가족이 주살된 후, 조정을 장악한 군공집단에서 역사를 고쳤다는 것이다. 여택과 그의 부하들의 전투와 공적을 말살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료기재에서 그들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여씨일가의 군공은 기실 아주 제한적이고, 여치가 움직여서, 여씨 및 그 부하들의 공로를 크게 올려주었다고 한다. 논공행상시에 번쾌보다도 높게 받았다.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확실한 증거는 없다.
현재에 볼 수 있는 사료로 말하자면, 유방은 여치 및 그 일가에 대하여 그다지 빚진 것이 없다. 공신을 분봉하는 과정에서, 여택은 주여후에 봉해진다. 이 대우는 공로와 상응한다. 비록 어떤 학자들은 여택의 공로는 왕에 봉해져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저 일가지언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여치의 부친 여공은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같은데도 후에 봉해졌다; 이것으로 비긴 셈치면 된다.
문제는 부부간에는 이익교환과 가족연맹의 작용만이 아니라, 당연히 온정과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부와 능력을 지닌 개국군주로서 유방은 대국관이 있었다. 그래서 큰 이익관계를 잘 정리했다. 다만 처의 내심은 보살피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유방을 탓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고대의 어느 '큰 일을 하는' 남자도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비슷하다. 그의 여러가지 일처리는 여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한다.
만일 유방이 거병하여 진나라에 반기를 들 때,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면, 처자식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가 팽성에 오고나서도 겨우 이백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인 패현의 처자식을 데려오지 않은 것은 확실히 여치와 자녀를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확실히 그러했다. 여치와 태공은 항우에게 인질로 잡힌다. 유방은 헤어졌던 아들과 딸을 만났지만, 더 빨리 도망치기 위하여 그는 여러번 아이를 수레에서 차버린다. 여치가 몰랐다면 그만이지만, 나중에라도 이 일을 알게 되면, 이런 남편에게 원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여치는 항우의 인질로 잡혀 있을 때,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 항우가 형양(滎陽)에서 대치할 때, 항우는 유방에게 투항하라고 협박하며, 태공을 삶아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아마도 여치를 삶겠다는 말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웃으면서 말한다. 나와 너 항우는 결의를 맺은 형제이어서, 나의 부친은 너의 부친이다. 네가 너의 부친을 삶겠다면 나에게도 한 덩어리 나눠 주어라. 항우는 이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거기에 항백의 유세를 듣고는 포기해버린다.
부친으로서, 처로서, 눈앞에서 유방이 아무런 망설임없이 자신을 버리는 것을 보고 마음의 병을 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태공은 나이 70이 넘은 시골노인이다. 감정이 비교적 거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20여세의 젊은 여인 여치는 확실히 더 민감했을 것이다.
2년 4개월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여치가 한군군영으로 돌아온다. 이때, 유방의 곁에는 이미 척희가 있었다. 여치가 한으로 돌아온 후, 이미 "상유수(常留守), 희견상(希見上), 익소(益疏)"라고 한다. 매번 그녀가 집을 지키고, 유방은 척희를 데리고 바깥을 나갔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여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록(呂祿)은 여후(呂后)의 유언중 어떤 것을 따르지 않아 전패하게 되었는가? (0) | 2018.05.15 |
---|---|
권력이 없었다면 여후는 행복했을까? (0) | 2015.04.25 |
여후(呂后)는 심이기(審食其)와 사통했는가? (0) | 2014.10.02 |
여후는 광견병으로 죽었다 (0) | 2014.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