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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후)

권력이 없었다면 여후는 행복했을까?

by 중은우시 2015. 4. 25.


글: 후홍빈(侯虹斌)


1


여후는 정치세력의 투쟁과 후계자 다툼에서 잠시 승리한다. 그러나 국가관리층면에서 여후는 여러가지 곤경에 빠진다. 그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농촌에서 농사나 짓던 출신의 여인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교육을 받아보았겠는가?


실제로, 여후의 집정기간동안 중앙과 제후국의 관계는 아주 긴장된다.


2001년 문물출판사가 정식으로 출판한 <장가산한묘죽간(247호묘)>라는 책이 있다. 묘주는 여후2년에 죽었는데, 그 안에는 당시의 율령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책의 "간1-2.133"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성읍정장반(以城邑亭障反), 항제후(降諸侯), 급수승성정장(及守乘城亭障), 제후인래공도(諸侯人來攻盜), 불견수이기거지약항지(不堅守而棄之若降之), 급모반자(及謀反者), 개요참(皆要斬)"(<적률(賊律)>)"


유사한 내용이 또 있다: "포종제후래국간자일인(捕從諸侯來國間者一人), 배작일급(拜爵一級), 우구이만전(又購二萬錢)..."


또 있다: "율소이금종제후래유자(律所以禁從諸侯來誘者), 영타국무용취타국인(令它國人取它國人也).난수불고래(闌雖不故來), 이실유한민지제국(而實誘漢民之齊國), 즉종제후래유야(卽從諸侯來誘也)."(<진헌서>)


이상의 이들 글자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개략적인 의미는 제후국에서 와서 공격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제후국에서 온 자를 한 명 붙잡으면 얼마얼마를 포상한다; 제후국의 사람과 통혼해서는 안된다....이런 것들은 무슨 문제를 얘기하는가? 중앙과 제후국간에 이미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긴장은 상층의 내부투쟁이 아니라 마치 적국과 같은 전 백성이 경계하고 서로 적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법률에까지 규정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한고조가 재위때 공신을 제거하면서 여후가 많이 가담한다. 특히 가장 억울하게 죽은 팽월과 한신때 그러했다. 한고조가 죽은 후, 공신과 제후는 여후에 대한 우려가 아주 컸다. 여후는 육국의 구귀족과의 관계를 완화시킬 능력이 없었고, 새로 봉해진 제후들과도 척을 졌다.


내정도 잘 안되는데, 외교는 더욱 어려웠다.


기원전195년, 유방은 육가를 남월국에 사신으로 파견한다. 원래 의도는 남방을 차지하고 사단을 일으키며, 인구와 재물을 약탈해가는 남월국의 군주 조타를 혼내주려는 것이었다. 조타는 원래 진나라의 남해도위였다. 그러나 진나라가 무도하자 그는 스스로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남월삼군을 집어삼킨 한 지방의 효웅이었다. 당시 한나라 중앙정부에 있어서, 남북으로 두 개의 큰 우환이 있었다. "북에는 호(胡, 흉노), 남에는 월(越)"이다. 다만 육가는 말재주가 좋았다. 그래서 조타의 기세는 누그러지게 되고, 한나라에 귀순하게 된다. 이 해에 조타는 정식으로 한나라황실로부터 남월국인을 받고, 서한에 칭신봉공하게 된다.


이때 중원의 황제는 이미 한혜제로 바뀌어 있었다.


여후와 제후의 관계는 계속 긴장되어 있었다. 조타는 외번(外番)의 사람으로서, 유방을 인정할 수도 있고, 유영을 인정할 수도 있지만, 황제의 지휘는 받지 않았다. 하물며 그 자신이 강인하고 교만하며 실력도 있었다. <한서>에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고후시(高后時), 유사청금월관시철기(有司請禁粤關市鐵器, 고후 즉 여후때 유관기관에서 남월과의 철기교역시장을 폐쇄하도록 청했다)" 이것이 남월과 사이가 나빠지게 된 도화선이다.


선의로 추측해보면, 여후가 멍청하기 그지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후가 조타와 사이가 나빠진 것은 조타가 서한조정을 눈에 두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찌되었건, 여후가 앞장서서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조타는 즉시 미친 듯이 날뛰게 된다: "고황제는 나를 왕으로 세우고 남월과 중원이 서로 사람과 물건을 통했다. 현재는 고후가 간신의 참언을 들어 나를 오랑캐로 여기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우리에게 팔지 않으려 하니, 이는 분명 장사왕의 계책이고, 우리를 소멸시키려는 것이다." 뒤의 몇 마디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도 황제(혹은 칭제하는 집권자)가 잘못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간신이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항해야 당시의 군신윤리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조타는 스스로 남무제라 칭하고, 장사를 공격하여 여러 개의 현을 점령해버린다.


다시 철기라는 이 도화선으로 돌아가보자. 철기의 사용은 문명의 정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지이다. 남월지구는 원래 경제와 기술이 비교적 낙후한 지역이다. 많은 지역은 아직도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족과의 문명교류와 교역이 날로 증가하면서 그들은 점차 농경문화로 변신해갔다. 여기에서 야철업은 아직 중원지구와 견줄만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량으로 한나라에서 수입해야했다. 여후가 철기교역을 중단시킨 것은 그들의 밥줄을 끊은 것이고, 남월의 생명선을 끊은 것이다.


전쟁시대와는 달리, 조타의 도전은 토지를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다. 장사지구는 무너진다. 만일 여후가 위무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면 아마도 전기가 마련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후는 한편으로 장군 융려후 주조를 보내어 남월을 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타의 조상묘를 파헤친다. 이는 조타로 하여금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만든다. 당연히 대항해야 한다.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중원의 사병은 고온다습한 남월의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속속 전염병에 걸려 대거 사망한다. 남령(南嶺)을 넘어보지도 못한다.


조타는 기회라고 여기고 회유책으로는 뇌물을 쓰고, 강경책으로는 병마를 국경선으로 옮긴다. 은혜와 위세를 겸하여 쓰면서, 민월, 서구, 낙월등지가 모두 그에게 귀속된다. 동서로 만여리에 이른다. 조타는 한왕조와 말그대로 분정항례(分廷抗禮)하는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유방이 구천에서 이를 알았다면 아마도 이 남북분열에 대하여 한탄했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논밭을 팔아먹을 때는 가슴아파하지 않는다"


나중의 한문제를 보자. 그는 여후보다 훨씬 기민했다. 조타의 친척에게 하사품도 내리고, 육가를 남월로 보내어 잘 말한다. 조타는 두 말 없이 신복하고 공물을 바치고 예를 올린다. 비용은 여태후때보다 훨찐 적게 덜었지만, 효과는 몇 배 더 좋았다.


2


그러나, 만일 여후의 멍청한 일면만 본다면 그것은 또한 실로 이 칭제한 여제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녀가 사방에 이리떼가 있는 상황하에서 십여년간에나 강산을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악독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적당히 멈출줄 알았다. 어떤 때는 간언을 들어주었다. 큰 시정방침에서 여후는 자신의 약점을 의식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었다.


예를 들어, 여후는 흉노와의 관계를 깨트리지 않았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알아야 할 것은 전체 서한왕조는 흉노와 엮여 있다. 모든 군왕은 흉노의 괴롭힘을 당해서 골치가 아팠다. 관계가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공로이다.


당초 유방이 재위할 때, 흉노는 계속하여 남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북방에는 각종 한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내심 불안했고, 유경(劉敬)을 불러 계책을 묻는다. 유경은 유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하가 이제 막 안정되었으니,무력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 흉노는 야만스러우니 인의를 베푸는 것은 힘들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적장공주를 보내어 화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황제는 선우의 장인이 될 수 있다.


이때 노원공주는 이미 시집을 갔다. 그러나 유방은 원래 자녀와의 정이 도타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 방법에 찬성하고 여후와 상의한다. 여후는 당연히 울며불며 동의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녀의 오빠인 여택은 흉노가 대(代)를 침범했을 때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다시 딸까지 흉노에 시집보내다니 그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방은 양보하지 않았고, 종실의 딸을 장공주로 봉하여 흉노에 보내고, 예물도 풍성하게 보낸다.


결국 유방은 흉노를 회유할 수 있었다.


한혜제에 이르러, 모돈선우는 서신을 보내어 여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 중국의 토지에 흥미가 있다. 너도 과부이고 재미있는 일이 없을테니 나에게 시집을 와라. 그러면 너의 것이 내 것이 된다. 여후는 대노한다. 그래서 진평과 번쾌, 계포등을 불러서 사신을 죽여버리고 출병을 하려고 한다. 번쾌는 10만을 출병시키면 흉노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계포는 극력 반대한다. 번쾌 너는 나라를 망치고 있다. 당초 네가 상장군일 때 삼십이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도 고조황제는 평성에 포위되어 있었고, 하마터면 거기서 죽을 뻔했다. 현재 그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네가 감히 그렇게 허풍을 떠느냐.


여후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자 이치에 맞았다. 그래서 편지를 쓰면서 한나라를 겸하하고 자신을 겸하한다: "나는 나이가 많고 쇠약하며 이빨이 빠지고 머리카락도 떨어졌다. 걸음걸이도 온전치 못한다" 그래서 선우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으니 그냥 놔두어라. 그리고 "폐읍무죄(蔽邑無罪), 의재견사(宜在見赦)"해달라고 한다.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 이와 동시에, 한나라는 "종실의 여인을 공주로 하여, 흉노 모돈선우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한다.


한 사람이 이렇게 바짝 엎드려 버리면, 그를 밟으려는 사람도 재미가 없게 된다. 모돈선우도 동의하고 종실녀와의 화친을 받아들인다.


누경(婁敬, 나중에 유씨로 사성을 받아 유경이 됨), 계포등이 도와주는 바람에 그리고 유방이 살아있을 때 흉노와 싸워서 크게 손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흉노가 시시때때로 변방을 괴롭혔지만, 여후는 계속 은인자중하고 양보하며 화친하고 예물을 보내는 정책을 썬다. 한혜제, 여후집정기간동안, 모두 흉노와는 큰 사건이 없이 지나게 된다. 비록 후세에 여후가 스스로를 더럽히며 스스로를 지킨 행위에 대하여 이견이 없지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구체적인 상황을 보면 확실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당시에 민생이 어려웠던 한왕조가 한창 기세오른 야만민족을 적으로 삼아 출병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여후는 국가의 큰 시정방침과 외교에서 전체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백성들에 대한 간섭도 비교적 적었다. 이런 무능력,무작위는 바로 그녀의 장점이다. 조참이 하루종일 술만 마시고 연회를 베풀며 정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승상의 봉급을 받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소규조수(蕭規曹隨)"(소하가 만든 규정을 조참이 그대로 따르다)한 미덕이나 가화와 마찬가지이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인성의 아이러니인가. 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한문제와 한경제때, 한왕조는 흉노에 대하여 식사녕인(息事寧人)의 책략을 취하여 기반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3


한혜제의 사후, 여후는 8년간 임조칭제한다. 그녀는 어떻게 죽었는가? 원래 그녀는 패상에서 불제(祓祭)를 지낼 때 한 마리의 창구(蒼狗)를 본다. 이 개는 여후의 겨드랑이에 상처를 입히고 사라진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사기>에는 "거고후액(據高后腋)"이라고 하였고, <한서>에는 "극고후액(撠高后腋)"이라고 하였다. 신을 믿지 않는 왕충은 <논형.사위편>에서 직접적으로 "서기좌액(噬其左腋)
(왼쪽겨드랑이를 물다)"이라고 적었다. 3자간에 말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개가 물어서 상처를 입은 것이다. 4개월후, 여후는 액상으로 사망한다.


광견병의 잠복기는 길이가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평균 20-90일이다. 잠복기의 감염자는 아무런 증상이 없다. 기록을 보면, 여후의 사인은 광견병과 아주 유사하다. 위풍늠름한 여제가 광견병에 죽다니 실로 사람의 앞날은 알 수가 없다.


여후가 중상을 입었을 때 조왕 여록을 상장군으로 하여 북군에 거하게 하고, 양왕 여산을 상국으로 하여 남군에 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산, 여록에게 말한다: "고조는 대신과 약속했다.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는 천하가 함께 공격하라고. 지금 여씨가 왕이 되어 있으니, 대신들의 불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곧 죽을텐데, 변고가 있을까 걱정이다. 반드시 병력을 장악하고, 장례에 참석하여 다른 사람에게제압당하지 말라." 즉, 여후는 이미 정변이 발생할 것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여씨가족은 권력을 장악했지만, 조정의 대신들 그리고 지방의 제후들과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여씨가 왕이 된 시간은 아직 짧아서 무슨 일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적대정서는 여후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여후는 당초 자신의 가족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여씨와 유씨간의 혼인을 많이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의 최명부가 될 줄은 몰랐다. 여록의 딸은 제도혜왕의 아들 주허후 유장에게 시집가는데, 유장은 이로 인하여 여록과 여산이 작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장은 사람을 보내어 형인 제왕 유양에게 알리고, 유왕은 낭야왕 유택에게 연락하여 함께 거병을 준비한다. 다시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에 연락하여 내부에서 호응하게 한다. 여산, 여록이 두 명은 대장군 관영을 보내어 유양, 유택을 맞서게 한다. 그러나 관영은 즉시 창끝을 거꾸로 잡고, 유씨와 연합하여, 적절한 기회에 여씨를 몰아내기로 한다.


역상의 아들 역의와 여록은 친한 친구이다. 진평, 주발은 역기를 핍박하여 여록으로 하여금 군권을 포기하게 만든다. 여록은 이를 믿고 주발에게 군권을 넘겨준다. 주발이 군문을 들어서자 대군에게 묻는다: "여씨편은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편은 왼쪽 어깨를 벗어라(左袒)". 병사들은 모조리 왼쪽 어깨를 벗는다. 주발은 북군을 장악한다. 이제 유씨를 옹호하는 군대는 파죽지세가 된다. 여산은 비록 미앙궁으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유방이 병력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여산을 화장실에서 죽여버린다.


유씨황족과 조정의 대신들이 대승을 거둔다. 이어서 여록을 참하고, 여수(呂嬃)를 태형을 때려 죽인다. 여씨 남녀는 모조리 잡아들이고,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참한다. 후소제와 세동생으로 왕이된 자는 모조리 진평등이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역시 죽여버린다.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효문황제이다.


이 병변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의미는 적지 않다. 여씨가족은 모조리 도와줘도 되지 않는 아두였다. 여후의 여동생 여수는 비록 후에 봉해졌지만, 역시 혀만 살아있는 여인네였으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병력을 이끈 여록, 여산도 기본적으로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전멸당한다. 여록은 스스로 병권을 내놓았으니, 견식에 아녀자인 여수보다 못했다.


이번의 거의 코미디같은 반항으로 보면, 여후가 권력을 장악한 십오년동안, 여씨가족의 권력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크지 않았다. 여씨중에 왕이 된 사람(추봉된 경우는 제외) 주로 여후의 7년간에 집중되어 있다. 즉 여후가 죽기 전이다. 그들은 황급히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병권을 잡았다. 권력을 아직 공고히 하기 전이었다. 조정에는 자신들의 사람 이외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만들어놓지 못했다.


기실, 여후가 이런 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녀는 유씨자제들을 회유할 뜻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제왕의 차남 유장, 유흥을 파격적으로 후에 봉한다. 그리고 여씨를 유씨와 혼인시킨다. 그를 도와준 적이 있는 노신들에게는 은혜로 보답한다(예를 들어 관영, 역상의 역기, 장량의 아들 장벽강등은 모두 중용된다). 자신의 정치판도를 강화시키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이렇게 베푼 은혜는 자신의 친정식구들에게 드러내놓고 내린 것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더욱 가소로운 일은, 여씨일족은 심지어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약한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겨우 얻은 친구인 역기가 여록을 속여먹는다. 파견한 대장 관영은 전투에 앞서 배신을 한다. 병권을 내놓자, 사병들은 전부 유씨를 지지하여 여씨를 멸족시킨다. 딸은 유씨를 도와서 부친을 망하게 만든다. 당초, 여후가 다른 권력집단을 회유하고 끌어들였지만, 이들이 바로 여씨집단을 무너뜨린다. 그녀가 가장 후대한 사람들이 바로 여씨를 없애는데 가장 큰 공신들이 된다.


사서에는 여씨의 권력이 컸다고 나온다. 그러나 어디가 크단 말인가? 여후의 오빠와 조카들이 무능하긴 했지만, 모든 문제의 근원은 여후에게 있었다. 분명 사람들마다 두려워하고, 대권을 15년간이나 독점하는데, 그녀는 여씨집안의 사람들을 왕에 봉할 줄만 알았지, 세력집단을 배양하지는 않았다. 여씨의 문하에는 거의 지지자가 하나도 없었다. 조정대신 및 각지제후들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이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모라면, 여산, 여록이 어떻게 하였더라도, 멸족당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다.


4


중국역사상, 태후로 정권을 장악한 집권자는 많다. 여후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관리능력, 치국능력이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절대다수의 어려서부터 엄격한 전문교육을 배운 태자도 등극후에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교육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여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양한, 양송때 우연히 평가가 좋은 수렴청정의 태후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녀들에게 치국의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권력을 내놓고, 전문능력이 있고, 품행이 비교적 좋은 대신들에게 처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진정으로 정치적 재능을 지닌 여인을 꼽으라면 그녀는 바로 무측천이다. 그녀야말로 진정 국가를 관리하길 좋아했다. <신당서.본기제4>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시시때때로 황후에게 결정하게 하고 항상 성지를 내렸다. 이렇게 국정에 참여했다". "정무에 능통하여 몇 마디 상소문을 보고도 천하의 이해관계를 이해했다.", "군국대사중 처리할 수 없는 일은 천후의 말을 들어라." 이를 보면 여후는 무측천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이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무측천은 관료집안 출신이고, 독서를 좋아했다. 그러나 여후는 시골의 촌부이고, 자신의 용기와 운으로 거기까지 기어올라간 것이다.


여후의 일생을 보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여인은 총명하고, 과감하며, 끈질기다. 심계도 있고 수완도 있다. 운도 아주 좋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수무촌철(手無寸鐵)의 그녀가 피비린내나는 길을 뚫고 사실상의 여황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천하를 장악한 것은 장악한 것이고 그녀의 속좁안 여성심리와 정치능력의 부재는 그녀의 최후가 좋지 못하게 만든다. 유골이 식기도 전에 여씨는 멸족한다. 어린 황손들까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


권력의 만족감이 없다면, 그런 살벌하고 과단한 쾌감이 없다면, 여후는 행복했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의 개인생활에서, 그녀와 남편 유방의 관계는 냉담했을 뿐아니라, 악화되었다. 심지어 너죽고 나살기식까지 나간다. 그녀의 딸 노원공주는 하마터면 멀리 흉노로 시집갈 뻔한다. 사위는 모반죄에 걸려 구사일생하고, 외손녀 장언도 일생이 불행했다. 여후는 이 딸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미안함이 있었다. 친아들 혜제와는 어떠했는가? 거의 반목하여 원수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여후가 고민하여 한혜제를 위하여 처리한 것은 최대위협 조왕 유여의를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독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고, 귀머거리로 만들어 측간에 던져 넣어 "인체(人彘)"로 만든다. 그리고 아들을 불러 그녀가 정치투쟁에서 승리한 성과물을 보게 만든다. 아마도 득의만면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아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선량한 아들은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 한혜제는 모친을 성토한다:


"이런 일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로 부끄럽습니다. 나는 더 이상 천하를 다스릴 면목이 없습니다."


여후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후회했을까? 아니면 이 아들이 그녀의 호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원망했을까? 아마도 후반생에 사람들이 그녀의 곁을 다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아마도 옛날에 논밭에서 농사지을 때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웃고 놀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